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 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징 - 왜 굳이 가톨릭 신자로? - 송용민 신부님

김레지나 2012. 4. 5. 18:49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3. 세상 속 교회


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징

  근래 가톨릭 신자들이 겪는 정체성 놀란에는 다종교 사회 안 에서 '내가 왜 굳이 가톨릭 신자로 계속 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적지 않은 의문에서 시작된다. 가톨릭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마 음의 평화를 찾으며, 번거로운 교회법이나 교회의 규정에 얽매임 없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개신교도 있고, 의무를 지우지 않는 불교의 수행에 매력을 더 느낄 수도 있기 때 문이다.

  더욱이 종교적 신념이 상대화되는 오늘날 내 신앙이 남의 신앙과 별로 다를 것 없다는 위기의식은 별다른 종교적 체험을 하지 못한 가톨릭 신자에게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혼란 에 이르게 하는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누군가 내게 "왜 굳이 가톨릭 신자로 남고 싶어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 sacra - ment)'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가톨릭교회의 '성사' 하 면 '칠성사'를 떠올리기 쉬운데, 실상 '칠성사'란 농담처럼 말 하는 불교 사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보이지 않 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징을 통해서 전달해 주는 교회의 자기 이해의 일곱 가지 방식'을 일컫는다.

 

  '교회의 자기 이해 방식'이라는 어려운 말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인간의 종교적 갈망을 제도적으로 채워 주는 공동 체 가운데 하나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이 역사 안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한 인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났음을 깨닫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여기서 '볼 수 없는 하느님 은총'이란 우리가 흔히 필요할 때 내게 꼭 맞는 맞춤형 선물꾸러미를 하느님이 주시는 그런 형태의 은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궁극적 완성에 이르는 길이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느끼고, 그분의 은총이 구체적으로 내 피부에 와 닿는 현실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하느님 은총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인 한 인물 나자렛 예수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 해 '볼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났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종교다.

  곧 인류의 죄악과 모순 속에서 실패나 끝처럼 보이는 예수의 죽음을 뛰어 넘는 부활사건을 통해 하느님 은총이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의 실존을 거는 신앙 공동체를 말한 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이러한 희망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신'(요한 14,9 참조) 예수님 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하느님 은총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성령) 의 도움으로 깨달았거나 깨닫고 싶어하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처럼, 교회를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를 세상에 드러내야 할 '표징이며 도구'(교회 1항)라고 선언했다.

  '표징이자 도구'로 자신을 이해한 가톨릭교회는 본성적으로 성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볼 수 있는 구조들, 예를 들어 교계제도, 전례행위, 공동체 삶,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구원과 희망이 이들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고백한다.

 

  가톨릭교회의 칠성사는 인간 구원을 향한 하느님 은총이 특별 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내리는 선물이 아니라, 개인과 온 인류의 삶의 여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곧 누구나 탄생하고(세례성사), 성장하여(견진성사), 먹고 살며(성체성사), 죄를 짓고 용서받으며(고해성사), 배우자를 만나 신뢰를 약속하거나(혼인성사), 교회 공동체를 위해 평생 헌신하기로 결심하고(성품성사), 질병의 고통과 죽음 속에 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병자성사) 생生의 모든 여정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성사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이 교회의 전례 행위 안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전달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말하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성사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때가 되면 받아야 하는 그런 형식적인 교회 예절이 아니다. 부모의 신앙 때문에, 남들처럼 첫영성체 나 견진을 받을 때가 되었으니까, 싫지만 신자의 의무니까 미 사에 참석하고 때가 되면 고백할 것이 없어도 판공성사라도 봐 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체를 모시면서도 그 준비나 느낌을 가질 겨를도 없이 살며, 때가 되어 성당에서 축복받는 결혼을 하 고 싶어 혼인면담을 청하는 그런 형식적인 가톨릭 신자의 관혼상제 예절이 아닌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사는 신자라면 누구나 '성사적인 삶'을 살아 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 은총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은총은 신비종교나 뉴에이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숨겨진, 그래서 '신비술 esoteric'을 통해서만 찾아낼 수 있는 자기 구원 능력과 평화 가 아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금은 희미하게 볼 수밖 에 없지만 세상에서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표징이나 사건 을 통해 느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자 열정으로 '체험體驗'할 수 있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거부하거나 도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숨 쉬고 살아계시며 끊임없이 자신을 선사하시는 자리이다. 그분은 우리 시대의 감각적인 다양한 영상매 체 안에서 즐기는 '볼거리'나 '들을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가까이 있지만 좀처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또 다른 '볼거리' 안에서 힘차게 말씀하시고 손을 내밀어 주신다.

  우리가 매주 성체를 모실 때, 성경 말씀을 들을 때, 나와 다르지만 내가 몰랐던 새로운 인생의 희망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바라볼 때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웅변처럼 다가오고 있음을 읽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 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