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 십자가 없는 예수님, 예수님 없는 십자가 - 송용민 신부님

김레지나 2012. 3. 30. 11:27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2. 세상 속 하느님

십자가 없는 예수님, 예수님 없는 십자가


  
   십자가 없는 교회? 십자가 없는 예수님? 그런 것은 신자로서       
생각할 수도 없겠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신자는 어떨까? 몸을
치장하는  다양한 십자가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 없이 살고 싶어하는 신자들은 있지 않을까?
   유학생 시절에 성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열심히 기도하던 한
자매를 만난 적이 있다.  하루는 그 친구가 보통 교우들이 장식
물처럼 달고 다니는 십자가 목걸리는커녕 방에도  십자가를 놓
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이유를 물었다.  자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목에 걸고 다니는 일이 너무  가슴 아픈
일이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심이 좋아서  그런 생각
이 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그 자매의 엉뚱한 말에 당혹감을 느꼈다.
예수님이 3년의 공생활로  생을 끝낸 것이 너무 아쉽지 않느냐
는 말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고 석가모니처럼 오랫동안
살면서 하느님 말씀을 전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알
고  회개하고  구원을 체험했을 것이며,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꼭 그렇게 처
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셔야만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
으셨을까 싶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전권을 지니신 분이라면, 굳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구원하고 사람들을  회개시킬 수있
는 것 아닌가 말이다.  하긴 공생활로 따지면  3년이란  세월을
불꽃처럼 살다가  허망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이다. 만약 그분이 부처님처럼 오랫동안 사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면 굳이  십자가형을 받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처형되
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순진한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런 탓일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의  고통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  죽음을 쳐 이기시고  영생의
문을 열어주신  영광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좋아
한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 죽음에 이르는
인류 구원의 전 과정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고 죽은 자들 가
운데서 일으켜 세워져  하늘로 오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
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
련과 고통의 상징인  십자고상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를  찬미하
거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무관하게  십자가 없는 신앙을
꿈꾸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신앙이다.  오직 축복만을 바라
며 기도하고,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 신
앙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번 물어보자.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만 했을까? 사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가장  흉학한  범죄자에
게 내렸던 극형에 속한다.  가장 치욕적이면서도 고통스럽게 사
람을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형벌이 예수님께 내려진 것은
지극히 부당한 처사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어쩌면
시대의 가장  극단적 모순을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유다
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자적 말씀과  행적에  시기심을 드러냈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예수님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지배자들은  유다민족이 부당
한 방식으로 예수를  사형에 처해달라는 청을  정치적이고 외교
적인 형태로 풀려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에는 인간 사회에
서 발생할 수 있는 지극히 다양한 형태의 모순과 죄악이 응축되
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은 인류 죄악의 고리를 끊고자 하셨다. 죄와 상처로 얼
룩진 세상에서 죄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길은 보복이나 앙시믈
품는 것이 아니라 죄악과 폭력의 극한에 맞서 모순과 고통을 수
용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당
신의  천사들을 동원해 유다인들을  벌하고 하느님의 전권을 드
러냈다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킬  영웅적 행위에 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 시위를 통해 드러내
고자 했던 것처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지만,  사랑은 폭력
까지 수용해 낼 수 있는 힘임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
신 셈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멍에와 짐이 아니다.  "고생
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
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라는 예수님
의 말씀이 위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짊어지는  십자
가는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내 안에 가라지처럼 퍼져 있는 삶
의  모순을 치유하는  보속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동시에 내가
짊어진 십자가는 그것이 직접적인  내 탓이 아니더라도  예수님
이 우리 죄악을  대신하여 짊어지신 십자가의  희생에 동참하며
바치는 작은 희생 제물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
류의 죄를 대신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
진다면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고통을 받으신다는 놀
라운 신비를 작게나마 체험할 수 있다.
   인생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남
편을 잃고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면서도 굳세게 꿈을 이뤄가는 사람들, 남들이 보
기에 처량할 정도로  가난하고  병들었으면서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습에서 예수님의 십자
가가 고통의 표징이 아니라  한을 풀어주는 위로와 희망의 상징
이라는 것을  깨닫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장 닥친 시
련과 고통이  감당하기 힘든 내 삶의  무게가 될지라도, 그 시련
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성
장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시련 없이는  성숙하고
덕을 갖춘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믿음도 십자가 없이
는 성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이 없듯
이,  하느님의 사랑도 고통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은총이 아닐
까 생각한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