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신나고 힘나는 신앙 36 - 그날의 심판

김레지나 2014. 8. 7. 21:05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36) 그날의 심판

하느님을 잡아라 그러면 다 된다
발행일 : 2013-09-15 [제2862호, 13면]

■ 민감한 사안

「팡세」라는 책으로 한국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파스칼(1623~1662)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신념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답답한 심정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어차피 확률이 1대 1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확률은 똑같다. 자 그렇다면 도박을 해 보자. 서로 반대 경우가 사실이라면 결국 손해는 누가 보게 되는 것인가?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함부로’, ‘엉망으로’ 살았는데 죽어서 보니 하느님도 있고 천국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인가, 아니면 천국이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하느님도 천국도 없는 경우의 사람인가? 결국 누가 낭패를 맞이하게 되겠는가?”

과연 죽으면 인간의 생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인류가 알고 있는 답은 여러 가지다.

1) 어떤 이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미련 없이 끝이라는 것이다. 소멸된다는 것이다.

2) 또 어떤 이들은 “죽으면 윤회한다”고 믿는다. 사람에서 돼지로, 돼지에서 개로, 개에서 선업을 잘 쌓으면 다시 사람으로 돌고 돌다가 수억 겁을 지나서 윤회의 틀을 벗어나 열반(涅槃)에 이른다는 것이다.

3) 또 어떤 이들은 “죽으면 영적인 세계(이데아 세계)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죽으면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떠나서 영혼의 본래 고향인 이데아의 세계로 귀향한다는 것이다.

4)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죽으면 하느님 품으로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서 살아온 행실(믿음)에 맞갖은 천국·연옥·지옥이라는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것이다.

어느 답이 맞는 답일까? 대체로 2)~4)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보다 진지하고 보람되게 살려고 하는 반면 첫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실컷 즐기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야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십시다’”(1코린 15,32).

종말(終末)의 문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민감한 사안임에 틀림이 없다. ‘종말’은 마지막 일들, 곧 죽음, 심판, 천국, 지옥 등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교회에서 이 종말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한다. 즉 죽음, 부활, 연옥, 영원한 생명과 같은 개인(個人)의 운명과 관련지어 ‘종말’을 일컫기도 하고, 주님의 날, 세상의 종말, 심판,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역사(歷史)의 운명과 연관해서 ‘종말’을 얘기하기도 한다.

■ 종말에 대한 성경적 진술

종말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한마디로 섬뜩하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 ‘상징’과 ‘비유’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성경에 나오는 천국의 이미지인 하프나 면류관, 금 등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하프’는 기쁨과 평안을 강렬하게 암시하는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고, ‘면류관’은 하느님과 영원히 일치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광채와 힘, 기쁨을 함께 누린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또 ‘금’은 시간에 매이지 않는 천국의 영원함과 귀중함을 암시한다. 또한 지옥의 ‘유황불’이나 ‘구더기’ 등은 이승에서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상징이다. 3차원 공간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4차원 이상인 저 세상을 짐작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분명한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상징 언어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 역사의 종말이든 종말의 때는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둘째, 미리 징조(=전조)가 있다는 사실이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마태 24,7-8).

기상 이변, 전쟁, 거짓 예언자들의 득세뿐만 아니라 인간 지식의 발달로 인한 생명 파괴, 인간의 타락 등으로 인한 자연적·사회적 혼란의 징조를 보고 종말을 예감할 수 있다. 신앙인들은 이런 징조를 보고 대비하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

셋째, 의인, 악인으로 갈려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때에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해서 이 이상의 것을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성경이 명백히 전해 주는 이외의 것을 구체적으로 날짜와 방법까지 알려고 하는 이도, 또 안다고 가르치는 이도 모두 ‘유혹하는 자’의 미끼에 넘어갈 위험이 크다.

■ 그리스도 왕

전례력으로 우리는 대림절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낸다. 역사의 마지막 곧 종말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날의 독서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예언자 다니엘이 본 환시다. 이 모든 걸 다 가지고 계신 분, 이분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두려울 것이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제아무리 높다 하는 권력자,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 한 나라의 대통령 등, 그 권한이 전부 다 이분 아래에 있다. 그러기에 직장 상사하고 친해지려 하지 말고, 이분하고만 친하면 된다. 하느님을 잡아라. 그러면 다 된다.

■ 이미 심판받았다

주님의 재림과 마찬가지로 심판은 먼 장래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지금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이 주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그런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7-18).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4-25).

이는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 풍요를, 그 용서를, 그 자비를, 그 지혜를 누리지만, 그래서 이 세상마저도 신나게 살아가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안 믿는 사람은 그냥 그대로, 옛날 그대로 산다. 옛날 그대로 사는 자체가 뭔가? 하느님의 부재다. 이 하느님의 부재를 사는 자체가 심판이다. 이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하니 그 자체가 심판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미 우리는 심판을 받았다. 누리는 것도 심판이며, 누리지 못하는 것도 심판이다.

나는 이를 우리의 현실 속에서 본다. 가끔 방송이나 인터넷을 보면, 뭐가 그렇게 원망이 많고 원한이 많은지 분노를 화두로 삼아 메시지를 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다. 사회 정의를 외치면서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정의가 진짜 정의일까? 그 욕설을 통해서 또 다른 불의가 자행되지 않는가.

하느님의 용서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평화를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그것을 누리고 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아직도 지옥을 살고 있다. 이것이 이미 심판받은 우리의 현실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