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갈수록 속이 깊고 넓어져야 할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 들어 부쩍 ‘밴댕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산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일년 가야 화 한 번 안내는 사람한테 별 말을 다한다’라며 애써 무시하는 척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그런가?’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나 스스로 ‘밴댕이’가 아니라는 항변을 할 때마다 쓰는 ‘일년 가야 화 한 번 안내는 사람’에 있는 것 같다. 가끔씩 어머니께서 ‘으이그, 저 눈 속에 든 성질을 다 어떻게 하고 사는지......’하실 만큼 사실 어렸을 때는 툭하면 성질을 부리고는 했었는데 어느 땐가부터 나는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잘 돌아보니 나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방법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굉장한 성질을 부리고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6개월 전쯤 전화 통화를 하다가 큰누나가 내 신경을 굉장히 건드리는 부주의한 발언을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그 전화를 끊고 나서 앞으로 적어도 6개월 동안은 전화 통화를 포함한 모든 대화를 단절하기로 했다.
장기간 이라크 자이툰 사단에 파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매형과 통화를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6개월을 채웠다가 어제 전화를 걸었다. 큰누나는 아무런 설명도, 언지도 없이 일방적으로 대화를 차단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에다 일종의 폭력이라고 불만을 쏟아냈다. 나는 예상과는 좀 다른 누나의 태도에 대해 별 반응 없이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6개월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히는 것만을 ‘화’라고 한다면 분명 나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내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평화를 사랑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기 위한 배려의 차원이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을 적당히 무시하는 것으로 내가 받은 상처를 싸매겠다는 대단히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의도가 담긴 무관심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그 무관심마저 잊는다. 상대방은 나의 침묵에 안달이 나 있는데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상대방은 함께 문제를 풀어보자고 애원하는데 나는 무엇이 문제냐며 웃고 앉았다. 참 잔인한 폭력이다.
본인 스스로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들이 꼭 그런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진짜 장점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이웃들이 힘들어하는 장점을 백가지 가져서 어디에 쓰겠는가?
시차에 적응이 안돼 오는 새벽마다 뜬 눈으로 맞이하다보니 밀려드는 생각들이 참 많다. 오늘 새벽에는 일년 가봐야 화 한 번 안낸다는 소리 앞으로는 자랑삼아 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나보고 ‘야이, 밴댕아. 차라리 화내고 살아라’고 한다. 날이 밝으면 어머니께 따지듯 여쭤봐야겠다.
“어머니, 진짜 제 눈에 성질이 꽉 차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은 관대하시고 지극히 자비로운 분이시니 우리에게 관용을 베푸소서.”(2다니 3,42)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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