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허윤석 신부님

올레길 홀로 걷기

김레지나 2011. 10. 8. 12:38

걷는 일은

 

표류하는 작은 선박과 같다.

 

 

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바람에 부대끼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뜻합니다.

 

 

걷는 일에는

 

속도에 대한 전제가 없기 때문에

 

아뿔사 하고 지나치거나, 잃어버리거나, 잊혀지는 것이 없고

 

삭제의 어려움이나 아쉬움을 겪지 않아서 좋다.

 

 

잃지 않았고

 

삭제되지 않았으니

 

사람과 사물들을 곰씹어볼 수 있어

 

사유는 더욱 알차고 영속적이다.

 

 

걷는 일이란

 

낡은 기록들을 떠올이게 하며

 

혹은 고독과 추억들에 담금질당하며

 

진정한 혼자로서의 자신의 됨됨이를 점검하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다급해할 까닭이 없고, 호들갑 떨 필요도 없고

 

정복의 강제에 얽매일 핑요도 없고

 

혼자 있어 경쟁할 까닭이 없으니 기죽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걷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곧잘 혼자 걸을 것을 권유 한다.

 

 

간혹 삶의 즐거움으로부터 쫓겨나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걷기의 두려움과 맞서보라고 권유하곤 한다.

 

 

올레길은

 

성산 포구가 잇는 제주도의 동쪽에서부터

 

촘촘하게 굴곡진 해안선을 가파르게 밟으며

 

제주도의 서북쪽까지 이어진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전 코스를 걷자면 쉼 없이 걸어도 열흘을 훌쩍 넘기게 된다.

 

 

그러나 계속 부쳇살처럼 퍼지는

 

바다 위의 햇살에 전신을 노출시키고 

 

쉼 없이 불어오는 해풍에 가슴속을 빗질당하며

 

걷는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발견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슴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끼어 있었던

 

어둡고 악취 나는 진상들...

 

 

나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던 갖가지 소름끼치는 격정들

 

혹은 자포자기와 불길함,

 

 과장과 두려움과 왜곡으로 덧칠된 생활

 

너울거리거나 뒤틀림과 같이 삶의 짓누르고 있는 중력으로부터

 

한발 한발 멀어지는 뚜렸한 정화의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바람이 빗질해주는 그 정화가

 

걷는 일로부터 나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에서

 

 

 

날씨가 알싸한게 걷기에 좋은 날 입니다.

 

먼길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도 홀로 걷는 즐거움 누려 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