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악을 계획하시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교회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위로와 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담임 목사의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목사는 “하나님이 공연히 세월호를 침몰시킨 게 아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꽃다운 학생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경고하시려고 아이들을 데려가신 것이니, 유가족은 빨리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했다.
KBS 뉴스에서 총리 후보 지명자의 과거 발언이 소개되었다. 후보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조선시대부터 게을렀기 때문”이라며 “이를 고치기 위해 하나님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남북 분단도 하나님의 뜻”이라며 “그 당시 우리 체질을 봤을 때 한국에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뒤틀린 인식은 아니지만, 일부 신앙인들도 부지불식간에 비슷한 맥락의 생각에 빠지게 될 때가 있다. 한 교우가 “이번 사고를 통해 하느님께서 뭔가 계획하시는 게 있겠지요.”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엄청난 슬픔을 이겨낼 명분을 찾아내려다 든 생각일 것이다. 어제는 세월호 참사의 충격과 개인적인 실패감을 이기지 못한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푸념을 늘어놓다가 말했다. “어쨌든 하느님은 재수 없어. 하느님이 더 큰 선을 위해 악을 허락하신다고? 전능하시다면 왜 악을 못 막으셔? 신비 운운하는 건 신학자들의 말장난일 뿐이야. 하느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하느님도 인간처럼 악한 면을 갖고 있다는 말 아니야?”
세월호 참사와 같은 거대한 악과 그로 인한 처참한 고통을 마주할 때면,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의로우심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우리의 지력으로는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이 불가능하기에, 바오로 사도께서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다.(1코린 12,3)”고 하셨나보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믿는 이들의 믿음’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비유와 기적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설명하셨지만,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느님을 배반할 자유까지 가진 사람들은 그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기에,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방법이 될 수 있었으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위로와 희망을 얻는다.
누구도 세월호에서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죽은 이들에게 사고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하느님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고,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이유로 ‘하느님의 선하심’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기에 우리에게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강제할 수 없으시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어느 것 때문도 아닌, 오직 사랑 때문에만 무능하시다. 하느님께서 악한 면이 있으시거나, 악을 통해 더 큰 선을 이끌어내시려는 계획으로 악을 섭리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악을 계획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하느님의 계획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 탓임이 분명한데도, 성경에 나오는 악을 하느님의 계획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유다가 참 안 됐어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사탄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임무를 누군가에는 맡겨야 하는데, 딱 유다가 찍혔으니, 얼마나 불쌍한 팔자에요?”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고 해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는 유다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결과보다 더 많은 다른 가능성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미리’ 아시는 것 외에도, 수없이 많은 다른 ‘경우의 수’를 알고 계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전지(全知)’이다. 그래서 유다의 배반은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의 하나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유다의 배반이 반드시 필요했던,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다는 배반자가 될 의무가 없었다. 그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 자신의 책임이다. (……) 어떻든 유다는 배반을 했고 자살을 했다. 그가 중간에 마음을 돌리고 배반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 사업을 진행하셨을 것이고, 그것이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 되었을 수도 있다. (송영진 신부님 말씀)”
유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고 믿고서 배반한 것이 아니기에, 그의 배반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월호 사고를 일으킨 주범들이 전화위복의 결과를 바라거나 예상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잘못은 어떤 이유로든 합리화될 수 없다.
우리가 겪는 불행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하느님께서 대한민국을 구하시려고 일부러 나지 않아도 되는 사고를 나게 하신 것이 아니듯,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선을 이끌어내시려고 겪지 않아도 되는 불행을 겪게 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니 하느님을 ‘재수 없는 분’이라고 욕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희생자와 유족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아파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하느님의 고통에도 공감하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교황님께서 세월호 참사를 윤리적,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교황님의 말씀이 김 목사처럼 ‘참사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여기저기 비판의 눈길을 거두고 잊어야 할 때’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은 우리가 그 사고를 통해서 윤리적, 영적으로 새로 태어났을 때, 그 결과를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다. 참사의 원인을 두고 ‘하느님의 섭리’라고 해서는 안 된다. 아직 제대로 된 책임소재도 가려내지 못했고, 사고가 있게 한 잘못들도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느님의 섭리를 만드는 주역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다. 죽어간 이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개인과 사회를, 정치와 경제를 바로 서게 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섭리’를 이루는 길이다. 우리가 그런 책임감으로 노력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섭리’를 말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제야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필요 때문에 만든 망상’이 아니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임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선하신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한 우리의 노력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악하거나 무책임한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설득할 수 있는 표징이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악행을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살피신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시편 14:1-2)”
“선과 사랑이 넘치는 예수 성심이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2014년 6월 12일 김레지나 씀
(마더 에우제니아 수녀님께서 계시로 받아 적은 ‘성부 하느님’의 말씀을 옮겨 적는다.
“구약의 성조들이나 예언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알고 사랑하게 할 수 없었음을 보면서 내가 몸소 사람들에게 오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올 수 있었겠느냐? 내 신성의 제 2위격이, 곧 나 자신이 올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었느냐? 내 말에 귀를 기울였느냐? 그 이후 일어날 일들을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 그 질문에 스스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들은 내 옆에 있으면서도 내 현존을 모를 것이다. 내 아들이 그들을 위해 하게 될 모든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내 아들을 통하여 나를 잔인하게 학대할 것이다. 내 아들을 통하여 내게 욕설을 퍼붓고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랑하기를 그만 두었겠느냐? 아니다. 사람들, 곧 내 자녀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만 두기에는 너무나 크다!
그렇다. 나는 거기에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잘 알아들어라. 나는 이를 테면 내 사랑하는 아들보다 너희를 더 사랑하였고, 아니, 차라리 나 자신보다도 너희를 더 사랑하였다.
내가 지금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정녕 사실이다. 만일 내 피조물 가운데 한 사람이 내 아들의 삶과 죽음과 유사한 것으로 다른 이들의 죄를 충분히 보속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도록 선뜻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고? 그것은 내 아들 안에서 나 자신이 고난을 받는 대신에 사랑하는 내 피조물로 하여금 그것을 겪게 했다면, 내가 내 사랑을 배반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녀들이 고통 받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 대부분 사람들은 이 모든 사건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인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즉 사랑이 그 모든 일을 이끌어 왔다는 점이다.“ (마더 아우제니아 수녀님의 책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삶> 가톨릭 출판사,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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