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나를 찾아서

김레지나 2011. 8. 28. 11:54

길들여지지 않는 남자

조금 낡았지만 신을 때마다 편안함을 느끼는 잘 길들인 10년쯤된 구두를 신고, 아직 데워지지 않은 새벽공기 속으로 나서며 또 하루를 시작한다. 더 빽빽하고 고르게 자라라고 누군가가 불을 당겼던 연못가 잔디밭은 옛날 까까머리 중학생의 흉터난 머리처럼 군데군데 뻘건 흙을 그대로 보이며 막 솟아오른 태양 빛에 간밤의 서리를 녹이고 있고, 젖을 떼기 위해 가운데 철조망을 경계로 어미와 떨어져서 따로 먹고 자는 새끼 강아지들은 아직 익숙지 않은 듯 최대한 어미 곁에 붙어 있으려고 마름모꼴 철조망사이로 자꾸 머리를 밀어 넣고 있다. 연신 자기 혀로 새끼들의 얼굴을 세수시키던 어미는 내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내 곁으로 와서 자세를 잡는다. 내가 철조망사이로 손을 넣고 그놈의 목덜미며, 주둥이, 이마를 만져주다가 마지막으로 “이거 수입고기 아니야” 하면서 제 입앞에 대주었더니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혓바닥으로 삭삭 소리내며 핥아 댄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나’를 담보로 맡기고 자유대신에 안정을 취하는데 만족하는 것이다.


겨우내 쌓였던 낙엽을 일부러 소리내어 밟고 지나가며 그 푹신한 쿠션을 느껴본다. 많이 닳아있어 세월을 가늠케 하는 나무계단을 한칸, 또 한칸 올라가면서 자꾸만 바빠지는 마음을 진정시켜보지만 어느새 발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저 앞 소나무 숲 속에 며칠 전부터 꽃망울이 맺혀있던 진달래가 ‘언제나 툭하고 꽃망울을 터뜨릴까’ 마음을 졸여가며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조금씩 조금씩 굵어져가는 진달래 꽃망울을, 어린 시절 밥상머리에 앉아 숟가락에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가며 자연시간에 배운 표면장력을 실험하던 때의 그 긴장감으로 내내 지켜봐왔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져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


아! 저 아래쪽에, 아직은 무거운 겨울빛깔들 속에 짙은 보라색 하나가 떠있었다.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이 나오고 시선은 그 보라빛으로 빨려 들어갔다. 드디어 제일 꼭대기의 한 송이가 오므리고 있던 꽃잎을 하늘을 향해 터뜨린 것이다. 그 아래에, 또 그 주위에는 수십, 수백 송이의 꽃망울들이 연달아 축포를 터뜨리려 한껏 부풀어 있었다. 아직도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흔들거리는 황톳빛의 밤나무 잎들 사이로 보이는 그 보랏빛 점들이 얼마나 앙증맞고 사랑스럽던지, ‘가끔 TV에서 막 분만한 아기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던 산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하고 한참을 신기해하면서 서있었다. 해마다 봐왔던 진달래건만 올해 이토록 특별한 기분을 맛보는 것은, 자기에 몰입하여 최고의 가치를 스스로 키워 가는 모습을 하루하루 지켜보며 내가 그 속에 담긴 듯 이제나저제나 꽃망울이 터뜨려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산에서 피는 꽃은 저 만치 혼자서 피어있네’라고 노래하던 시인의 마음이 되어, 온통 음산함으로 가득한 세상에 저만치 홀로 떨어져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야생의 진달래를 매일 아침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은총이었다. 사람들에 의해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제공받으면서 힘들여 돌밭에 뿌리내리지 않아도 언제든지 꽃을 피울 수 있고, 벌과 나비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부드러운 붓끝의 감촉만으로도 씨앗을 퍼뜨릴 수 있는 팔자 좋은 꽃이 아닌, 돌산 이곳 저곳에 무질서하게 자리잡고서 멋들어지게 휜 가지들을 모두 하늘 향해 벌리고 있는 야생 진달래에게서 당당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또 가끔씩 오고가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할 여유도 없이 오로지 새봄이 왔다는, 새 세상이 열렸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 사실 이는 내 느낌일 뿐 생존자체에 몰두해있는 진달래에게 무엇을 위해서라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 혼신의 정열을 다 기울여 얼어붙은 땅 밑에 뿌리 뻗어 양분을 얻어야만 했을 진달래에게서, 사람들 한 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던(루가4, 24-30)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들꽃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으리라.(마태6, 28-34)”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속한 사회와 문화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수고를 기울였던가?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벌어지는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웃들을 버려야만 했던가? 고통 중에 쓰러져가는 그 이웃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화려한 솔로몬이 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쏟아 왔던가? 그러나 저 돌산에 핀 야생 진달래만큼 자유롭지도, 당당하지도, 부끄럼 없이 하늘을 향해 손 뻗칠 수도 없는 나를 바라봐야만 하는 이 허탈감을 어찌하랴!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거룩한 자비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한평생을 왜 이다지도 다른 무엇들로 가득 채우려 했던가?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존재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여기 이 내 황량한 가슴에 꽃 한 송이 피워보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인연들에게 ‘나’를 맡기고 그들로부터 꽃으로 평가되기를 맘졸여 기다리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아찔해하는 순간 나는 차라리 살짝 터뜨려진 꽃잎 틈새사이로 빨려 들어가 야생 진달래가 되고 싶었다. 하물며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한 송이 꽃이 피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에 속해있는지,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가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만들어놓은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언제든지 그들이 원하는 때에, 온몸에 철심을 칭칭 감고서 하늘을 향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서 피어나는 향기 없는 화려한 꽃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유혹할 수 없다. 바람을 타고 천리, 만리를 날아 땅끝 어디에 떨어지더라도 그 곳 그 자리에서 힘들게 뿌리내리고 가지는 하늘 향해 뻗어 결국에는 새 세상을 알리는 향기 가득한 한 송이 들꽃이 되리라! 누구를 위한다는 폼나는 명분도, 사랑조차 버렸다는 허울좋은 감상도 필요 없이 무심하게, 모든 에너지를 모아 거저 받은 삶에다 되쏟아 붇고 마침내 꽃을 피운 뒤 벌, 나비 이웃들의 도움으로 씨앗을 탄생시키고는 바람에 실어 온 세상에 날려보내리라! 그리고 아무말 없이 지는 거다.


온몸이 투명해지는 듯한 맑고 후련한 평화 속에 터벅터벅 언덕길을 오르는데 맞은 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니 수녀님 두 분이 바쁜 걸음으로 산책을 하시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고 지나치는 순간 그 동안 마음에게 일거리를 다 내줬던 내 머리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멍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좀 모자라게 보이진 않았을까?” “묵상 중이었으니 굳이 어색한 인사를 건네지 않아도 됐을 것을......” “손을 빼고 걸었더라면 좀더 사내답게 보였을 텐데........” 맙소사! 그게 바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한계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유혹으로 다가오지 않는 색다른 차원에서의 사랑스러운 한계임을 나는 느꼈다. 그 동안 내가 무엇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었던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그 분의 즉각적인 자상함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는 두 갈래길에 서게 됐고, 얼마 동안의 침묵 뒤에 나는 으레 걸었던 평평한 길을 벗어나서 산 속으로 난 오솔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찾아서........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