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신앙의 인간 요셉>중에서- 지극히 사소한 일들을 최선을 다해

김레지나 2011. 9. 26. 12:17

p.79~81

 

  요셉이 위대한 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느님의 돌보심을 잊지 않고, 그분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는 점이다. 성서 어디에서도 요셉이 하느님에게 불평했다는 보도는 없다. 노예살이를 하면서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그는 한 번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요셉은 절망과 낙담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 보다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고 하였다. 그래서 노예살이를 하면서도 어떤 일이 맡겨지든 투덜거리거나 꿈지럭대거나 요령을 피우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은 요셉에게 그대로 이루어진다. “한 가닥 빛도 받지 못하고 암흑 속을 헤매는 자가 있거든 야훼의 이름에 희망을 걸 일이다. 자기 하느님을 의지할 일이다.”(이사 50,10)

 

  하느님과 인간의 동행은 중요하다.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상처를 싸맸고 하느님은 그 상처를 낫게 하셨다.”인간의 병을 낫게 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지만 그 전에 인간이 상처를 싸매야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빵으로만 살게 되어 있다면, 하느님은 왜 빵나무를 만들지 않았을까?” 대답은 이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동반자로 여기신다. 그래서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이 손수 밭을 갈이 씨를 부리고 거름을 주고 밀을 거두어 겨를 까부른 다음 빵을 만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빵나무를 만들지 않으신 것이다.”

 

  어떤 종이 누가 보든 안 보든 충실하게 부지런히 일한다면 주인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가 표시도 안 나는 허드렛일마저도 정성을 다해 기꺼이 하고 재물과 관련된 일도 정직하게 처리한다면 분명 주인은 그 종을 좀 더 책임 있는 자리에 앉히지 않겠는가? 그 주인도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라고 말할 것이다. 요셉의 주인 보디발은 요셉의 정직하고 신실하고 의로운 모습을 보고 시종에서 청지기로 임명한 것이다.

 

  요셉의 종살이 모습이 얼마나 모범적이었는지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으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남에게 잘 보이려고 눈가림으로 섬기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충성을 다하십시오. 무슨 일이나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이 정성껏 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으로 받게 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골로 3,22-24)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똑같은 일을 해도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의 수고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수고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첫째,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인간의 눈을 의식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독이나 상관이 볼 대에는 열심히 일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게으름을 부리거나 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있어 진정한 감독이나 상관은 매순간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들이 열과 성을 다해 일하는 것은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다.

  둘째,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의 수고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수고가 다른 것은 남모르는 상급을 희망하면서 가슴 설레어 일하기 때문이다. 그 상급이 비록 이 세상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 하늘 아버지 품에 안기는 날 반드시 주어질 상급이다.

  어떤 사람들은 월급이 많지 않은데 일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하면서 회사가 주는 만큼만 일하면 되지 그 이상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조금 전 읽어던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볼 것을 권하고 싶다.

 

  바오로는 무엇을 하든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하라고 한다. 그 권고는 노예들에게 한 것이었다. 바오로 당시 노예들의 처지는 참으로 비참했다. 그들은 내일을 알 수 없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일하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권고는 월급을 더 받기 전에는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도전이 될 것이다. 노예들에게 월급은 꿈을 꿀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무조건 참고 열심히 일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악조건에서 일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선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바오로가 말하려는 것은 일을 하는 우리의 근본적 자세이다.

 

  우리 중에는 현재 자기가 하는 일이 별 볼일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조금 전 읽었던 바오로의 권고는 도전이 될 것이다. 노예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이겠는가? 지극히 사소한 일들,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들이 아닌가? 하지만 바오로는 노예들에게 하느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권고하였다. 아무리 사소한 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면 더 이상 사소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 때문에 열과 성을 다해서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원한 상급을 바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