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0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9)
말씀 초대
유다 지도자들은 바오로를 불의하게 고발하지만 로마 총독 페스투스는 오히려 이 사건을 사리에 맞게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바오로는 로마 황제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로마로 압송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신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에 대한 사랑을 여러 번 고백하도록 하신 것은 사랑의 마음을 깊이 새겨 주시려는 것이다. 그것의 목적은 주님의 양들을 잘 돌보도록 하시려는 것이다(복음).
복음 묵상
몸의 구조는 보통, 음식을 오전에는 몸 밖으로 내어 보내고, 오후에는 섭취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갈수록 섭취가 많아지는 현실입니다. 자연히 배설에 신경 쓰는 사회로 바뀌고 있습니다. 배설을 잘해야 몸도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지 않은 것을 버릴수록 견실해지고, 끊을수록 강인해집니다.
‘상투스’(sanctus)는 라틴 말로 ‘거룩하다’라는 뜻입니다. 어원은 ‘끊다’라는 동사입니다. 끊고 절제해야 거룩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무를 분재하는 곳을 가 보면, 연한 가지를 철사로 묶어 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제멋대로 자라는 것을 막는 것이지요. 절제된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그만큼 사랑이 어렵다는 가르침입니다. 스승님께서는 베드로를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격정적인 성격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성격을 죽이라는 당부입니다. 맡겨진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삶’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원하지 않는 곳으로도 가야 한다.’ 베드로의 삶이 그렇게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이 들면 누구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노년이 됩니다.
사랑으로 받아 준다는 것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착하고 편안한 사람을 받아 주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까다롭고 귀찮은 사람을 애정으로 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의 참모습은 그때 드러납니다.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반영억라파엘신부-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좌절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배반을 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 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을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지난 밤 고해성사 때 신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가 되신지 얼마나 되셨지요?” 저는 ‘아직도 이 모양으로 사느냐?’ 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렇지만 “신부님, 기도하시면서 열심히 잘사세요!” 하시며 부탁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합니다. 지켜지지 못할 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질문하실 때마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입니다. 베드로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내 자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단체를 맡고 있는 사람은 ‘주님 사랑’을 어떤 형태로든 지녀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단체를 맡고 있더라도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날카로운 지적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대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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