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여우
루가 13.31-35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사제관 뒤뜰에는 매괴동산에 사는 고라니가 내려옵니다. 가끔은 너구리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여우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밤중 바스락, 바스락 소리에 또 왔구나 하며 사진에 담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가 9,7이하). 그는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가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가12,50).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가13,34)하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여 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입니다.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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