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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기획-받은 것을 다시 주어라] 힙합 가수 바비킴의 삶과 음악

김레지나 2011. 9. 26. 18:38

[사순기획-받은 것을 다시 주어라] 힙합 가수 바비킴의 삶과 음악

"고통의 심연에서 희망의 씨앗 찾았죠"


 
▲ 음악을 재능으로 받은 바비킴.
그는 자신의 음악에 희망을 실어 나눈다.
나눈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신이 받은 것을 나누면 되는 것이다.
 
▲ 2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청소년과 함께하는 세계 병자의 날' 행사에 바비킴이 시각장애인 전제덕씨의 하모니카 연주로 파랑새를 부르고 있다.
그는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 바비킴(본명 김도균 안토니오, 35, 서울 길음동본당).

 그는 2004년 8월 발표한 1집 '고래의 꿈'으로 10년간 무명의 설움을 한 번에 씻어낸 한국 힙합의 대명사다. 힙합 1세대로 '랩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그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올봄 대학축제 섭외가 봇물 터지듯 밀려와 대학축제 전문가수라는 이름이 따라다닐 정도. 또 최근에는 MBC 드라마 '하얀거탑'의 메인테마곡 '소나무'를 불러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의 노래는 뭔가 다르다. 포크스타일, 발라드 풍의 레게음악 속에 흘러나오는 삶에 대한 그의 감미로운 읊조림은 음악을 넘어선 '위로'로 다가온다. 고통스런 이민생활의 설움이 묻어나설까. 그는 노래를 통해 이별한 이들에겐 '추억이 있으니 살아가라'(Let me say goodbye)하고 '세상이 날 힘들게 해도 다시 시작하라'(내 삶의 이슬)고 한다. '다 괜찮아진다'(행복하세)고.

 6일 KBS 신관 앞 커피숍에서 만난 바비킴은 그의 삶과 신앙 그리고 음악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하느님이 주신 '음악'이라는 재능은 고통을 통해 아름다워졌고 스스로를 위한 음악이 아닌 '나누고 싶은 음악'이 됐다고 했다.

 1974년 그가 2살 되던 해. 온 가족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떠났다. MBC 관현악단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김영근 프란치스코, 66)가 본고장에서 트럼펫 실력을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바비킴은 학창시절을 보내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됐고 점점 반항아가 돼 갔다. 경제적으로도 형편이 좋지 않아 바비킴 부모는 옷가게와 음식점, 꽃집 등을 운영하며 힘겹게 생활했다. 그곳엔 꿈꾸던 아메리칸 드림은 없었다.

 바비킴의 음악인생은 트럼펫으로 시작됐다. 중학생 때는 트럼펫 연주자로 손꼽힐 정도였지만 아버지 반대로 트럼펫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자신처럼 아들이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 바비킴은 고등학생이 돼서 자연스레 흑인음악을 접했고 힙합과 레게에 빠졌다.

 힘든 생활 속에서 어머니(정정자 클라라, 59)는 의지할 곳이 없어 개신교회에 다녔다. 그러다 남편이 어린 시절 성당에서 복사를 서는 사진을 발견하고 천주교로 발길을 돌렸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어머니 정씨가 가족들을 성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992년 LA폭동으로 빈털털이가 돼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바비킴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동경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냉대를 받았다. 바비킴은 우울증에 빠져 방 안에서만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을 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다시 일어섰고 영어 테이프를 녹음하며 영어강사, 드라마 엑스트라 등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1994년 그는 그룹 '닥테레게'를 시작으로 힙합음악에 발을 들여놨고 2001년에는 힙합그룹 '부가킹즈'를 결성해 힙합에 심취했다.

 그가 내는 음반은 매번 허사였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어 큰 힘이 됐다. 그러나 어머니 기도에도 불구하고 바비킴에겐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시도 때도 없이 다리에 힘이 풀리는가 하면 식은 땀이 흐르고 정신적 고통도 심해졌다. 어머니는 그에게 "병원에 가기 전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려보라"고 권했다.

 매주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니 마음이 편해졌고 서서히 정신적 고통도 사라져갔다. 그는 성가대에 들어가 친구들과 성가를 부르며 작곡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비킴이 세례를 받은 것은 이때다.

 2004년에는 뜻밖에 솔로 제의가 들어왔다. 음반이 이렇다할 호응을 얻지 못해 서서히 지쳐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마지막 앨범이라는 결심을 하고 곡을 만들었다. 아버지께도 트럼펫 연주를 부탁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고래의 꿈'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1집 '고래의 꿈'은 12만장이 팔려나갔다. 그는 그 때 당시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했다.

 '주님, 저는 부탁같은 거 안하는 거 잘 아시죠? 하지만 이번엔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앨범, 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가족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벌게 해 주십시오.'

 그 해 그는 서울가요대상 힙합상을, 다음 해에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힙합상을 수상했고 그제서야 그는 하느님 뜻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던 삶에서 희망을 기대하기란 늘 버거운 일이었지만 하느님은 그의 고통을 영광으로 바꿔 놓았다.

 그는 또 "그동안 내게 닥쳤던 시련들이 모두 하느님 계획에 있었다는 것을 이제 느낀다"고 했다. 어린 시절 이방인으로서 받았던 인종차별과 귀국 후 후유증으로 들이닥쳤던 정신적 고통, 암흑과 같았던 무명생활이 지금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며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내 고통을 남에게 들려주고 싶어요.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우리 힘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제 노래에 위로를 받아 힘을 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음악'은 시련을 통해 더 깊어졌고 아름다워졌다. 이제 그는 그 음악을 나누는 데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에는 더바디샵과 MTV가 주최하는 에이즈 인식 개선 캠페인 '스톱 에이즈'(STOP AIDS) 무대에서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음악을 선물했고 '청소년을 위한 세계 병자의 날' 무대에선 병자들에게 노래를 선사했다. 그는 앞으로 해외 교포들을 위한 공연도 열고 싶다고 했다. 음악을 통한 봉사라면, 음악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어디든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고통을 통해 승화된 그의 음악은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씨앗으로 나눠진다. 그 씨앗은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싹을 틔워 민들레씨처럼 누군가에게 또 다른 희망이 돼 날아간다.

 그는 최근 서울주보에 자신의 글을 게재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이야기도 나눴다.

 최근 '고래의 꿈'에 이어 발매한 2집 'Follow your soul'(자신의 영혼을 따라가라)은 음반판매 1위를 달리고 있다. 받은 게 많아질수록 나눌 게 많아 요즘따라 행복한 그는 앨범 자켓에 이렇게 적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글=이지혜 기자bonaism@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jfaco510@pbc.co.kr  

[기사원문 보기]
[평화신문  2007.03.15]

 

 

 

 

 

내 어머니의 신앙

 

 

어린 시절 저는 매사에 불만이 많고 반항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미국생활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제가 두 살 되던 해에 저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트럼펫 연주자로 활약했던 아버지께서 당신의 음악세계를 더 꽃피우고 싶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다르다’는 이유로 다름을 지닌 약자는 차별의 고통을 겪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랬습니다. 백인이라고 모두 한국인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음악 분야에서, 누나와 저는 학교에서의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은 서로 예민해졌고, 자주 큰 소리를 냈습니다. 더구나 저는 밖에서는 남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나는 왜 남들과 다르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나뿐인 누나와도 매일같이 싸웠고 어머니의 속을 많이 상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제 자신과 세상에 대한 화를 그렇게 풀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손꼽히는 트럼펫 연주자로도 활동했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그만 두었고, 고등학교 때는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만큼 야구를 잘 했습니다. 포지션은 포수였는데, 미국인들보다 신체적 조건이 열악했던 저로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고 결국 운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지켜 준 분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미국에서 어머니는 공장일을 하셨습니다. 신체적으로 피곤하고 문화 차이와 가족들에게 받는 스트레스로 많이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던 아주머니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누나도 어머니를 따라 함께 교회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고민을 하다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 곧 나의 친할머니께서 보여 준 사진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어릴 적 복사를 서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천주교로 개종을 하면 아버지가 다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답니다.

   어머니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자세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몸소 체험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굳게 믿고 남편과 자식의 십자가까지 묵묵히 떠맡아지셨습니다. 사회에서 받는 차별로 가족 간의 갈등이 잦아 풍비박산이 날 뻔한 가정을 지키셨습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어머니는 정말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을 만났고 주님이 함께해 주셨기에 가족 모두가 그 어려웠던 시간을 함께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알게 되었고 또 믿고 있습니다.

바비 킴 안토니오·가수

 

 

하느님의 천사

 

 

1995년 가을, 방송을 끝내고 이동하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식은땀이 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몸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고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불현듯 ‘내가 지금 하느님께 벌을 받고 있구나’ 하는 불안함과 죽을 것 같은 무서움으로 괴로웠습니다. 몸과 마음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저는 간신히 집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어머니는 무서움에 떨고 있는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기도해 주시고 시간이 흘러도 저는 여전히 그 공포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집 건너편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려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힘들면 주님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보라는 어머니의 권유에 저는 못 이긴 척 성당에 갔습니다. 그 때는 왠지 성당에 가면 누군가가 도와 줄 것만 같았습니다. 미사는 거행되고 있었지만 저는 뒷자리에 앉아 ‘빨리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학생 여러 명이 저에게 우르르 다가오더니 “우리 성가대에 들어오세요!”라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어도 서툴렀고 공포감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던 저는 한 마디로 딱 잘라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주에도 또 그 다음 주에도 그 학생들은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제게 계속 성가대에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제 손을 붙잡으며 말할 때는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저는 마지못해 ‘그래, 한 번 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성가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노래로 봉사활동을 하고 신부님의 부탁으로 작곡도 했습니다.

   성가대 활동을 통해 교우들과 친해졌고 가슴 아팠던 경험에 대해 신부님과 상담하면서 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옆에서 묵묵히 기도해 주셨고 저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고통의 순간을 잘 버티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1년 넘게 저를 누르고 있던 공포감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 저에게 손을 내민 성가대 학생들이 하느님이 보내 주신 천사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정말 노래를 포기하려고 했을 때 진심으로 저를 격려해 준 선배와 친구들, 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분은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 주신 천사였습니다.

   한때는 ‘과연,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라는 의문이 들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느님이 계심을 절실히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를 도와 주고 이끌어 준 분들, 바로 천사들을 보면서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제 곁에 아주 가까이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사에 자주 참례하지 못하지만, 주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분 뜻에 따르려고 노력할 것입이다.

바비 킴 안토니오·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