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기획-받은 것을 다시 주어라] 힙합 가수 바비킴의 삶과 음악 "고통의 심연에서 희망의 씨앗 찾았죠"
내 어머니의 신앙 |
어린 시절 저는 매사에 불만이 많고 반항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미국생활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제가 두 살 되던 해에 저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트럼펫 연주자로 활약했던 아버지께서 당신의 음악세계를 더 꽃피우고 싶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다르다’는 이유로 다름을 지닌 약자는 차별의 고통을 겪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랬습니다. 백인이라고 모두 한국인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음악 분야에서, 누나와 저는 학교에서의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은 서로 예민해졌고, 자주 큰 소리를 냈습니다. 더구나 저는 밖에서는 남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나는 왜 남들과 다르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나뿐인 누나와도 매일같이 싸웠고 어머니의 속을 많이 상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제 자신과 세상에 대한 화를 그렇게 풀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손꼽히는 트럼펫 연주자로도 활동했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그만 두었고, 고등학교 때는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만큼 야구를 잘 했습니다. 포지션은 포수였는데, 미국인들보다 신체적 조건이 열악했던 저로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고 결국 운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지켜 준 분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미국에서 어머니는 공장일을 하셨습니다. 신체적으로 피곤하고 문화 차이와 가족들에게 받는 스트레스로 많이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던 아주머니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누나도 어머니를 따라 함께 교회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고민을 하다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 곧 나의 친할머니께서 보여 준 사진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어릴 적 복사를 서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천주교로 개종을 하면 아버지가 다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답니다.
어머니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자세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몸소 체험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굳게 믿고 남편과 자식의 십자가까지 묵묵히 떠맡아지셨습니다. 사회에서 받는 차별로 가족 간의 갈등이 잦아 풍비박산이 날 뻔한 가정을 지키셨습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어머니는 정말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을 만났고 주님이 함께해 주셨기에 가족 모두가 그 어려웠던 시간을 함께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알게 되었고 또 믿고 있습니다.
● 바비 킴 안토니오·가수
하느님의 천사 |
1995년 가을, 방송을 끝내고 이동하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식은땀이 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몸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고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불현듯 ‘내가 지금 하느님께 벌을 받고 있구나’ 하는 불안함과 죽을 것 같은 무서움으로 괴로웠습니다. 몸과 마음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저는 간신히 집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어머니는 무서움에 떨고 있는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기도해 주시고 시간이 흘러도 저는 여전히 그 공포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집 건너편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려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힘들면 주님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보라는 어머니의 권유에 저는 못 이긴 척 성당에 갔습니다. 그 때는 왠지 성당에 가면 누군가가 도와 줄 것만 같았습니다. 미사는 거행되고 있었지만 저는 뒷자리에 앉아 ‘빨리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학생 여러 명이 저에게 우르르 다가오더니 “우리 성가대에 들어오세요!”라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어도 서툴렀고 공포감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던 저는 한 마디로 딱 잘라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주에도 또 그 다음 주에도 그 학생들은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제게 계속 성가대에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제 손을 붙잡으며 말할 때는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저는 마지못해 ‘그래, 한 번 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성가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노래로 봉사활동을 하고 신부님의 부탁으로 작곡도 했습니다.
성가대 활동을 통해 교우들과 친해졌고 가슴 아팠던 경험에 대해 신부님과 상담하면서 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옆에서 묵묵히 기도해 주셨고 저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고통의 순간을 잘 버티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1년 넘게 저를 누르고 있던 공포감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 저에게 손을 내민 성가대 학생들이 하느님이 보내 주신 천사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정말 노래를 포기하려고 했을 때 진심으로 저를 격려해 준 선배와 친구들, 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분은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 주신 천사였습니다.
한때는 ‘과연,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라는 의문이 들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느님이 계심을 절실히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를 도와 주고 이끌어 준 분들, 바로 천사들을 보면서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제 곁에 아주 가까이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사에 자주 참례하지 못하지만, 주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분 뜻에 따르려고 노력할 것입이다.
● 바비 킴 안토니오·가수
'살며 사랑하며 > 시사,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방암 말기, 먹는 약으로 해결 가능할까 (0) | 2011.10.10 |
---|---|
유방암의 항암치료 (0) | 2011.10.10 |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 성가복지병원 (0) | 2010.12.17 |
우리말 70%가 한자말? 일제가 왜곡한 거라네 (0) | 2009.09.11 |
인터넷 전자우편 실시간 감청시대 (0) | 2009.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