■ 책 읽는 아담들
요즘 서점가는 중년 이후의 남성들로 북적댄다고 한다. 불과 1년 전만해도 30~40대 여성들이 책을 가장 많이 읽는 독서층으로 집계되었는데, 그것이 점점 50~60대 남성들에 의해 추월되고 있다고 하니 반가워해야 할 일인지 의아해 해야 할 노릇인지 도통 모르겠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즐겨 읽는 책이 실용적인 장르의 것들이 아니라 주로 시와 소설류라는 사실이다.
인문학 서적이라! 혹여 이는, 학창시절을 종료하고 곧바로 생존의 전선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달려오다가 홀연 ‘은퇴’라는 당황스런 상황에 내몰리게 된 저 남정네들이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두었던 ‘인생’ 관련 물음들을 끄집어내어 다시 소년처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예후가 아닐까.
“죽기 살기로 질주해온 그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에 황당하게 들이닥친 멈춤, 그리고 아- 이 낯설기만 한 허무는 뭐지?”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며, 내 인생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모르긴 모르겠으되, 오늘의 ‘아담들’은 하릴없이 읽는 책갈피에서 문득 이런 식의 물음들에 맞닥뜨리지 않을까. 개연성이 높은 얘기다.
나는 그 방증을 며칠 전 만난 대기업 임원에게서 보았다. 지인의 소개로 주선된 그 만남의 자리에 그는 나의 저술 수십 권을 들고 나왔다. 주변에 선물하겠다며 사인을 청하기 위함이었다. 대동한 부인의 말을 따르면, 그가 갑자기 독서광이 된 것은 바로 최근이었다. 이 책 저 책 가리지 않고 읽다가 무슨 영문인지 나의 충실한 애독자로 굳혀졌다는 것이다. 옮기기 남세스럽지만, 그는 나의 저술들에서 인생고뇌의 출구가 보였기 때문이라고 그 까닭을 밝혔다.
인생고뇌의 출구! 말이 그렇지 그 진짜 출구는 우리 인생 끝자락에 있다. 아마도 그가 ‘보였다’고 표현한 것은 ‘어렴풋이 방향이 감 잡혔다’라는 의미였으리라.
■ 아담의 노래
최초의 인간 아담. 그는 인류의 원형인 동시에 남성의 원조다. 에덴동산에서 활개치며 살았던 그에게 인생은 어떤 모양새였을까. 그는 과연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그에게는 고뇌가 없었을까. 창세기에 나타난 단서를 따라 그의 심상을 추적해 보자.
아담이라는 이름은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adama)에서 왔다. 이는 인간이 흙에서 온 존재라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데 이 아담이 생명체가 된 것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어주신 ‘숨’ 때문이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여기서 ‘흙’은 자연과 현실을 가리킨다. ‘숨’은 신적 기원 곧 초월적 특성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인류의 원형 아담은 자연계의 현실에 발붙이고 살지만 본디 신적 생명력을 지닌 초월적 존재다. 이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표현한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참조).
여기서 ‘우리’는 다신(多神)을 뜻하지 않고 ‘신들의 총체’ 곧 절대신을 지칭한다. 주목할 것은 ‘모습’이라는 단어로 겉모양이 닮았을 때 사용되는 ‘데무트’(demut)와는 달리 “본질이 닮았다”는 것을 뜻하는 ‘셀렘’(selem)이 쓰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겉모양이 아니라 속, 곧 특성을 닮았다는 이야기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음을 강조한다. 이는 영성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닌다. 풀어 말하면 이런 말씀인 셈이다.
“지금 이대로 좋다. 뜻한 대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참 잘 작동하고 있다. 계속 그대로만 존속하거라.”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성품과 기품 그리고 됨됨이에 대만족이셨다. 여기에 단하나의 아쉬움이었던 아담의 거들짝 ‘하와’까지 배려하시어 살뜰하니 정분을 붙여주시니 이제 부족할 것이 없을 판이다. 마침내 아담은 에덴동산 촌장으로 임명된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그리하여 이러구러 행복하게 나날을 소일하던 아담. 어느 호젓한 저녁녘, 감동에 겨워 콧노래를 부르다, 절로 찬미에 젖어든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편 8,4-10).
■ 차라리 자유를 반납하고 싶다
저렇게 노래했던 아담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었다. 바로 ‘선악과’다(창세 2,16-17). 거두절미하고, 선악과는 한마디로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 인간의 질서를 규정하는 명령이다.
“네가 무엇이든 다 해도 좋은데 내 영역만은 건드리지 마라. 나는 하느님이고 너는 인간이다. 이거 하나는 지켜라.”
이 취지를 아담이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느님 명령에 순명할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홀로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그를 꼬드기는 유혹자들이 있었다. 약한 마음에, 그놈의 정 때문에 그만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홀연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수치감이 엄습했다. 그는 숨는 길을 택했다. 짓궂은 하느님!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부르셨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그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이는 회한과 원망, 그리고 해명과 바람이 교차되는 고백이었다.
님이시여, 제가 지금 숨었나이다.
저는 벌거숭이, 몸뚱어리가 수치스러워 감히 얼굴조차 내밀지 못할 노릇!
님께서 제 ‘갈비뼈’로 만드신 거들짝 하와, 그녀의 권에 넘어가
그만 선악과를 한 입 깨물었더이다.
당신을 거스르려는 음모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기어코!
그저 의리를 좇다가 그 꼴이 되었습니다. 찰나의 방심!
순간의 달콤함으로 무시간의 복락을 잃었습니다.
보시나요, 저의 이 쓰라린 폐부를.
아-, 제 심실의 안주인 자유의지가 이토록 거추장스러울 줄이야.
님이시여, 차라리 거두어주소서.
제가 기꺼이 반납하오리다.
이는 그대로 이 시대 아담들의 탄원이기도 하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85)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2) - 아담의 탄원
님이시여, 차라리 거두어주소서
발행일 : 2014-09-28 [제2912호, 13면]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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