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삶을 살려면
예수님은 자살하셨을까?
“예수님은 자살하신 거야.” A 님이 새로운 발견에 놀랐다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예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는 하지만, ‘자살’이라는 표현은 이상한걸.’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성경을 잘 아시는 분의 말씀인 데다 제가 품었던 의문과 일맥상통하기에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저는 ‘왜 예수님은 공생활을 3년밖에 하지 않으셨을까? 당신의 권능으로 사람들 마음을 변화시켜서 세상에 더 오래 계셨더라면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문득 예수님은 자살하시려고 예루살렘에 가신 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스쳤습니다. 애초에 정해진 하느님의 계획이 ‘3년’이었던 게 아니라, 세상의 악이 ‘절대 선’이시고 ‘절대 겸손’이신 예수님을 고작 3년밖에 참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짧은 공생활을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잉그리드 로요케네트, 범죄현장에 뛰어들다.
마침 제 묵상을 설명해주는 ‘예’로 생각되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테러 기사입니다. (이하 여러 기사를 편집한 것임)
“2013년 6월 22일, 런던 도심 한복판에서 무장괴한 두 명이 군인 한 명을 무참히 죽인 뒤 참수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아들의 생일잔치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현장을 지나던 '잉그리드 로요케네트' 씨는 길에 쓰러진 피투성이 남자를 보고 차에서 뛰어내려 쓰러진 사람의 맥부터 짚었다. 그녀는 “우리는 런던과 전쟁을 원한다.”고 소리치는 괴한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그녀는 “너는 혼자 많은 사람과 맞서고 있어 패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느냐? …… 무기를 넘겨라.”라고 말하며 괴한들을 달래고 설득하면서 경찰이 올 때까지 십여 분 동안 시간을 벌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찍은 당시의 사진은 각종 SNS를 통해 전파되어,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제2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용기를 낸 그녀에게 모두 박수를 보낸 것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가 이미 숨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 한 남성이 다가왔고, 그제야 무기를 든 남성 두 명이 옆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검은 점퍼를 입은 사내의 한 손엔 권총이, 다른 손엔 식칼과 도끼가 들려 있었어요. … 인근 초등학교 하교 시간이라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아이들보다는 내가 다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문을 보면서 그런 사람들(테러리스트)은 언제나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죠. 조용하게 '무엇 때문이냐', '억울한 건 내가 다 들어 주겠다'며 대화를 유도했어요. ……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지만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듯 보였어요. 관심을 끌고 싶어 했고, 다른 희생자를 찾는 듯 보였어요. 그들이 다른 데 눈길을 돌리지 못하도록 계속 말을 걸었죠. …… 살인범이 저희 아이들 또래였거든요. …… 평생 그리스도교인으로 살아왔어요. 우리는 서로를 도울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그들과 이야기함으로써 또 다른 범행을 막았다면 기쁜 일이에요.”
대부분의 누리꾼은 ‘모성의 위대함’에 찬사를 보냈지만, 저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에 더 깊은 감동을 했습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도우려고 굳이 버스에서 내린 것을 보면, 그녀는 평소에도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처럼 신앙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녀의 행동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오신 것 같았고, 아이들의 희생을 막아보려고 목숨을 거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과의 대화를 선택하신 것이다.
잉그리드 로요케네트의 행위는 구조행위이지 자살행위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맞닥뜨리게 된 절박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신성이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셨다고 해서 자살하시려고 예루살렘에 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하굣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범인들과 대화했듯이,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신 것입니다.
그녀가 쓰러진 사람을 외면하고 버스를 타고 지나쳤거나 범인을 발견하고 도망갔어도 마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선택이 더욱 훌륭하듯이, 예수님도 당신의 신성으로 피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셨기에 그 희생이 더욱 값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를 만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세상의 손에는 이미 피 묻은 칼이 들려있었고, 예수님은 마침내 희생의 때를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연민 가득한 하느님께서는 고집불통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드님의 희생을 뜻하셨겠지만, 구체적으로 3년만 공생활을 하도록 정하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상이 덜 악해서 예수님을 더 오래 참아주었더라면, 예수님의 고통은 백만분의 일쯤은 덜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악과 교만에 물든 세상은 ‘절대 사랑’이시고, ‘절대 겸손’이신 예수님을 오래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짧은 3년’은 구속사업의 충분한 시간이라기보다 세상에 만연한 악의 깊이와 구원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써 악에 맞서시고, 겸손으로써 교만에 맞서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이라는 가장 힘 있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상과 대화하신 것입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이고 지혜입니다.(1코린 1:18~28 참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걸음걸음은 세상 편에서 보면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겠지만, 하느님 편에서 보면 부활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구원과 부활은 돌아가신 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려면
잉그리드 로요케네트씨는 제게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부활의 삶’을 언젠가 부활하리라는 희망 속에서 고통을 이겨내고 평화 속에 머무는 것이라고만 이해했었는데, 이제는 더 나아가 ‘십자가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살아야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부활은 내세의 시작이고 현세의 희망일 뿐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이웃들을 위할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할 것인가?’ 선택해야하는 상황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세상일과 자신의 고통에 파묻혀,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는커녕 아주 작은 일에서 이웃을 배려하는 것도 버거워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필요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하고, 심지어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도 잊고 살기 일쑤입니다.
이제 우리의 무딘 마음을 깨워,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며, 작은 일에서부터 이웃을 위하는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고통에 매몰되어 잊고 있던 행복들을 찾아 하느님께 감사 한 번 더 드리고, 가족과 이웃에게 미소 한 번 더 보여주고,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화살기도 한 번 더 해주고, 미운 사람이 주는 작은 손해 한 번 더 참고. ……,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부활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우리도 로요케네트처럼, 예수님처럼, 큰일에서도 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아빠 하느님, 부족한 저희이지만 로요케네트씨처럼 예수님을 닮은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매 순간 부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과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아멘.” (2013년 6월 5일 엉터리 레지나 씀)
(이상은 엉터리 레지나 묵상일 뿐, 신학적으로 틀린 견해일 수 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엉뚱한? 묵상 주제라서 저도 살짝 걱정됩니다. 아무튼, 저는 이 묵상으로 예수님 공생활 전 30년에 대한 의혹도 말끔히 털어버렸습니다. 공생활 3년에 비해 열 배나 긴 시간이라, 그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셨을 것이라는 둥, 각종 설들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유행합니다만,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30년 동안 성가정 안에서 사랑하고 배우고 노동하며 행복하셨을 것이고, 이웃과 춤도 추시고 즐겁게 지내셨을 것이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미소와 말씀으로 위로하셨을 것이고, 무엇보다 기도로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쁨을 누리셨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할 때’가 되도록 늦게 무르익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자살하셨을까?’라는 말은 몇 년 전에 신학 전공하신 분께서 저한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아마 그분께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을 그렇게 이해하고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잉그리드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살을 향해 가는 길과 부활을 향해 가는 길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고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는 목적’이 분명해야한다는 것이지요. 잉그리드는 쓰러진 사람을 응급조치하러 버스에서 내린 것이지 죽으려고 무모하게 덤빈 건 아니었거든요. 예수님의 죽음을 구실로 자신의 자살유혹을 변명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도문에도 ‘분별하는 지혜를 주세요.’라고 썼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자살하신 게 아니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시겠지만, 의외로 예수님이 ‘왜 피하지 않으셨을까?’하는 의문을 가진 신자들도 많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이 무력하게 3년밖에 안 되었는데 잡히신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신성은 없는 것이고,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 삶의 의미를 재조명하려고 부활이라는 개념을 지어냈을 뿐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부 하느님, 절대자는 믿겠는데 예수님은 못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냥 ‘수행자’나 ‘예언자’에 불과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살하신 게 아니다.’라는 묵상으로 이런 걸림돌도 살짝 치워보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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