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험 잡설
모름지기 사제나 수도자들은 가장 답하기 싫어하는 상투적인 질문으로 “왜 신부가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는가?”를 꼽지 않을까 한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답변은 꼬박꼬박 잘 해준다. 이렇게!
“성령께서 내 모가지를 끌고 가셔서, 기분 좋게 따라갔을 뿐입니다.”
불친절한 듯한 어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대로 사실이다. 무엇에 홀리지 않고서야 어느 누가 성소자의 길을 택하겠는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나의 저 답변보다 더 극단적인 언사를 쓰셨다.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음을 느꼈다. 쇠사슬에 포박당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사슬에 결박당하여.”
사실 이런 체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옳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께 결박당하여 끌려 다니는 형국 아니고 무엇이랴. 성령께 끌려 다니며 미친 듯이 성당에 가고,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하고, 홀린 듯이 봉사하고…. 이것이 성령의 존재이유이며 영향력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어떤 소설가는 소설을 쓸 때, 한편으론 괴롭지만 한편으론 설레고 즐겁다고 합니다. 자신이 쓰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빨리 자기 얘기를 해 달라고 아우성치기 때문이랍니다. 신부님은 글을 쓰실 때, 어떤 심정으로 쓰십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글을 쓸 때, 뭔가 흐르는 느낌이 듭니다. 흐름이 강하게 오면 쓰고, 흐름이 멈추면 안 씁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불타고 있으면서 영감을 주시기 때문에 글이 흐르는 것이다. 이 흐르는 글은 성령의 충동과 감동이 있기에 엄청난 다이내믹이 있다. 역동적이다. 폭포가 됐다가 강이 됐다가 시냇가가 됐다가… 변화무쌍하다.
■ 성령을 믿으며
드디어 사도신경의 ‘성령을 믿으며’라는 대목에 이르렀다.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크레도 인 스피리툼 상툼’(Credo in Spiritum Sanctum)이다.
‘인’(in)이 들어간 신앙고백은 여기서 끝난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인’에는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건다”라는 ‘올인’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했다. 성부 하느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여기 성령까지, 이렇게 삼위일체에는 ‘인’이 들어간 신앙고백을 하고, 그다음 이어지는 ‘~교회를 믿으며’, ‘~통공을 믿으며’에서처럼 이어지는 ‘~을 믿으며’에는 ‘크레도’(Credo)만이 나온다.
그러면 여기서 ‘스피리툼 상툼’, 이 성령은 무엇인가.
구체적이지만 포착할 수 없고, 볼 수 없으나 강력하며, 인간이 호흡하는 공기처럼 생명에 필수적이고, 바람이나 폭풍처럼 역동적인…, 이것이 성령이다. 히브리어로 ‘루아흐’(ruach), 그리스어로 ‘프네우마’(pneuma), 그리고 라틴어로 ‘스피리투스’(spiritus)다. 이 세 단어 모두 성령이 지니고 있는 생동력을 표현해 준다.
‘스피리투스’라는 이 단어에는 ‘정신’이라는 뜻도 있지만, ‘알코올 (음료)’과 ‘휘발유’라는 뜻이 있다. 정제해서 엑기스를 빼내면 알코올 음료가 되고, 또 그중의 일부는 연료가 되는 것이다.
성령은 마치 술과 같다. 술처럼 성령에 취하는 것이다. 취하면 어떻게 되나? 기분이 좋다! 업(up) 된다. 성령은 또 주유소의 기름 같은 것이다. 성령으로 딱 채우면, 충전이 되고 기운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없던 기운도 생기는 것이다.
살면서 만나는 여러 가지 우울증, 예를 들면 갱년기 우울증, 인간 상처로 인한 우울증, 퇴직 우울증 등에서 우리가 사는 길은 무엇인가. 바로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치유된다. 왜? 기운을 주시고, 생에 의욕을 주시니까.
■ 특정인에게서 만인에게로
구약성경에서는 성령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꾼으로 뽑힌 이들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구약과 신약의 분수령을 이루는 예언이 내려졌다.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요엘 3,1-2).
이 말씀은 장차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노인들이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환시를 본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비전’이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영이시다.
구약의 예언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다. 이후 성령은 언제나 국면을 극적으로 전환 또는 반전시켜주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선포자’로 변화시켰다(사도 2,1-11 참조). 이 ‘성령’이 죽음이 두려워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증거자’로 변화시켜 마침내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뒤따라 담대하게 ‘순교’하게 하였다.
한마디로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이 이어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바로 이 성령으로 인해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이어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어떠했나. 성령의 능력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했고(사도 3,1-10 14,8-10 참조), 죽은 이를 살려냈고(사도 9,36-41 20,7-12 참조), 악령을 몰아냈고(사도 16,16-18 참조), 열정적으로 설교했다(사도 2,14-36 17,22-31 참조).
이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워진 그들은 힘차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뿐 아니라(사도 2,41 참조), 사람들이 하느님의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사도 8,16 참조).
성령께서 이루신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성령으로 인해 공동체는 ‘한 마음 한 뜻(영)’이 될 수 있었다(사도 4,32 참조). 성령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렸다. 소유와 인종과 성별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의미를 잃게 되었다(갈라 3,28 참조).
이렇게 성령이 만민 위에 내려옴으로 인해서 지난날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사 64,7 참조)에 지나지 않았던 하느님은 마침내 ‘만물의 아버지’(에페 4,6)가 되셨다.
이렇듯이 초기교회에서 성령은 드라마틱하고 강력하게 역사했다. 그 이후 2,0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성령은 자신의 리듬을 타면서 때로는 태풍처럼, 때로는 역풍처럼, 때로는 순풍처럼, 때로는 미풍처럼 자유자재로 흐르면서, 교회의 내적 생명력으로 작용해왔다.
이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이냐시오 드 라타꾸이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성령이 아니 계시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의 인물에 불과하고,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한낱 조직에 불과하고…
전례는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이고
그리스도교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불과하다.”
핵심을 뚫는 적절한 표현이다. 그의 영감어린 선언처럼, 성령이 중재하시기에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더 잘 느끼고, 성령이 감도하시기에 복음을 생생하게 알아듣고, 전례를 역동적으로 체험하며, 신바람이 나서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37) 성령에 포박 당하자
성령이 있기에 신바람나는 신앙이 있다
발행일 : 2013-09-29 [제2863호, 13면]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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