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앞에서 비참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항암 치료를 받던 중에 ‘냉담’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성당에 나가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신앙인으로서 가까운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음을 통회했다는 내용입니다.
제 친구가 ‘냉담’을 시간 나면 읽어보려고 컴퓨터 바탕화면에 저장해놓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고등학교 다니는 친구 아들, 베드로가 그 글을 읽어보더니 “나는 이런 글 보면 화가 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만 하고... 사람이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산다는 거지?”하고 투덜대더랍니다.
베드로는 계명을 어기는 큰 잘못도 아닌 것을 쩔쩔매면서 통회하는 것은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주님은 왜 부족한 사람을 쓰실까?”와 같은 제 글들도 불편해했을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생인 베드로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겠다 싶어서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
냉담’이라는 글은 하느님께 혼나는 심정으로 주눅 들어 쓴 글은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했다는 이야기이지만, 그 바탕에는 그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깨닫게 되었음을 안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온 마음으로 깨달은 적이 없었다면, 그 사랑에 비추어 통회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지치지 않고 사랑해주시는데, 그에 비해 제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은 참 보잘 것 없고, 이웃을 향한 사랑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에, 저는 제 비참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철이 들어서야 비로소 우리의 부족함을,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까지 사랑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비참함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높이를 깨닫게 되면, 우리 비참함의 깊이를 함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비천함을 느끼는 깊이의 정도는 하느님 사랑의 높이를 깨닫는 정도에 비례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비참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낮아진 만큼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랑을 주시는 분 앞에서 비참한 존재임을 느낄 때에야, 그 전능과 사랑에 의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분명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감을 해치는 일이 아닙니다.
슬픈 일도 화낼 일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비참함을 고백하는 것은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며,
주님의 사랑을 그만큼 더 많이 깨달았다는 확인이며,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 4,17)라는 기도입니다.
저는 주님 앞에서 더욱 낮아져 제 비참함을 고백하는 은총을 더 받고 싶습니다.
비참한 자임을 인정하고 ‘나’를 비워낸 자리만큼
주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채워질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사람이다.”(루카 9,48), 아멘.
2011년 6월 29일 엉터리 김진아(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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