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 성령의 은사인 심령기도 체험- 송용민 신부님

김레지나 2012. 4. 5. 19:08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2. 세상 속 하느님


성령의 은사인 심령기도 체험

  어린 시절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어머니가 장사를 다 니시느라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을 때였다. 늦은 저녁 시간에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어느 때처럼 안방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나는 잠자리에 누워 있 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벌떡 일어서서 손을 휘젓고 이상한 언어로 소리를 내면서 안방을 돌아다니시는 것이었다. 누이들은 무서워서 울고 있고, 나는 '드디어 우리 어머니가 이상해지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불을 확 뒤집어쓰고 다시 누워버렸다. 그 순간 어머니가 내게 오셔서 이불을 걷어내고 온몸을 흔들면서 그 이상한 언어를 계속 읊으셨다. 한참을 그런 다음 어머니는 조용히 우리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다.

  꽤 세월이 지나서 어머니께 그때 왜 그러셨는지 여쭈었다. 어머니가 집에 들어와 심령기도를 하시는 중에 눈을 뜨자 기괴한 괴물들이 안방을 가득 채우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순간 어머니는 사탄이 이 집을 점령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들을 쫓아내려고 손을 휘저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짜증을 내며 이불을 덮고 누우니까 그 괴물들 중 하나가 갑자기 내 안으로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사탄을 쫓아내기 위해 온몸을 흔드셨다는 것이다.

 

  성령 세미나에 참석해서 성령의 활동을 깊이 체험하는 사람들 중에는 평소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환시나 환청을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 바오로가 세운 코린토 공동체에서 있었던 것처럼(1코린 12장) 성령께서는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고치거나 남을 도와주고 지도하는 능력 또는 신령한 언어를 말하고 해석하는 등 다양한 은사를 선사하신다.

 

  한두 번쯤은 들어본 '성령대부흥회'는 한국 개신교가 성장하게 된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천주교회도 80 년대 이후 성령 세미나가 확산되면서 적지 않은 신자들이 성령 부흥회와 비슷한 '성령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다.

  한恨이 많은 한국인에게 성령 세미나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받을 수 있는 장場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미사 전례나 정형화된 신앙생활에 익숙해진 가톨릭 신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체험하는 첫 번째 표징으로 '심령기도'를 만 난다. 이상한 언어로 불리는 심령기도는 성령께서 나를 일으키시는 특별한 체험으로 이해됐고, 심령기도를 하는 것이 성령 체험의 중요한 잣대인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색깔이 강한 심령기도를 거북하게 여기거나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신학 공부를 많이 한 성직자들은 심령기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미신적 요소가 많이 담긴 것처럼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심령기도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의 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대개 형식화된 전례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자들이나, 전통적인 방식의 기도에 익숙한 신자들은 말이나 생각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 말씀을 새기며 묵상하는 기도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영혼을 울리는 강렬한 통성기도나 심령기도에는 쉽게 적응하 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용한 기도와 묵상을 하고 싶 어도 할 수 없는 한 맺힌 인생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성령께 서 자신을 대신하여 탄식해주시는 깊은 마음의 움직임을 심령 기도로 체험하기도 한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성령 세미나에 초대받아 참석했을 때, 나는 사제였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하시는 심령기도를 많이 보고 자란 덕에 기도회에서 이루어지는 심령기도가 그다지 거 북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기도를 통해 깊은 참회와 회심,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놀라운 체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을 뿐이다.

  모두 심령기도에 취해 있을 때 봉사자 한 분이 나한테 와서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여셔야 합니다."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하지만 꼭 심령기도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 는 유일한 표징이 아님을 믿었던 나는 심령기도보다 더 중요한 몇 가지를 얻었던 기억이 난다. 성령 세미나는 심령기도가 목적이 아니다. 대부분의 세미나 참석자가 처음으로 심령기도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우선 찬미와 찬송을 통해 마음의 벽을 허물고,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성령의 은사를 통해 삶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자리에서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미움과 불신의 벽을 허물고, 나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거나, 내 시련과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성령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열어 놓을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고해성사는 내 삶의 참회와 회심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의 눈물과 외침, 심령기도의 음성이 비로소 참석자의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꼭 심령기도를 해야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라 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심령기도는 하느님과 내밀한 만남을 이루게 해주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마음에 찾아온 기쁨과 평화, 인내와 절제, 사랑과 믿음의 열정이 생기게 해주는 것도 성령의 큰 은사에 속한다.

  중요한 점은 성령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확신과 그 확신을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 삶의 의미와 목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이다.

  처음 성령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온 나한테 변화가 있었다 면 그것은 성경을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신학생 때 한 번 통독 한 후 학업 중에 부분적으로 읽고 공부했던 성경을 다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읽기를 작정하고 몇몇 유학생들과 함께 읽으며 묵상을 나누었던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

  심령기도의 강렬함보다는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용기를 일으켜 주시는 성 령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은사는 결국 내가 하느님을 향해 회심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삶을 변화시키며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내 삶에 강렬하게 남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도 중요하지만, 날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성령께 청하며 살 수 있는 마음도 성령께서 주시는 중요한 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