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반영억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김레지나 2011. 7. 14. 21:10

2011 7 9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10,24-33)

 

 

야곱이 하느님 말씀대로 요셉이 있는 곳에서 숨을 거둔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죽고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죄를 생각하고는 요셉이 자신들에게 보복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요셉은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전하며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한다(제1독서).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 안에 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주님께서 다 세어 두셨을 정도로 우리는 주님의 소중한 존재이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의 박해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아시는 주님이시다(복음). 

☆☆☆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찮은 참새도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땅에 떨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두려워합니다. 정체도 모르는 막연한 두려움에 열정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몰라도 되는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탓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아무리 짜증 내고 불평해도 마음속을 뚫어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의 어린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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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그분을 증언하는 길입니다. 세상은 경쟁하듯 불안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앞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외쳐 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께 맡겨야 아버지를 드러내는 삶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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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증언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앞날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인생은 본래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살다가 당신께 돌아오라며 맡기신 것이지요. 이제는 우리 삶에서 사는 것이 두렵다.’는 표현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사람이 두려운 세상입니다. 생명을 위협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짐승이나 자연재해가 무서웠지만 지금은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영화와 컴퓨터 게임에서 사람의 죽음을 너무 쉽게 다루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마저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의 목숨은 주님께서 좌우하십니다. 그분께 생명의 비밀과 열쇠가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그분의 뜻을 인간적 판단 기준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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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헤아려 두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생각하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라도 하느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나라든 교회든 또는 회사든 인재를 발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많은 일이 있습니다.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도다양합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많이 배운 사람도, 적게 배운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목의 양상도 다양합니다. 그때마다 필요한 사목자가 부족합니다. 많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선뜻 나서는 지원자가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반영억신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 9장 26절 이하를 보면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그가 어떻게 길에서 주님을 뵈었고 어떻게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역을 떠나 타르수스로 가야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을 보면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면서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를 팔아먹었던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창세49,19-21) 이렇듯 죄는 인간적인 무서움을 가져오지만 하느님을 경외함에서 오는 두려움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용서와 자비로 드러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말하였습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 일을 해 나가라. 두려워하지도 말고 당황하지도 마라. 주 하느님이신 나의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주님의 집에서 예배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1역대28,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하시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4,18) 세상의 것에 매이지 않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차지하는 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할 것은 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면 그것이 올가미가 되지만 주님을 신뢰하면 안전해집니다.”(잠언29,25)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