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신나고 힘나는 신앙 34 - 상실의 시선을 희망의 시선으로 : 승천 신앙

김레지나 2014. 8. 7. 21:04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34) 상실의 시선을 희망의 시선으로 : 승천 신앙

예수님 승천은 ‘떠남’이 아닌, 우리와 더욱 ‘하나됨’ 의미
발행일 : 2013-09-01 [제2860호, 13면]

■ 성지에서의 불경한 분심

5년 전쯤 이스라엘 성지 순례 때의 일이다. 예루살렘 올리브 산 인근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이 서린 처처에 대한 가이드의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해설에 홀딱 빠져 듣다 보니, 베타니아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가이드는 한층 고조된 음성으로 안내해 주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베타니아,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신 곳입니다.”

나는 그 말 한마디에 벌써 감동에 젖어들었다. 아! 이곳이 바로 그곳이구나. 마침내 예수님께서 33년의 지상생활을 마감하시고 장엄하게 하늘로 오르신 곳! … 한참 눈을 감고 감흥에 몰입하고 있는데 가이드의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자, 이 바위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당신의 발자국을 남기셨다고 전해지는 바위예요. 선명한 발자국 보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승천 바위라고 불러요.”

발모양의 형상이 큼지막하게 패여 있는 그 바위를 보는 순간, 나는 분심이 들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꼭 발자국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일까. 부활의 과정도 신비에 감추시고 빈 무덤만을 남기셨던 예수님께서 왜 굳이 승천하실 때에는 저렇게 과장스런 흔적을 남기시고자 하셨을까. 과연 그것이 진짜 예수님의 발자국일까….

승천에 관한 성경의 진술에는 한 점 의심 없이 믿음이 가지만, 그때 그 분심은 나에게 여전히 미궁이다.

차제에 공부삼아 성경의 기록을 추적해 보자. 루카 복음서는 승천 이야기를 정확히 지명을 밝히면서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이에 대한 다른 성경의 진술들은 서로 보완해 준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짧게 기록되어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여기서는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더 장엄하게 묘사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이렇게 무지무지 장엄한 그림이 펼쳐진다.

■ 준비되지 않은 이별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예고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속은 것이었다. 왜냐? 제자들은 도시락 싸가지고 소풍가는 걸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이 하늘로 오르시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들은 단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과 늘 함께 계시리란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직후, 제자들은 의기소침해 있었다. 자신들이 예수님 돌아가실 때 배반하고 도망 다닌 사실이 떠올라 겸연쩍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특히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혹여 자신에게 말 시키실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부활하시어 함께 한 40일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의욕이 되살아났다. 그래 소풍 간 그날, 예수님이 떠나시리란 걸 전혀 생각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이는 제자들 안에서 아직도 인간적인 희망이 싹트고 있는 물음이었다.

“이제 주님이 드디어 왕좌에 앉으십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라면 이 세상 어떤 군대가 두렵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그때는 아버지만이 아신다”(사도 1,7).

그러시곤 갑자기 예고에 없던 강복을 주시고,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러니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사들이 나타나서 꾸짖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상실감에 빠져 있던 제자들을 향한 일침이었다. 이제 제자들은 상실의 시선을 희망의 시선으로 바꿔야 한다. 똑같은 하늘을 쳐다봐도 상실의 시선이 아니라 희망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사도신경 안에서 앞의 ‘상실의 시선’은 ‘희망의 시선’으로 바뀌어 고백되고 있다. 이제 우리들이 음미할 대목은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하늘에 올라’는 라틴어로 ‘아센디트 아드 챌로스’(ascendit ad caelos)다. ‘아센디트’는 ‘오르다’라는 뜻이고, ‘아드’는 앞서 보았듯이 ‘~로’, ‘~향하여’라는 뜻이며, ‘챌로스’는 ‘하늘’을 뜻한다.

성경에서 ‘하늘’, ‘구름’은 다 영광을 상징한다. 이 영광은 하느님의 ‘아우라’ 곧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킨다. 하여간 예수님은 그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다. 당연하다. 나는 이를 원대복귀라고 생각한다. 원래 영광 속에 계시던 분이 내려오셔서, 임무를 완수하시고, 당신이 계셔야 하는 곳으로 다시 가신 것이니 말이다.

다음으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는 라틴어 원문으로 ‘세데트 아드 덱스테람 데이 파트리스 옴니포텐티스’(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다.

‘데이 파트리스 옴니포텐티스’는 차례로 우리말로 옮기면, ‘하느님’(천주), ‘아버지’(성부), ‘전능하신’이고, ‘세데트’는 ‘앉다’라는 뜻이며, ‘덱스테람’은 ‘오른편’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 우선 이 모습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이 순교자 스테파노다. 스테파노는 죽어가면서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사도 7,55 참조). 그분께서 돌에 맞아 순교한 이를 당신 곁으로 받아들이시기 위해 친히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오른편’이라는 표현은 상징적인 언어다.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에 오른편, 왼편이 실제적으로 존재할까? 그곳은 여기와는 전혀 다른 공간개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렇게 상상하는 것일 뿐. 오른편이라는 말은 ‘그분의 오른팔’이라는 뜻이다. 2인자로, 전권을 위임받은 자로, 성부의 권한을 다 받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앉는다’는 말은 권좌, 곧 가르침, 재판, 통치의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는 성부의 전권을 대신 행사하는 권좌에 오르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우리를 위한 이별

그렇다면, 하늘에 오르신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닐까.

오늘날과 같은 우주여행의 시대에 예수님의 승천을 공간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그 하늘은 저 구름 위 하늘 어디쯤이 아니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느님의 초월적인 임재에 동참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지역과 1세기라는 시대를 떠나 모든 장소, 모든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경지’로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떠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머나먼 타역을 떠나 아득한 과거를 떠나 우리가 사는 세상 깊은 곳으로 찾아와 우리와 더욱 하나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그대로 남아 계셨더라면 육안이 영안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시선이 신앙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승천하지 않고 지상에서 대관식을 가지셨더라면, 사람들은 주님을 이 지상에 국한해서 생각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천으로 인하여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이 세상 너머로 비약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승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주님은 인간을 위해 강력하게 변호하고 중재하실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실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히브 4,14).

지상에서 대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위대하고 힘 있는 십자가 제사를 드리셨던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하느님 ‘오른편’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대사제의 직분, 곧 중재의 직분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빌면 예수님이 대사제의 역할을 해 주신다는 믿음의 발로다. 절망스러울 때,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 이 예수님을 붙잡고 그분의 강력한 중재를 청해 보자.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