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솟아날 구멍

김레지나 2012. 3. 15. 18:27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아니, 차라리 ‘실수를 하기 때문에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자 하느님에 대비하여 우리들 인간의 부족한 한계를 좀 더 겸손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로마제국 사람들은 “Errare humanum est(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라는 속담으로 한 번의 실수에 좌절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수도 실수 나름인 법,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실수가 있는 반면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나면 얼마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리 잦지는 않지만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꼴로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그 날, 밖에서 일을 보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현관문에 거꾸로 붙어 있는 ‘복福’자의 테이프가 떨어져서 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올 해 부터는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말자’던 새해의 각오가 번뜩 뇌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맞다! 잊어버리기 전에 지금 당장 테이프를 새로 갈아 붙이자. 저는 ‘미루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현관문에 붙어 있는 ‘복’자의 네 귀퉁이를 미리 준비한 테이프로 튼튼하게 붙여 놓았습니다. 살짝 주먹을 쥐면 살이 도톰하게 올라오는 손날로 ‘쿵쿵쿵’ 쳐가면서 그야말로 태풍이 불어도 안 떨어지게 붙여 놓았습니다. 아! 그때 해야 할 일을 바로 그때 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단순한 삶입니다. 해놓은 작은 일에 비해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큰 만족감을 얻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라, 불길한 예감이 번개와 같이 빠른 속도로 제 안에 빨려 들어왔습니다.

문이 잠겼습니다. 열쇠는 집 안에 있습니다. 중국의 대부분의 현관문들은 열쇠가 없으면 밖에서는 열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중국에서 생활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한 번 쯤은 겪어야만 지나가는 홍역과도 같은 실수랍니다. 여기까지는 일반 사람들이 하는 실수와 별 다를 바가 없지요. 하지만 저의 경우는, 특별히 일 년에 한 번 꼴로 벌어지는 어이없는 실수는 이 수준을 가볍게 초월합니다. 현관문이 잠겨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제가 입고 있던 것은 얇은 반팔 티셔츠와 속옷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옷을 갈아입던 와중에 조금도 일을 미루지 않고 너무나도 즉각적으로 행한 결과였습니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그런 복장 상태로 밖에 나갔다가는 금방 동태가 될 것이고, 중국 분들이 타인의 옷차림에 비교적 관대하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잠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는 정도이지 속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지는 않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졌습니다. 하늘이 진짜로 무너지는구나!

차분해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짜일까요? 하늘이 무너졌는데 어디로, 어떻게 솟아나나요? 끊임없이 확신과 회의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꼬리를 물고 제 마음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솟아날 구멍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구멍 1,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열쇠를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한다. 불가능! 전화번호가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데 그 휴대전화는 집 안에 벗어놓은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있다.
구멍 2,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열쇠를 맡겨 둔 친구 집으로 가서 열쇠를 가져온다. 역시 불가능! 이런 경우를 미리 대비한 것 까지는 참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정상적인 복장상태라는 가정에서만 가능하다. 속옷차림으로 30분을 걸어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구멍 3, 파출소에 가면 집주인의 연락처가 기록되어 있다. 파출소에 가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한다. 역시 불가능! 이유는 구멍 2와 비슷하다.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졌는데 솟아날 구멍이란 없습니다. 시간이 점점 흘러감에 따라 추위에 피부는 닭살처럼 오돌토돌해졌습니다. 이쯤 되면 체면이고 부끄러움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삶에 대한 열망은 저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앞 집 문을 두드리게 만들었습니다. 앞집에는 저와 체격이 비슷한 남자와 저보다 체격이 좀 더 큰 그의 아내, 그리고 저와 눈만 마주쳐도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중학생 딸이 살고 있습니다. 저는 우선 그들에게 옷을 빌려 입고 열쇠를 맡겨 놓은 친구 집이나 파출소로 달려갈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희망은 반팔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엘리베이터를 눌러서 그 안에 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행여 젊은 여성이 혼자서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멈추기라도 하는 날이면 저는 졸지에 유명인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바!바!리!맨!

저는 엘리베이터 문 옆의 벽에 최대한 몸을 밀착하고 얼굴만 내민 채 첫 번째 엘리베이터를 맞았습니다. 제발 남자가 타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연세 드신 할머니가 타고 있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은 마치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짓는 법정의 문처럼 장엄하고 느리게 열렸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이 다행스런 일이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두 번째 엘리베이터는 가까이 다가올수록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그냥 통과시켰습니다. 드디어 세 번째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그 안에서는 자전거 핸들에 손을 얹고 있는 젊은 아줌마와 계란과 대파를 양손에 가득 들고 있는 할아버지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몸을 반쯤 엘리베이터 안에 올려놓은 뒤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제발 도와달라고 청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시선을 돌리셨습니다. 그 젊은 아줌마는 원래 웃음이 많은 것인지 자꾸 ‘크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선을 계속 땅바닥으로 향했습니다. 결국 솟아날 구멍은 제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대상이었던 그 젊은 아줌마가 뚫어주었습니다. 그 분이 열쇠 수리공을 불러주었고 저는 속옷 패션쇼를 삼십분 넘게 하고서야 마침내 집 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입니다.

살다보면 하늘이 무너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게 마련입니다. 그 원인이 자신 스스로가 저지른 실수이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이거나 상관없이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참을 수 없을 만한 고통과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의지하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절망은 신앙에 있어서는 오히려 희망의 때이기도 합니다. 가정과 주변의 모든 일이 탈이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는 하느님과 생명에 대한 감사함과 절실함이 없다가도, 일단 내게 하늘이 무너진 듯한 절망적인 순간이 닥쳐오면 원망이든, 탄원이든 아무튼 하느님의 이름을 다시 부르기 시작하니까요. 그런 간사함도 괜찮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의 희망이요 구원이시니까. 하지만 그렇게 간사한 마음으로라도 한 가지는 똑똑히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항상 변하지 않고 영원히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인지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눈물은 곧 마르고, 웃음소리 또한 바람 한 번 타면 아득히 멀어집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도대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강한 젊음도 곧 스쳐지나갈 것이니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들의 존재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바람 부는 대로 시시각각 오고, 가고, 피어나고, 사라지는 구름과도 같은 세상을 영원하다고 믿는 데에서 인간의 절망은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들의 짧은 인생이 마치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필요한 것들에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는 모습에서 절망은 필연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그 절망도 곧 변합니다. 그 절망의 끝에서 새롭게 맛보는 희망, 바로 그것이 참다운 인생과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살리시는 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영원의 그 분 앞에 발가벗고 홀로 서 있는 절망의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참생명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끝에 서서 절망에 떨어본 사람들, 그리하여 임마누엘 하느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제 변함이 없이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온 세상을 꽁꽁 얼리듯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니 다시 봄입니다. 언 땅을 뚫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처럼 시간과 열정을 불필요한 곳에 허비하지 말고 참으로 살아있기 위해 힘쓰십시오. 단순하고 느리게 집중하면서. 아멘!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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