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파파 프란치스코

십자가 대장정 마친 승현이 아빠에 교황 “세례 받을 자격 충분합니다”

김레지나 2014. 8. 29. 21:10

십자가 대장정 마친 승현이 아빠에
교황 “세례 받을 자격 충분합니다”

등록 : 2014.08.17 21:16 수정 : 2014.08.21 14:38

 
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가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주한 교황청대사관의 소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AP 연합뉴스

세월호 유족에 직접 세례

이씨 “구름에 감싸인 느낌”
세례명 ‘프란치스코’ 선택
교황청 “유가족 고통 공유” 

“2000리 180만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교리를 배우지 않았지만, 제가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자격이 충분합니다.”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유족들의 요청을 하나도 뿌리치지 않았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기 전에 거치는 교리 공부를 하지 않은 단원고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56)씨가 지난 15일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앞서 교황을 면담한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꺼낸 세례 요청도 “자격이 된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세월호 참사 뒤 십자가를 지고 38일간 2000리(800㎞) 길을 걸은 이씨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주한 교황청대사관을 방문해 교황이 직접 주례하는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됐다. 한국인이 교황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은 일은 1989년 10월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서울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서 한국 청년 12명에게 세례를 준 뒤 25년 만의 일이다.

이날 아침 7시20분께 세례식을 마치고 대사관을 나온 이씨는 교황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모습이었다. 기자들과 만난 이씨는 “구름에 감싸인 느낌”이라며 “졸지에 승현이를 잃고 엄청난 충격, 슬픔, 분노가 있었는데 교황님을 뵙고 난 뒤 상당 부분 없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세례식에서 교황이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살아달라”는 말씀을 했다고 전했다.

40분가량 진행된 세례식은 교황청 안 성당에서 의자 4개만 둔 채 간소하게 치러졌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세례식은 교황청에서 모두 준비했다. 세례를 받을 때 보증인이 되는 ‘대부’는 교황청 직원이 맡았다. 교황청은 세례식에 이씨뿐만 아니라 이승현군의 형 동현씨와 누나 아름씨가 동석하도록 배려했다.

교황은 세례 선물도 마련했다. 바티칸에서 가져온 묵주와 성모마리아와 예수가 새겨진 메달, 한글 성서, 세례식에 쓴 초와 수건 등을 이씨에게 하나하나 전달했다. 동현씨, 아름씨와도 인사를 나누고 ‘셀카’를 찍었다. 동현씨는 “아버지랑 둘이 찍고 계셨는데, 저희들보고 오라고 하셔서 같이 찍었다. 엄청 높으신 분인데 높고 낮은 그 차이가 없게 대해주시더라. 안아주시고, 손잡아주시고, 눈도 맞춰주시고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얼떨떨하고 신기했다”고 했다. 그는 교황에 대해 “그냥 보기만 해도 선한 사람 같았다. 눈이 참 깊었다”고 했다.

이씨는 세례명으로 프란치스코 교황과 같은 ‘프란치스코’를 선택했다. 그는 “교황님께 세례를 받게 되니까 같은 이름을 쓰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들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라고 권해주셨다”고 했다.

교황청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족에게 세례를 줬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15일 저녁 브리핑에서 “교황님이 유가족의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직접 세례를 주고 새로운 신자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번 방한의 아주 놀랍고 멋진 결과”라고 밝혔다.

교황은 이날도 하얀 수단 왼쪽 가슴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달았다. 이씨는 “교황님께 아이들을 위해서 잊지 마시고 기도해달라고 진심으로 부탁드렸다. 교황님이 정말 감사하게 제 청을 받아주셨다. 바티칸에 가서도 교황님의 기도가 계속될 것 같다”고 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