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
문학의 소임 하나는 작품의 인물과 사건을 독자가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동일시 혹은 거리두기를 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의 체험을 통해 우리의 사유와 마음은 깊고 넓어진다. 문학은 간접체험과 자기성찰의 의미를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실험해왔다. 문학예술에서의 전위는 이런 실험의 급진성을 일컫는 것이다. 전위주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발본적 성찰을 토대로 하되, 그 출발은 언제나 ‘나’부터다. 문학에서 성찰과 비판의 일차적 대상은 남들이나 세상이 아니라 ‘나’이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에는 어느 시인과 나누는 흥미로운 대화가 있다. 일상의 자잘한 즐거움을 털어놓는 제자이자 시인의 말을 듣고 김현은 이렇게 적는다. “그는 갈수록 깔끔해지고, 선생다워진다. 나는 그런 그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남들이 다 병들어 있으면, 아프지 않더라도, 아프지 않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여하튼 아픈 것보다는 아프지 않은 것이 더 낫다.” 당연히 아픈 것보다는 아프지 않은 게 좋고, 그래서 행복해할 수 있지만, 동시에 “남들이 다 병들어 있으면” ‘나’의 행복을 주저 없이 드러내는 것도 때로 삼가야 한다는 배려심의 가치를 이 대화는 담담히 전한다. 그런 가치가 사라진 시대, 마음이 궁핍해진 시대이다. 그래서 자기 집이 얼마나 멋지고 살기 좋은지를 자의식 없이 자랑하는 프로그램도 버젓이 방송된다.
뛰어난 문학은 곧 성찰과 배려의 문학이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가르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브레히트, < 살아남은 자의 슬픔>) 우리 시대의 “강한 자”들은 살아남은 “자신을 미워”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후안무치하게 과시한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간 이들을 근거 없이 비웃고 막말을 퍼붓는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짐승이 되어간다. 자기성찰이 사라진 뻔뻔함의 시대이다.
문득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고 수줍게 토로했던 시인의 시대가 그리워진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한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백석, <북방에서>)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