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레지나의 묵상글

'섬김'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김레지나 2014. 8. 25. 18:34

‘섬김’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루카복음 4:38-41 묵상)

 

  한국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과 행동이 온 국민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일깨우고 있다. ‘최고의 권위는 섬김’이라고 말해오신 교황님은 소형차를 타고 다니시며 환경미화원, 시설관리원, 장애인, 어린아이 등을 만나셨고, 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고 하시며 광화문에서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의 손을 잡아주시고, 실종자 가족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남기시고, 유가족들이 팽목항에서부터 지고 온 십자가를 로마로 가지고 떠나셨다.

  교황님은 성당에 다니라거나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낮은 자를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교황님의 ‘섬김의 리더십’에 비신자들도 감동하여 위로받고, 힘을 얻고, 잃어버린 가치를 찾게 되었다. 교황님의 ‘섬김’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선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신앙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교황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최근에 한 신부님 부탁으로 루카 복음 4장 38절부터 41절까지 묵상해보게 되었는데, ‘낮은 자’와 ‘앓는 이’들을 ‘기도로써’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일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고, 그러한 ‘섬김’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게 된다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 26~28)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루카 4.38~39)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예수님께서는 ‘열’이 마치 사람이기라도 한 양 꾸짖으셨다. ‘열’이 단순히 감염에 의한 면역 반응이었다면 열을 꾸짖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장모의 열은 아마도 꾸짖어 마땅한, 부정적인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꾸짖어 마땅한 열’이 무엇일지 여러 가지로 상상해볼 일이다. 베드로의 장모는 어쩌면 사위가 가정을 충분히 돌보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도대체 예수님이 나와 우리 가족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하고 말이다. 혹은 ‘사위가 그렇게 능력 있는 예수님의 제자인데, 왜 나는 이렇게 아프도록 돌보지 않는 것일까, 다 헛일이구나.’하는 불만으로 열이 더 심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드디어 예수님께서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신’ 것이다. 장모 ‘한 사람만’의 육체적 정신적 사정을 가까이 들여다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의 마음 상태로 인해 열이 심해졌음을 알아보시고, 그 열을 꾸짖으신 것이다.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

 

  시몬의 장모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사위가 추종하는 스승님’,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하시는 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능력자’가 아니다.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분, ‘나’를 낫게 하시는 분, ‘나’의 은인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심’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굳은 마음이 녹고, 예수님의 자비에 한창 겪고 있는 고통도 위로받는다. 예수님을 그렇게 진짜로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게 되고, ‘즉시 일어나’ 예수님께 ‘시중을 들게’ 된다.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수고를 마다치 않고 즐겨 시중을 든다. 그의 바람을 잘 살펴서 어떻게든 그 바람이 실현되도록 돕고 싶어 한다. 사랑으로 시중을 드는 일은 다름 아닌 ‘섬기는 일’이다.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서 ‘즉시 일어나’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을 섬기게 된 것이다.

  시몬의 장모가 무슨 일을 함으로써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43절 말씀에 나오듯, 예수님의 최고의 바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모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오늘의 우리도 시몬의 장모처럼 예수님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섬기는 분이 악하거나 부족한 면이 먼지만큼도 없는, 선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이시니, 나는 최고의 축복을 누리고 사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진정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시니, 예수님께 시중을 드는 일이야말로 ‘내 인생’에 최고로 ‘유익하고’, ‘내 영원한 삶’에서 최고로 ‘가치 있는’ 일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루카 4.40~41)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떠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있는 대로 모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벌써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자들이 예수님을 아는지,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간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은총을 받을 자격을 먼저 요구하지 않으신다. 예수님 사랑의 대상이 바로 ‘있는 대로 모두’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우리 마음속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은총을 구할 자격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가족이나 친지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아픈 사람들 모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사람들의 오지랖도 감동적이다. 요즘 같은 ‘공감 능력 부재의 시대’에 성경 속 사람들의 ‘이웃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게 여겨진다. 예수님께 아픈 이들을 데리고 간 사람들의 마음은 ‘아프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모두 당신께 오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다. 그래서 설령 그들이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채, 예수님의 치유능력만을 믿고 앓는 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다 하더라도, 그들의 오지랖은 복되다.

  

“한 사람 한 사람”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을 눈에 띄는 대로 모두 데리고 갔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모아놓고 한꺼번에 치유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셨다.

  우리가 온 인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을 기울여 개별적인 치유를 선물하신다. 예수님에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아프고 불쌍한 사람들 무리 중 한 명’이 아니다. 특별히 아픈 아무개, 특별히 불쌍한 죄인 아무개, 특별히 위로해주고 싶은 아무개이다.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한 영혼을 다른 존재들을 다 합친 것만큼 사랑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일대 일의 관계에서 완벽하고 전폭적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한 사람의 전체에 걸쳐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한 사랑을 베푸신다. 예수님의 시선은 인류 공동체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춰져 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일대 일로, 맞춤형으로, 높높이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결국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 ‘한 사람씩 모두’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교황님 특집 다큐에 나온 한 마약 중독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발씻김 예식을 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약중독자들을 위한 봉사자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도 그렇게 씻어주시며 우리 마음속에 사랑의 기적이 싹트기를 바라신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에 묻혀서 예수님을 먼발치로만 바라보는 ‘미지근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 한 사람’을 낫게 해주시고, ‘나 한 사람’의 시중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찾고 만나려 애써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낫게 해주신 것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일까. 정말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도 한 사람씩 만져주실까. 그렇다. 반드시 그렇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마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사람씩’ 어루만져 주신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영원 속에서 부족함이 없도록 치유를 베풀어주시는데, 우리는 우리식대로의 바람을 고집하기에 치유받고 살고 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곤 한다.

  나는 병원에서 악령 들린 딸에 쫓겨 피신해 있는 60대 환우를 만난 적이 있다. 부유하고 저명한 집안 분이셨는데, 딸이 수년째 밤만 되면 괴물처럼 힘이 세져서 물어뜯고 덤비는 바람에 온몸이 멍투성이였고 눈빛은 지칠 대로 지쳐서 퀭하였다. 딸이 하도 소란을 피워서 경찰이 여러 번 출동하였는데, 딸을 차마 정신병원에 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존심이 강하셔서 집안 속사정을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지내셨다는데, 어찌어찌해서 내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으셨다. 그분은 열심한 불교 신자이셨는데, 여러 정황상 딸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 악령 들린 게 분명하다고 하셨다. 나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여러 가지 말로 위로해드렸다. 병원 기도 모임에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은 채 딸의 이름만 알려 함께 기도했고, 급한 마음에 딸을 위한 미사도 봉헌했다. 일주일쯤 지나 어머님이 용기를 내서 딸이 있는 집으로 하룻밤 외박을 나가셨는데, 그날 딸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어버렸다. 딸의 상을 치르고 병원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기도해주셨는데 죽었네요. 불쌍한 것.’하고 섭섭해하시면서도 당신이 집에 있을 때 딸이 떠나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기도해주어서 고맙다고 하시며, 딸을 위해 49재를 지내고 난 후 성당에도 꼭 ‘시주’하겠다고 하셨다.

  그런 경우에 어떤 사람들은 악령 들린 딸을 위한 기도가 헛된 일이었을 거라는 의문을 갖는다. 분명 아니다. 딸은 더 이상 악령에 시달리지 않고 영원 속에서 편히 쉬게 되는 치유를 얻을 것이다. 아마도 영혼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딸에게 내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얻는 데 보탬이 되었을 거로 생각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인 기준만을 고집스레 바란다면 예수님의 치유 손길을 알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 데리고 간 사람들이 비록 더 나쁜 일을 겪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분명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한 사람씩 어루만져 낫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치유는 궁극적으로는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다. 지금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헤아릴 수도 없는 영원 속에서 넘치도록 이루어진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아파도 이미 나은 것이고, 앞으로 더 아프게 되더라도 이미 나은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씩’ 고쳐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마을에 오시니, 마귀들은 많은 사람에게서 떠나갔다. 마귀들은 예수님 가까이에서는, 특히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람들 안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들 안에서는 살 수 없어 ‘떠나간’ 것을 보면, 마귀들은 예수님의 흔적조차 잠시도 견딜 수 없어 떠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마귀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했다.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만약 치유 받은 사람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는 고백을 했다면, 예수님은 그를 꾸짖는 대신 기특하게 여기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꾸짖으셨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섬기지 않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주시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회개하여 예수님을 섬기게 될 추호의 여지도 없다. 마귀들은 입술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고백할 줄 알지만, 행실로는 예수님의 그림자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펼치는 것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시몬의 장모처럼 예수님의 시중을 들게 되어 있다. 하지만 마귀들은 예수님을 섬길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을 꾸짖으셨듯이 마귀들을 꾸짖으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섬길 줄 모른다면 마귀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뜻을 살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한몫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주님, 주님’ 하고 고백한다 한들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시중을 드는 일’은 말이 아니라 ‘행위’이다.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과 반대되는 행위를 한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불러대는 우리에게도 “그 입 다물라.”하고 꾸짖으실 것이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 (루카 4:42-44)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님을 찾아다니고 떠나지 말아 주십사 청한 이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예수님께 머물러 주십사 청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떠나셨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의 참빛이심을 알리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을 가까이 만나면, 나를 둘러싼 어둠이 아무리 짙더라도 그 빛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내 안의 어둠이 쫓겨 가고 나 자신이 빛이 되어 예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 빛’을 만나서 그 빛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은 세상을 밝히기 위해 예수님처럼 ‘떠나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되셨듯이,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빛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아시게 하느님을 섬기는 일

 

  나는 8년쯤 전에 병원에서 한 자매님과 같은 병실을 쓰게 되었다. 마흔아홉이셨는데, 치료 불가 판정을 받고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원하기 전에 대세를 받으셨다고 하는데,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아이고, 하느님, 제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십니까.”라고 하셨다.

어느 날, 나는 그분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읽어드렸다. 자매님은 너무 말라서 눈물도 나지 않는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셨다. 다음날 자매님이 말씀하셨다. “저번에 용서의 기도 읽어 주실 때요. 제가 반성을 많이 했어요. 그동안 하느님 원망했는데, 아, 내가 잘못했구나. 주위 사람들도 다 미워했는데. 내가 그동안 잘못했구나. 어찌나 반성이 되던지.” 나는 뜻밖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성당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분이 극심한 고통 중에서 진심으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니. 나는 마지막 순간에 그분처럼 평화를 얻을 자신이 없었기에 그분이 정말로 부러웠다.

  자매님은 나와 성당 봉사자들의 방문 기도를 받고 크게 달라지셨다. 친지들이 겁나고 마음 아파서 병문안 오기도 힘들었다는데,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는 가족들과 계모임 하듯이 웃고 노래 부르며 마지막 인사를 하셨고, 장례식을 어떻게 해달라 주문도 하시고, 당신 영정사진도 보자고 하셨다. 자매님은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 후 자매님의 놀라운 변화를 지켜본 가족들이 성당에 나가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해왔다. 자매님이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낸 화해와 평화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었고, 자매님을 통해 가족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게’ 이루어내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보다 잘 전하는 일일 것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했기에, 영원 속에서 더욱 밝은 빛을 내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기도로써’ ‘있는 대로 모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자.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치유해주셨고, 마귀들이 도망갔고, 그리스도 빛이 그들에게도 옮겨졌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있는 대로 모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자. 기도로써 내 안의 ‘앓는 부분’을 먼저 예수님께 보여드리고, 기도로써 ‘있는 대로 모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자. 우리는 복음에서처럼 특히 ‘앓는 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야 한다. 주님의 권능과 자비는 약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 더욱 밝게 드러나 세상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씩 어루만져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으로 행하는 티끌만한 기도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풍성히 값하여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이루어주실 수 있는 분(에페 3, 20)”이시니.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2014년 8월 25일 엉터리 레지나 씀)

 

 

(이 부족한 묵상글을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기도로 봉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