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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재구성 -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

김레지나 2012. 9. 4. 14:54

무죄의 재구성 - 노숙소녀 살인사건] ① 자백
지적 장애 나씨, 감방생활이 두려워 송씨를 지목하다
수원역 노숙하던 소녀 죽자
자백에 의존해 노숙인 기소

 

2007년 5월14일 새벽, 경기도 수원시 매교동 수원고등학교 본관 건물 앞에서 신원미상의 15살 소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나중에 가출 청소년으로 밝혀졌지만, 낡은 옷차림 때문에 ‘노숙 소녀’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날 저녁 경찰은 수원역 대합실에서 지내던 20대 노숙인 2명을 ‘노숙 소녀’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체포했다. 다음해인 2008년 1월, 검찰은 ‘공범’이라며 10대 노숙 청소년 5명을 추가로 잡아들였다.

 

형사 미성년자였던 노숙 청소년 1명을 제외한 6명이 기소됐으나, 5년이 지난 지금 이들 모두 무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10대 청소년 4명은 2010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처음 체포된 20대 노숙인 가운데 1명은 벌금 200만원 형만 받고 풀려났다. 주범으로 5년 징역형을 확정받았던 또다른 노숙인은 지난 2일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는데, 최근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다”는 취지로 재심을 결정했다.

 

이들 모두 자기변호 능력이 없는 가출 청소년, 노숙인, 심신미약자였다. 경찰과 검찰은 이들의 자백에만 의존해 무리하게 수사하여 기소했다. 지난 6월부터 두달 동안, 1000여쪽의 수사·재판 기록을 검토하고 10여명의 사건 관계자를 인터뷰했다. 이를 토대로 재구성한 5년여의 수사·재판 과정은 한국 형사사법제도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당신들이 때리는 것 애들이 봤대”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네가 죽였잖아! 이 새끼야”
“송씨가 끝까지 있었어요”
나씨 자백뒤 송씨도 자백했다

 

지난 8월2일 밤 12시, 송인철(가명·34)씨는 경기도 어느 교도소 문을 나섰다. 시커먼 어둠 속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노숙인 보호시설 직원과 국선변호사 박준영(38)씨였다. 두 사람은 하얀 두부를 건넸다. 송씨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들보다 판단이 더딘 송씨는 지난 5년여 동안 벌어진 일을 세세히 이해하지 못한다. 교도소에서 5년을 보낸 송씨의 거처는 이날 밤부터 수원에 있는 노숙인 보호시설로 바뀌었다.

 

5년여 전, 송씨의 거처는 수원역이었다. 2007년 5월14일 저녁, 형사들이 그를 경찰서에 끌고 갔다. “거짓말하지 마. 너 사람 때려서 죽였잖아.” 형사가 손등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치며 그렇게 다그쳤다고 송씨는 나중에 법원에 낸 탄원서에 썼다.

 

사람을 죽인 일이 있는지 송씨는 아무래도 기억에 없었다. “아니에요. 저 안 죽였어요.” 형사가 서류철로 책상을 내리칠 때마다 당시 29살이었던 송씨는 가슴이 졸아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에서 친구 나주용(가명·당시 29살)씨가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조사받고 있었다.

 

이날 저녁, 나씨는 여느 때처럼 수원역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형사가 나씨를 찾았다. “가자, 가보면 안다.” 차에 올라탄 뒤 형사가 캐물었던 내용을 나씨는 나중에 법정에서 증언했다. “나주용이 너, 사람 때리고 죽였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본 적은 있다. 사람을 때린 적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죽였다니. 나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얘들이 너랑 송인철이 여자애 때리는 걸 봤다고 했어. 거짓말 마라.” 형사는 수원역에서 어울려 다니는 노숙인들의 사진 몇 장을 꺼내 보여줬다. 나씨는 남들보다 지능이 떨어졌다. 나씨는 형사들의 추궁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씨가 친구 송씨와 함께 누구를 때린 것은 사실이었다. 둘은 이틀 전 다른 일행과 함께 수원역 대합실에서 노숙하는 어느 20대 여성을 주차장으로 데려가 손 가는 대로 쥐어박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죽었단 말인가?

 

죽은 피해자라며 형사가 내민 사진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사진 속 앳된 소녀는 송씨 등이 때렸던 20대 여자와는 달랐다.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송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형사가 서류철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고 송씨는 나중에 법정에서 증언했다. “네가 죽였잖아! 이 새끼, 거짓말쟁이네.”

 

나씨는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었다. 간신히 초등학교를 나왔지만 끝내 한글은 깨치지 못했다. 고물을 주워 생활하던 나씨는 2004년 절도죄로 2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감방생활을 할까 두려웠다. 결국 나씨는 경찰이 원하는 진술을 내놓았다. “(송)인철이랑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여자애를 학교로 끌고 가서 때렸어요. 나는 먼저 나왔고 인철이가 끝까지 있었어요.”

 

이 진술은 이후 5년여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을 결정해버렸다. 나씨의 자백이 있은 뒤, 송씨도 범행을 자백했다. 나중에 송씨는 “주용이가 진술해서 나도 진술했다”고 변호사에게 말했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나씨가 “(송)인철이가 죽인 것 같다”고 말한 뒤부터 빠져나갈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알리바이를 대려 해도 전날 밤 수원역에서 함께 술 마신 노숙인들의 이름조차 송씨는 기억해낼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체포 5시간 만에 범행 일체를 자백한 셈이 됐다. 송씨와 나씨의 기억, 국선변호사의 증언, 그리고 법정·수사기록 등을 종합하면, 나씨와 송씨는 범행을 자백했다 번복하고 다시 자백하길 거듭했다. 그러나 그날 밤, 경찰은 두 사람의 ‘마지막 진술’만 신뢰했다. 나씨가 송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송씨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소녀를 ‘무차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해 12월 서울고등법원은 주범으로 지목된 송인철에게 상해치사 혐의로 징역 5년형, 공범 나주용에게 벌금 200만원 형을 각각 선고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② ‘회유’에서는 궁지에 몰려 거짓으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②회유
도움 줄 가족도 없는 ‘외톨이신세’
거리생활에 작은 압력에도 순응
경찰은 나씨 휴대전화 꺼버리고
알리바이 확인 요청도 묵살했다날품을 팔아도, 앵벌이를 나가도 동갑내기 노숙인 두 사람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2007년 5월14일 밤, 나주용(가명·당시 29살)씨는 그랬던 친구 송인철(가명·당시 29살)씨를 저버리는 진술을 해버렸다.

 

자신과 친구를 추궁하는 경찰 앞에서 나씨도 처음엔 저항했다. 10대 소녀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날 새벽 나씨는 수원역 근처 피시방에서 밤새 게임을 했다.

 

“저 그때 형들하고 게임하고 있었어요. 피시방에 확인해주세요.” 형사에게 말했지만 묵살당했다. “여자친구가 증인이에요.” 형사는 여자친구와의 연락수단인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빼버렸다.

 

“거짓말하지 말고 얘기해라.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까, 나가게 해줄 테니까.” 그날 저녁 형사가 ‘범죄 사실을 인정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나씨는 나중에 법정에서 증언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형사에게 나씨는 그래서 ‘진짜 거짓말’을 했다. 죽이지 않았다는 말을 해봐야 믿어주지 않았다. “나쁜 형들이 있는 감방에서 이제 막 나왔는데 다시 들어갈까봐 무서웠어요. 제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10대 소녀를 때려 숨지게 했다는 엄청난 범죄를 순순히 자백한 이유를 보통 사람들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날 밤, 두 사람이 ‘거짓 자백’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경찰은 화 안 내고 좋은 말로 했어요. ‘거짓말 말라’고 화낸 것만 빼고는….” 나씨의 회고다.

 

당시 경찰의 수사 방식에 대해 변호사 박준영(38)씨는 “지능이 떨어지는 나씨와 송씨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회유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나씨는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었다. 고교 시절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송씨의 지능은 평균 이하인 것으로 나중에 판정받았다.

 

두 사람을 도와줄 사람이 경기도 수원남부경찰서에는 없었다. 두 사람은 ‘나가게 해주겠다’는 경찰의 회유에 쉽게 넘어갔다. 도움을 줄 가족도 없었다. 나씨의 어머니는 나씨와 마찬가지로 지적장애를 겪고 있었다. 송씨의 어머니는 재혼 뒤 아들과 연락을 끊은 지 오래였다. 송씨는 외아들이었지만 이후 구속돼 재판받는 동안 어머니는 면회를 오지 않았다.

 

사태를 바로잡을 기회가 있긴 했다. 일주일 뒤 수원지검 조사실에서 송씨는 범행 사실을 부인했다. 검사의 인상은 형사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사람을 죽인 적 있느냐”고 검사가 물었다. “없습니다.” 그간의 억울함을 담아 송씨가 답했다. “경찰관이 때려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거예요.”

 

얼마나 맞은 것인지 검사는 물었다. 송씨는 할 말이 없었다. 송씨 스스로 되짚어도 형사가 목덜미를 한 차례 내려친 일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정강이를 차였던 것도 같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확실치 않았다.

 

“많이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의자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그렇게 진술하는 겁니까?” 맥이 빠졌다. “억울하다”고 말하는 송씨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뒤이어 영상녹화를 병행한 진술서 작성 때, 송씨는 “내가 죽였다”고 다시 자백해버렸다.

 

두 사람은 그 자백의 결과를 짐작하지 못했다. “자백만 하면 크게 처벌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송씨가 말했다. 나씨는 자신을 책망했다. “내가 놀려고 수원역 한번 나간 게 잘못이에요. 그것 때문에 벌 받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 송씨를 상담한 한 사회복지 전문가는 “사실 여부를 떠나 작은 압력에도 무기력하게 순응하는 것은 가혹한 거리생활에 지친 노숙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적응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두 노숙인은 법원의 결정에도 순응했다. 나씨는 1심에서 200만원 벌금형을 받은 뒤 항소를 포기했다. 2심에서 징역 5년형을 확정받은 송씨도 마찬가지였다. “형량이 늘어날까봐 무서웠다”고 송씨는 나중에 말했다. ‘노숙 소녀’ 살인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엄지원 기자

 

 

③ ‘반전’에서는 사건의 공범으로 붙잡힌 10대 노숙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무죄의 재구성 - 노숙소녀 살인사건] ③ 반전아버지·새엄마에 얻어맞던 소녀
수원역 노숙인들 틈에서 살기도
난데없이 수원지검에 불려갔더니
노숙소녀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
검사 “네 남자친구가 자백했어”

 

독방엔 한기가 돌았다. “텔∼미, 텔∼미.” 이따금 누군가 최신가요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상스런 노랫소리가 울려퍼지면 옆방 재소자들이 발작적인 신경질을 냈다. 2008년 1월 경기도 수원구치소엔 볕 한 점 들지 않았다. 한정임(가명·당시 17살)양의 통통한 뺨에 거친 각질이 허옇게 일곤 했다.

 

독방에 얼마를 갇혀 지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가 까마득했다. 잿빛 벽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구치소에서 벗어나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깨면 눈물로 베갯잇이 흥건했다. “정말 안 죽였어요.” 범행을 부인할 때마다 검사는 한양을 독방으로 보냈다.

 

수원지검 본청 별관 조사실로 끌려온 것은 2008년 1월23일이었다. 몇달 전, 한양은 거리에 주차된 차에서 돈을 훔쳤다. “그땐 배가 많이 고팠다”고 한양은 나중에 말했다. 한양은 가출 청소년이었다. 친엄마는 한양이 5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용달차를 타고 가족 나들이를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살림은 망가졌다. 새어머니는 한양에게 모질었다. 한양은 종종 얻어맞았다.

 

새어머니는 교복 사줄 돈이 없다고 했다. 한양은 중학교 졸업을 포기했다. 술취한 아버지는 “널 보면 네 엄마가 생각난다”며 한양을 때렸다. 3살 아래 동생에게 밥상 차려주는 일도 지긋지긋했다. 12살 소녀는 집을 나와 버렸다.

 

수원역 앞 광장에는 100여명의 노숙인들이 있었다. 그들 틈에 섞여 들어간 한양은 대합실 의자에 쪼그려 잤다. 새벽이면 근처 교회에서 공짜 밥을 먹었다. 추운 날엔 청소년 쉼터의 문을 두드렸다. 식당 전단지 돌리는 일로 푼돈을 벌었다. 구걸도 했다. 돈이 생기면 찜질방에 갔다.

 

처지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려 초등학생들에게 ‘삥’(갈취)을 뜯거나 빈 차를 털기도 했다. 그러다 붙잡혀 절도죄로 보호처분을 받았다. 보호처분 규정을 어기고 또다시 가출해 안양에 있는 소년분류심사원에 들어갔다.

 

‘뭔가 하나 터졌구나.’ 소년분류심사원에 있다가 난데없이 수원지검에 불려가면서 한양은 옛 잘못 가운데 하나가 들통난 것이라 생각했다. 소녀의 짐작은 틀렸다.

 

죄목은 따로 있었다. ‘상해치사’였다. 검찰은 2007년 5월14일 수원고등학교에서 발생한 ‘노숙소녀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한양을 구속했다. 이미 7개월 전 20대 노숙인 2명이 범인으로 구속됐고, 그 가운데 1명은 실형을 살고 있는 상태였다. 노숙소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노숙자에서 가출 청소년으로 돌변해 가는 한복판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한양은 잘 몰랐다.

 

그 사건을 알고는 있었다. 함께 어울리던 20대 노숙인 아저씨들이 10대 소녀를 죽였다고 하여 한양도 놀랐다. 당시 한양과 친구들은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을 확인하려고 수원역에 나온 형사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친구들 모두 자백했어. 네 남자친구 차승진(가명·당시 19살)이가 ‘너랑 같이 (살인)했다’고 다 이야기했다고.” 한양은 검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친구들이 같은 죄목으로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다. 우리가 사람을 죽였다고? 살뜰히 믿고 따랐던 남자친구가 나를 지목했다고?

 

갑갑한 가슴을 치며 소녀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차라리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제 목을 그어버리고 싶었어요.” 한양은 나중에 말했다.

 

검사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를 설명해줬다. “변호사 사줄 가족은 있어?” 검사가 물었다. 가출해 지내는 처지라는 걸 검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빠가 떠올랐다. 날품 일감마저 끊겨 벌이가 없는 터였다. 말썽쟁이 딸을 위해 변호사를 불러줄 것 같지 않았다. “아빠가 (변호사 선임을) 해주실지 안 해주실지….” 한양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지금 당장 변호사 선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검사는 말했다.

 

“그냥 (혼자) 할래요.” 그 대답이 초래할 사태를 당시에는 잘 몰랐다. 자신을 살인범으로 기소하려는 검찰에 혼자 힘으로 맞서겠다고 답했을 때, 한양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17살 소녀였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④조작

변호사·가족 없는 검찰 조사실
알리바이 있다는 말 무시하고
무조건 “자백만이 유일한 길”
부인하던 모습은 녹화도 안해
진술·현장검증까지 직접 지도

 

 

소년은 잔뜩 몸을 웅크렸다. 한기가 들었다. 왜소한 몸에 걸친 커다란 점퍼를 여몄다. 2008년 1월17일 밤 9시 권영민(가명·당시 17살)군은 경기도 수원지검 영상녹화실에 앉았다. 지난 두 시간이 꿈만 같았다. “억울하다”고 얼마나 소리쳤는지 모른다. 눈물도 흘렸다. 모두 소용없는 짓이 돼버렸다.

 

그날 저녁 7시께 권군은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왔다. 검사는 난데없는 말을 했다. “네가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범인이지?” 황당한 소리였다. 종종 수원역에 놀러 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2007년 5월 권군은 수원이 아니라 성남에 있었다. 여자친구와 함께 지냈을 때라 또렷이 기억났다.

 

권군은 검사의 허락을 받아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나 기억 안 나는데 작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대. 여기 검찰청이야.” 울먹이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할머니가 거기 길을 모르는데…. 어쩔까, 아가.”

 

술고래 아버지와 몰인정한 새어머니를 피해 가출한 지 몇 달 동안 운 적은 없었다. 남자니까 힘들어도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권군은 소리내어 울었다. “차라리 거짓말탐지기라도 시켜주세요. 저 정말 결백해요.” 그런 권군에게 검사는 “연기를 잘한다”고 비꼬아 말했다.

 

이미 4명의 다른 친구들이 자백했다고 검사는 을렀다. “그런데 너만 억울하다고 하면 불리해지겠어, 유리해지겠어?”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자신을 모함하는 이유를 권군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검사의 말이 사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권군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권군이 검사 앞에 앉아 있던 그때까지, 다른 친구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검찰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수원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가 “사건의 진짜 범인은 수원역의 10대 노숙 청소년”이라는 단순 제보만으로 수사에 착수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자백만이 유일한 길이다. 네가 죄가 없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 없다.” 검사의 목소리는 시종 부드러웠다. 하지만 살인이라니, 감방에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반항하려고 집 나와서 벌 받는구나.’ 17살 소년은 그렇게 자신을 책망했다.

 

검사는 설득에도 능했다. “칼 들고 싸움 벌여 사람 죽인 조폭 중에 집행유예로 나온 사람도 있어. 너네는 미성년자잖아. 법정형도 훨씬 더 낮아.” 법을 잘 모르는 권군도 ‘집행유예’가 뭔지는 알았다. 그것은 감옥을 가지 않아도 되는 처벌이다.

 

자백과 번복을 오가던 권군은 결국 ‘완전한 자백’을 선택했다. 변호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앉은 검찰청 조사실에서 나머지 4명의 10대 청소년들도 모두 자백했다. 검사는 이 중 한 소녀(당시 18살)에게, 함께 붙잡혀온 세 살 아래 소녀를 “좀 설득해보라”고도 했다. 나중에 만난 아이들은 “그땐 그것(자백)이 최선의 방법이고 하루빨리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범행을 완전히 인정하는 자백을 받아낸 뒤, 검사는 아이들을 영상녹화실로 데려갔다. 나중에 검찰은 이 영상녹화 사실을 홍보했다. “사안이 중대한 점을 감안해 조사 과정을 모두 영상 녹음·녹화하는 등 적법절차를 준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법정 증언 등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두서없이 진술한 대목은 법정에 제출된 녹취록에서 삭제되거나 윤색됐다. 하지 않은 일을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검사는 앞서 조사받은 아이들의 진술내용을 읽어주며 진술의 아귀를 맞췄다.

 

그 결과, 법정에 증거로 제출된 최종 녹취록에서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범행을 자백하고 있었다. 녹취록을 살펴본 1심 판사는 유죄를 선고했다. 현장검증에서도 아이들은 수사관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요렇게? 그렇게 톡 치지는 않았잖아. 주먹 쥐고(해야지).” 수사관은 동선까지 꼼꼼히 일러줬다고 아이들은 나중에 털어놓았다.

 

현장검증 자리에서야 아이들은 마스크를 쓴 친구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땐 그저 오랜만에 서로 만난 게 반가웠어요.” 자신들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구렁텅이가 무엇인지 아이들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⑤호소

구속 소녀가 기댈 곳은 상담교사뿐
“양아치처럼 살았지만 살인은 안해”
겨우 천원 빌려 산 편지지에 써보내
교사·변호사, 매일 증거자료 재검토
하지만 1심은 수사결과 믿고 “유죄”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다음엔 배신감이 들었다. 경기도 청소년상담지원센터의 상담교사 김태진(당시 30살·여)씨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사람을 죽였다니. 자신이 2년 가까이 돌봤던 10대 소녀가 ‘살인범’으로 검찰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김씨는 믿을 수 없었다.

 

2006년 김씨는 한정임(가명·당시 15살)양을 처음 만났다. 가출 청소년 상담 일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한양은 수원역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쉼터에 들러 하룻밤 잠을 청하곤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집보다 거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소녀는 말했다. 소녀의 눈에 가득한 불신을 김씨는 보았다. 일단 마음을 연 뒤엔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스럼없이 김씨를 “엄마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꼭 요리사 돼서 맛난 거 해드릴게요. 그때까지 돌봐주세요.”

 

2008년 1월, 검찰이 한양과 함께 기소한 3명의 가출 청소년들도 김씨가 잘 아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청소년들이 고문에 가까운 잔인한 폭행을 했다”는 보도를 김씨는 보았다. 검찰이 작성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은 나중에야 알았다.

 

편지를 받은 건, 한양이 수원구치소에 수감된 지 1달이 지난 2008년 2월이었다. “참 암울해요. 쌤(선생님)은 내가 정말 그랬다고 생각해요?” 한양에겐 돈이 없었다. 동료 수감자에게 1000원을 빌려 편지지를 샀다. 그 귀한 편지지에 자신의 결백을 빼곡히 적어, 한양은 김씨에게 보냈다.

 

“제가 아무리 가출해서 양아치처럼 살았지만 쌤만은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살인) 안 했다고 난리쳐도 검사가 몰아붙여서, 난동 피우면 없던 죄도 생길까봐, 막장이다 생각하고 인정했어요. 선생님과 했던 약속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설마 제가 사람을 죽였을까요?”

 

한양의 아버지는 면회조차 오지 않았다. 함께 기소된 다른 청소년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돌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국선변호사가 선임됐지만, 아이들은 변호사도 믿지 않았다. “국선변호사는 검사 편”이라는 옆방 성인 재소자들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인 것을 상담교사 김씨는 나중에 알았다. 거리의 아이들이 신뢰한 사람은 ‘쌤’뿐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김씨는 국선변호사를 만났다. 아이들의 ‘거짓 자백’이 아닌 ‘진실한 고백’을 변호사에게 알렸다. 이후 1년여 동안, 김씨를 비롯한 상담센터 교사 4명과 국선변호인 박준영 변호사는 개인시간을 반납했다. 거의 매일 저녁 모여 수사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다. 범행 장소인 수원역에서 수원고등학교까지 수십 차례 걸으며 살폈다. 검찰의 진술 녹화영상을 입수해 녹취록도 밤새 새로 썼다.

 

대가를 지불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편지지를 구할 1000원도 없이 감옥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게 만든 힘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그때는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쌤’이 곁에 앉고 국선변호사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줄줄이 자백을 번복했다.

 

하늘도 그들을 돕는 듯했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붙잡혀 복역하고 있던 노숙인 송인철(가명·당시 30살)씨가 2008년 4월 열린 1심 공판의 증인으로 나섰다. “꼬맹이들과 함께 소녀를 때렸다”는 송씨의 검찰 진술은 10대 노숙 청소년들을 기소하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 하지만 그날 법정에 선 송씨는 또박또박 말했다. “저도, 아이들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박 변호사와 상담교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환호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해 7월, 1심 재판부였던 수원지법은 한양을 비롯한 노숙 청소년 4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각각 징역 2~4년형을 선고받았다. “어린 피해자가 꿈을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차디찬 콘크리트바닥에서 생을 마감하였음에도, 피고인들이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는 점에 비춰 엄히 처벌함이 마땅하다”고 당시 재판부는 밝혔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⑥증거
노숙자 나씨, 2심서 진술 번복
“나도, 인철이도 안죽였다”
당시 무인카메라에 아무도 안찍혀
대법, 검찰상고 기각 무죄 확정

 

교문은 낮았다. 차량 통행을 막는 철제 울타리는 허리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누구나 쉽게 넘을 수 있었다. 반면 학교 담장은 높았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담장의 높이는 2m가 넘었다. 건장한 남성이라 해도 타넘기 힘든 높이였다.

 

2007년 5월 ‘수원 노숙 소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처음 지목됐던 노숙인 나주용(가명·당시 29살)씨는 당시 경찰 조사에서 “저는 (학교 정문인) 철문을 넘었고, 나머지(또다른 노숙인과 10대 청소년들)는 학교 담을 넘었다”고 진술했다.

 

박준영(38) 변호사는 경기도 수원시 수원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한참 동안 생각했다. ‘경찰은 현장을 제대로 살펴보기나 한 걸까?’ 2008년 4월 피해자 김아무개(15)양이 숨진 채 발견된 고등학교를 둘러보고 나서야 “사건 수사가 처음부터 잘못됐고, 기소된 이들 가운데 아무도 진범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박 변호사는 말했다.

 

전남의 작은 섬마을 출신인 박 변호사는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죽을힘을 다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류대학 출신들에게 밀려 사건 수임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할 수 없이 택한 게 국선 변호사였다.

 

2008년 2월, 2년차 새내기 변호사에게 ‘수원 노숙 소녀 살인사건’이 맡겨졌다. 돌보는 이 없이 거리를 떠돌던 10대 청소년 5명이 피의자였다. ‘일단 이 사건을 잘 이끌면 나한테도 다른 기회가 오겠지.’ 처음엔 내심 그런 계산을 했다고 박 변호사는 말했다.

 

밥벌이의 계산을 넘어 사건 실체를 보기 시작한 것은 한 달여 뒤였다. 경기도 청소년상담지원센터의 상담교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아이들에게 죄가 없는 것 같아요.” 국선 변호사는 그 말을 다 믿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같이 자백을 했는데, 두어명은 범인이겠지.’

 

확신은 없었으나 처음부터 다시 기록을 뒤졌다. 다시 들여다본 사건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살해된 10대 청소년에 대해 어느 아이는 “그날 처음 만났다”고 진술했고, 또다른 아이는 “옛날부터 어울리던 사이”라고 말했다. 한 아이가 “(정문의) 담을 넘어갔다”고 말하다 곧이어 “철문을 넘어간 것이 맞다”고 진술하는가 하면, 다른 아이는 “후문이 열려 있어 그리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검사 아저씨가 겁을 줬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도 변호사는 자신이 없었다. “검사가 아이들을 협박·회유했을 거라고 신참 변호사가 어떻게 주장하겠어요?” 박 변호사는 말했다. 1심 막바지에야 박 변호사는 검찰의 진술녹화 영상을 증거로 요청했다. 잡혀온 소년이 자백을 뒤집고 40여분간 범행을 부인하는 것을 박 변호사는 영상에서 확인했다.

 

막힘없이 범행을 자백한 신문조서와 달리 아이들이 머뭇거리며 수사관의 설명을 따른 것도 영상 속에서 확인됐다. “큰 건물 옆에 뭐 기억나는 것 없어? 화단 옆이라든지 아니면 무슨 계단이라든지?” “화단 옆에서 시체가 발견됐는데?” 아이들이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 수사관은 조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작성된 진술조서에서 아이들은 “큰 건물 앞 화단 옆이었다”고 범행 장소를 정확히 밝힌 것으로 기록됐고, 그 자료는 그대로 법정에 제출됐다.

 

변호사는 사건 현장도 다시 둘러봤다. 노숙 청소년들이 새벽 시간에, 인적 드문 수원역 뒤편을 두고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 고등학교까지 피해자를 데려가 폭행했다는 경찰 수사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수원역과 수원고 정문에 설치된 수십여대의 무인카메라에도 아이들의 모습은 전혀 찍히지 않았다.

 

그러나 범행 당시 10대 노숙 청소년들이 ‘함께 있었다’고 진술한 노숙인들의 증언이 여전히 유죄의 증거로 남아 있었다. 처음엔 송인철(가명·당시 29살)씨를, 나중엔 10대 청소년들을 범인으로 지목한 또다른 피의자 나주용씨가 2008년 10월 2심 법정에 섰다. “나도 안 죽이고, (공범으로 기소된) 인철이도 안 죽였어요. 인철이나 애들이 그 고등학교에 간 적이 없어요.”

 

나씨의 진술은 2심에서 중요한 증거로 채택됐다. 2009년 1월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은 “피고인들이 검찰에서 한 자백진술은 그 경위에 비춰 볼 때 신빙성에 의심이 든다”며 10대 가출 청소년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10년 7월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이제 이 사건 범인으로 남은 것은 경찰이 처음 체포한 노숙인 송인철씨와 나주용씨, 두 명뿐이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⑦‘원점’에서는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던 노숙인이 무죄 증거가 다시 발견돼 재심을 받게 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⑦원점
청소년들이 풀려나고도 2년간
감옥에 갇혀 있던 송씨 호소에
담당변호사는 백방으로 뛰었다

 

범행현장 CCTV엔 송씨가 없었고
사망 시각도 경찰 주장과 달랐다
5년형 만기 앞두고 겨우 재심결정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몰렸던 10대 가출 청소년들은 2010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자백에만 의존했던 검찰의 구속기소는 무위로 돌아갔다. 이제 송인철(가명·34)씨만 감옥에 남았다.

 

2012년 5월 송씨는 5년의 형기를 석달 남겨두고 있었다. 몸은 바짝 말라갔다. 터져나오는 기침 때문에 밤에 잠드는 일도 쉽지 않았다. 교도소에 들어와 얻은 결핵균이 밤낮으로 송씨를 괴롭혔다. 식구들과 소식이 끊긴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자신을 감옥에 가둔 사법제도의 기묘한 이치를 송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10대 가출 청소년의 유무죄를 다투는 법정에서 송씨는 증언했다. “아이들도, 나도 (소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송씨가 거짓으로 증언한다며 위증죄로 또 기소해버렸다.

 

2심 법정에서 송씨의 노숙인 친구 나주용(가명·34)씨도 같은 내용으로 증언했다. “아이들도, 나도, 인철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나씨의 증언을 받아들여 10대 가출 청소년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국의 사법제도는 같은 내용의 증언을 다르게 대접했다. 무엇이 같고 다른 것인지 송씨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씨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재판부가 인정했다. 그래서 10대 청소년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같은 내용을 증언한 나도 무죄로 풀려나야 옳은 것 아닐까. 송씨는 생각했다. 그러나 법의 판단은 길고도 복잡했다. 10대 청소년들이 풀려나고도 2년 동안이나 송씨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상해치사죄로 복역중인 송씨에 대한 재심은 기약이 없었다. 2011년 7월 서울고등법원은 송씨에 대한 재심 청구를 기각해버렸다.

 

“요즘 제가 너무 많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지, 아니면 여기서 그냥 끝을 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송씨는 자신을 돕고 있는 박준영(38) 변호사에게 호소했다. 10대 가출 청소년들의 국선 변호를 맡았던 박 변호사는 내처 송씨의 변호까지 맡았다. 송씨의 무죄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가 필요했다.

 

박 변호사는 다시 백방으로 뛰었다. 무죄를 입증할 과학적 증거를 확보했다. 수원고등학교에서 숨진 채 발견된 15살 소녀의 직접적인 사인은 ‘외상성 경막하 출혈’이었다. 외부 충격으로 뇌가 흔들리면서 정맥들이 심하게 늘어나거나 땅기어 파열되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

 

경찰이 받아낸 송씨의 진술서를 보면, 송씨에게 얻어맞은 15살 소녀는 2007년 5월14일 새벽 3시40분께 숨진 것으로 돼 있다. 소녀의 검시는 그날 아침 8시45분께 이뤄졌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소녀의 사망시각이 9.7~15.3시간 전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가깝게는 밤 12시께, 멀게는 전날 오후에 숨졌다는 뜻이었다. 송씨의 ‘자백’과 배치됐다. 경찰 초동수사가 엉망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었다.

 

송씨를 체포했던 형사가 ‘무죄’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배제한 사실도 밝혀냈다. 송씨 등이 경찰에서 진술한 동선대로라면, 수원역 2층에 설치된 무인카메라에 자취가 남아야 했다. 담당 형사는 무인카메라 영상을 확인했으나, 송씨 등이 등장하는 장면을 찾지 못했다. 형사는 이 사실을 수사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송씨를 잡아들인 경찰이 다른 사건에서 강압수사를 벌인 사실도 밝혀졌다. 수원 노숙소녀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뒤인 2007년 5월21일 수원의 한 건물 화장실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숨진 채 발견됐다. 수원남부경찰서 강력팀은 지적장애 2급의 10대 소녀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비정한 엄마’로 몰아갔다. 그러나 소녀는 아기를 낳은 적도 없었다. 10대 지적장애인을 붙잡아 강압수사를 펼친 것이다. 담당 팀은 송씨를 잡아들였던 바로 그 팀이었다.

 

지난 6월 대법원은 송씨의 재심을 결정했다. “무죄를 선고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⑧ 상흔첩보만으로 10대 잡아들인 검사
중앙지검 특수부 거쳐 변호사로
노숙인 송씨 담당했던 형사
경찰서 옮겨 수사업무 계속

 

1년만에 풀려난 아이들 이젠 20대
“결백 의심받는 것 같아요” 고통
두 노숙인 나씨·송씨도 생계 막막

 

끝내 아버지는 딸의 결백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출한 딸과 그 친구들이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언론보도를 보았다. “정말 네가 안 그런 거니?” 아버지는 자꾸 물었다. 정유나(가명·22)씨는 그 일이 가슴에 사무친다. 2010년 7월 대법원은 정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몇달 전에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2007년 5월14일 새벽 경기도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견된 15살 소녀의 주검은 7명의 삶을 흔들어놨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숨을 거둔 어린 소녀만큼이나, 그 범인으로 몰린 사람들도 약하고 가난했다. 그들의 삶을 흔들어놓은 이들은 있었으나,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 당일 붙잡혔던 2명의 20대 노숙인 가운데 공범으로 기소된 나주용(가명·34)씨는 벌금 200만원형을 받았다. 처음부터 항소를 포기한 그는 돈이 없어 노역으로 벌금을 갈음했다. 지적장애 2급인 그는 여전히 날품팔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주범으로 붙잡혀 징역 5년을 살고 지난달 출소한 노숙인 송인철(가명·34)씨는 서울고등법원의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은 “무죄의 명백한 증거가 나왔다”며 재심을 결정했다. 그렇다고 그의 밑바닥 인생이 바뀐 것은 아니다.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송씨와 교감했던 할머니는 수감 기간에 세상을 떴다. 출소하던 날 송씨를 맞으러 나온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교도소에서 결핵까지 앓았던 그는 건강마저 잃었다. 현재 그는 노숙인 지원시설의 도움을 받아 수원의 한 고시원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그나마 2개월의 시한이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먹고살 것인지 송씨는 아무 계획도 세워놓지 못했다.

 

범인으로 몰렸던 5명의 가출 청소년은 이제 20대가 됐다. 학교 대신 감옥에서 1년을 보낸 이들은 뒤늦은 꿈과 절망스런 기억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정유나씨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혈육인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므로 함께 지낼 가족은 없다. 월세를 내기 어려워 여인숙과 피시방을 옮겨다니는 일은 여전하다. 정씨에겐 꿈이 있다. “매일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꿈이에요.”

 

한정임(가명·20)씨는 한밤중 컴퓨터 앞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건 관련 기사들을 뒤적인다. 인터넷에는 한씨와 친구들을 향한 악성 댓글들이 즐비하다. 아픈 상처를 들춰보듯 한씨는 그 저주와 증오의 글을 자꾸 읽어본다.

 

검사가 법정에서 했던 말도 한씨의 귓가를 맴돈다. “노숙 청소년들은 저희가 생각하는 청소년과 그 특성이 너무나 다릅니다. 소년으로서의 순수가 남아 있는 반면에 길거리에서 배운 들고양이와 같은 야생성이 있습니다.” 한양은 물론 다른 친구들 모두 그 말을 기억한다. “‘들고양이와 같은 야생성’이라는 말이 거리에서 들었던 어떤 욕지거리보다 가슴을 후벼팠다”고 한씨는 말했다. “그 말들, 나한테 비아냥거렸던 말들 전부를 검사와 수사관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한씨는 대형 슈퍼마켓에서 채소 파는 일을 한다. “요리 공부를 하고 싶어요. 검정고시도 치고 싶고요.” 지난해 한씨는 6살 위의 남자와 결혼했다. 시가 어른들의 시선은 여전히 어렵다. 자신의 죄를 의심하는 것이 아닐까 내심 걱정이다. “뉴스에 그렇게 나왔으니…. 제가 다른 사람이래도 (저의 결백을) 안 믿을 것 같아요.” 한씨는 많은 것을 체념하고 산다. “원망만 하면 어쩌겠어요. 큰 인생공부 했다고 생각해야지요.”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첩보만으로 10대들을 잡아들였던 수원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의 박아무개 검사는 2009년 1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는 ㅈ법무법인에서 기업인수·합병 전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노숙인 송씨 등을 수사했던 수원남부경찰서 강력팀의 염아무개 형사는 이후 화성서부경찰서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형사사건을 맡고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의견을 듣고자 이들에게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⑨ ‘숙제’에서는 이 사건의 고비마다 허점을 드러내며 약자를 지켜주지 못했던 한국 사법제도의 문제를 짚어봅니다.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⑨ 숙제보호자 동석·영상녹화 등
임의규정·재량사항에 불과
신문조서도 대부분 윤색
영상녹화를 의무화하고
진술서 왜곡 막을 장치 필요

 

7명이 스스로 ‘살인범’이라고 털어놨다. 나중엔 그들 모두 자백을 뒤집었다. 이들은 법정에서 “(검사와 형사가) 무서워 거짓말했다”고 말했다. 여러 명의 피의자가 살인죄를 거짓 자백한 일은 전무후무하다.

 

“내가 죽였다”고 털어놓은 이들은 판단력이 떨어지는 20대 지적 장애인과 10대 청소년들이었다. 이들 모두 돌보는 이 없는 노숙인이기도 했다. 2007년 발생한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은 한국 형사사법체계의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작은 원칙들만 적용됐더라도 그들은 죄인으로 내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함께했다면
느닷없이 잡혀온 이들 곁엔 아무도 없었다. “변호사를 선임할 거냐”는 검사의 질문에 10대 청소년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부모님이 해주실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검사는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한다”고 닦달했고, 17살 소녀는 혼자 신문에 응했다. 이런 상황은 경찰에 잡혀온 20대 노숙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형사소송법 244조 5항은 “특별히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의 경우 (조사 때) 신뢰관계에 있는 자를 동석케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강제력 없는 임의규정일 뿐이다. 현실에선 변호사를 고용할 여력이 되는 사람만 검사 또는 형사 앞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 박준영(38)씨는 “피의자 인권도 중요한 만큼, 청소년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선 이들이 믿을 수 있는 공적 기관의 상담원들이 동석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10대의 곁에 부모 또는 상담교사가, 지적 장애 노숙인 곁에 상담전문가가 함께 있었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진술 전체 영상녹화 의무화해야
10대 청소년들은 처음에 몇 시간씩 범행을 부인했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자백했으니 소용없다”는 검사의 압박에 비로소 거짓 자백을 했다. 검사는 일단 범행을 확실히 인정하도록 한 뒤에야 영상녹화실로 청소년들을 데려갔다.

 

형사소송법 244조 2항은 영상녹화를 재량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범죄가 아니면 영상녹화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 뒤늦게 국선변호사가 확보한 영상이 무죄 확정판결을 받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됐다. 자백을 머뭇거린 정황이 일부나마 영상에 담겼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모든 조사 과정을 영상에 담았다면 이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더 빨리 밝혀졌을 것이다.

 

진술한 그대로 조서를 작성했다면
이 사건의 진술녹화 영상에서 청소년들은 알지 못하는 범행을 자백하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수원지검의 이아무개 수사관은 첫 신문부터 현장검증까지 범행 현장과 수법에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알려줬다. 다른 청소년의 진술 내용을 보여주며 같은 진술을 유도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진술조서를 중요한 근거로 삼아 판결을 내린다. 중요한 진술을 지우거나 문답을 바꿔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범행 수법을 자백한 것처럼 꾸민 조서는 진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박준영 변호사는 “조서에 피의자의 진술을 모두 담긴 어렵더라도 진술 취지는 왜곡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이들과 노숙인들이 말한 그대로의 뜻을 담아 조서가 작성됐다면 재판부가 유죄를 판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사건의 초동수사를 맡은 수원남부경찰서 강력6팀 염규호 형사는 사건 당일 수원역의 무인카메라 영상을 확인하고도 이 사실을 사건기록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수사 단계에서 누락된 증거는 재판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을 맡아 10대 청소년들을 구속 기소하고, 기소 단계에서 이들을 파렴치범으로 모는 보도자료를 냈던 담당 검사도 마찬가지다. 수원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에서 이 사건을 수사했던 ㅈ법무법인의 박재형 변호사는 청소년들을 기소하면서 “가출 청소년들은 성매매와 윤락으로 용돈을 마련하고 범죄가 일상화돼 있다”며 근거도 없는 내용까지 언론에 홍보했다.

 

사건을 수사한 검경 관계자들은 잘못된 수사로 피해를 본 이들에게 사과하거나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박준영 변호사는 기사가 나간 뒤 말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보도가 있었지만 공권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이들의 상황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당함이 글로 남겨져 세상에 알려진다니,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항할 수 없었던 이들을 누군가 밟고 지나갔다. 밟힌 이들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자신들이 밟은 것이 인간이었음을 언젠가 그들은 기억할 수 있을까.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