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돌고양이

김레지나 2012. 3. 15. 18:39

옛날에 크게 깨달으신 스승 한 분이 산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깨달음이 너무 큰지라 사방에서 모여든 제자들로 수도원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스승의 가르침은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짧은 말씀을 마치시면 매일같이 제자들과 함께 벽이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기도를 바치고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수도원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승께서는 기도 시간에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기도에 방해가 되니 기도시간에는 고양이를 기둥에 묶어 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뒤로 기도시간만 되면 제자들은 고양이를 기둥에 묶어 두고 스승과 함께 명상에 잠겼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스승께서 돌아가시고 또 스승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제자들도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수도원에는 분란이 일어나 결국에는 여러 분파로 갈라졌습니다. 어떤 분파는 스승님의 명에 따라 기도할 때는 꼭 흰 고양이를 묶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갈라져 나갔고, 그에 반대하는 분파는 검은색 고양이를 묶지 않으면 정통이 아니라고 비난했습니다. 흰 고양이파는 또 첫째 기둥에 묶어야 한다는 분파와 둘째 기둥이 맞다는 분파로 나뉘었고, 검은 고양이파도 고양이를 묶을 때는 빨간 줄을 써야 한다는 분파와 파란 줄을 써야 한다는 분파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고양이는 비싼 돌을 깎아 만든 돌고양이 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고양이를 가지고 싸우기만 할 뿐 기도를 바치거나 명상에 잠기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스승과 함께 완전히 잊혀 졌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수천 개의 돌고양이 뿐이었습니다.

‘돌고양이(stone cat)’로 알려진 우화를 제가 조금 각색해서 옮겨 본 내용입니다. 돌고양이를 놓고 싸우고 있는 제자들은 상상만 해도 웃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우리들의 신앙 안에서도 똑 같이 일어나고 있다면 어떨까요? 웃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서 교리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신자 분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저 우화속의 돌고양이를 떠올리면서 씁쓸해 합니다. 물론 신중하고 점잖은 분위기의 토론은 얼마든지 반기고 환영합니다만 말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교회가 초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열되어 오늘날 정교회와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 종파로 사분오열 된 데는 여러 가지 숨겨진 의도와 함께 언제나 서로가 정통이라고 외치는 교리논쟁이 있었습니다.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은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한다’는 신경의 내용에 ‘성자로부터도(filioque)’라는 단어 하나를 추가하여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도 발한다’라는 입장을 서방교회가 지지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였습니다. 또 가톨릭교회와 이에 반항하던 신교 세력 간의 충돌로 빚어진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 30년 전쟁 등, 16세기 후반부터 17세가 후반까지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종교전쟁 역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누가 더 정통이냐를 따지는 교리 논쟁의 결과였습니다. 한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끼리 교리 문제와 그로부터 파생된 정치적 사상들을 놓고 목숨을 걸고 싸우다니 아무리 긴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섬뜩한 일 아닙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은 진리이지 교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한 마디 말조차, 한 문장의 글조차 말하거나 써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진리는 무엇이다’라고 입 밖에 내뱉는 순간 그 언어 안에 갇힌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진리를 온 몸뚱이로 불현 듯 체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현현으로서의 말씀logos이신 그리스도님과의 관계 역시 우리는 오로지 은총에 의지한 믿음과 체험으로서만이 올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논쟁과 전쟁을 통해서 승리하는 자가 쟁취할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리 자체이시고 신비 자체이신, ‘나는 있는 나다(탈출3,4)’라고 하시는 그 분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깊은 믿음을 가지고 온 몸으로 체험하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 탄복할 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애써서 인간의 언어에 담아 힘겹게 ‘가리키고’ 있는 것이 교리입니다. ‘가르치다敎’라는 한자어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진리 자체를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진리를 대하는 교회의 경험과 이해,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하는 신학적인 해석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4대 믿을 교리 중 가장 난해하다는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과정을 잘 살펴보면 교리가 어떻게 ‘달을 가리키는 스승의 손가락’ 역할을 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교리는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고백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이루어진 궁극적인 진리와 실재를 어떻게든 애써서 ‘가리키고’자 했던 교회의 땀방울의 결정체입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한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신관의 유대교를 바탕으로 한 초대 그리스도교는 왜 삼위일체라는 참으로 난해한 교리를 정립해야만 했을까요? 이방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바오로 사도의 열정적인 전도 여행은 한 가지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제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의 거처인 올림포스 산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신화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문화 속에서 살아온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다신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결국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라는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은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체계화하기에 이릅니다. 먼저 니케아공의회(A.D. 325)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계시가 곧 신적인 본질과 동일하다고 밝히면서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반세기 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381)에서는 성령의 신성에 대한 개념을 더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하나의 본질에 세 위격”(mia ousia, treis hypo-stasis, μιαουσια, τρειζυποστασιζ)이라는 표현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정리합니다. 이에 대해 한스큉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본질의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적 원그리스도교 패러다임으로부터 헬레니즘적 고대 교회 패러다임으로의 거대한 전환의 산물’이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이때는 물론 예수께서 이미 돌아가시고 약 3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난 뒤이니 그분께서 살아 활동하실 때에는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서로 다른 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본성으로 존재한다’라는 난해한 삼위일체라는 교리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도 들어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한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교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직접 체험한 삶을 바탕으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자 주님으로 고백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결국 목숨을 바쳐 주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였습니다.

모든 교리는 진리이신 하느님을 ‘가리키기’ 위한 ‘교회의 손가락’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제자들처럼 교회의 손가락을 통하여 그것이 가리키는 하느님을 보다 생생하게 체험하고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한 그 분의 위대한 침묵 속의 현존 안에서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고 담담하게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진리이신 하느님에 대한 교회의 경험과 이해와 신학적인 해석으로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좀 더 깊이 있게 체험함에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분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과 영원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싸우지 마십시오. 서로가 자신을 정통이라고 주장하면서 교리를 놓고 싸우는 그 순간 이미 진리로부터는 천 리 밖으로 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시끄럽고 요란하다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고 앉아 주님의 기도를 바치십시오.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 집중하여 바치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렇게 조용하게 하느님을 부르며 앉아 하느님과의 대화를 시작하면서 자유와 평화와 해방을 체험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행위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8,32)


최강 스테파노신부님 묵상글을 읽으시는 형제자매님들에게 안내 말씀드립니다.

오늘이 중국에서 쓰신 이 글을 마지막으로 최강 스테파노신부님 묵상글을 올리는 마지막 날입니다.

최강신부님은 멕시코시티에서 2010년 가을부터 6개월간 어학연수를 받으신후 2011년 초에 깜뻬체로 발령받으셔서 ‘몸둥이를 열심히 움직이며’ 불철주야 가난하고 힘든 멕시코신자들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연히도 2012년 2월22일 재의 수요일은 신부님이 깜뻬체 (Campeche) 에 선교사로 발령 받으셔서 가신지 딱 일년되는 날 이었습니다 . 깜뻬체는 멕시코에서도 가난한 사람들 특히 마야원주민들이 많이 사는… 도시인프라가 거의 없는 도시중에 하나입니다.

신부님의 원래 바람은 첫 근무지로 나가시기 전에 깜페체 현황을 파악하기위해 싼프란치스코 (Saint Francisco)성당에서 부임신부로 잠시 일 하시다가 멕시코 정부도 돌보지 않아 가난한 이들중에서도 소외되고 힘든 마야원주민들이 사는 본당으로 나가셔서 선교사 사명을 시작하시는거 이셨습니다만, 주님의 뜻은 다른데 있으셨는지 올해초 싼프란치스코성당 주임신부로 발령이 나셔서 굉장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십니다.

싼프란치스코 성당은 등록된 신자수가 10,000명정도이고 2017년이면 500주년이 되는, 지금 현재 495년 전통을 가진 멕시코에서도 유서 깊은 성당입니다 .

앞으로도 최강신부님이 멕시코 깜뻬체 에서 쓰신 묵상글을 읽고 싶으신 형제자매님들은 아래 카페로 오셔서 ‘최강일기’에 있는 신부님 의 살아있는 생생한 묵상글들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지난 8개월간 신부님 글을 이곳 굿뉴스에 옮기며 저도 많은 은총을 받았었는데, 이렇게 오늘 묵상글을 마지막으로 올리게 돼서 많이 아쉽습니다.

사순기가 시작된 이 계절에 형제자매님들 영육간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총과 가호가 늘 함께 하시기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루 하루 너무나 바쁘게 선교사로 일하고 계신 소요신부님과 모든 선교사제들의 영육간 건강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오미숙 마리아막달레나 올림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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