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레지나의 묵상글

냉담

김레지나 2011. 5. 8. 00:18
  2006년 3월 26일 일요일  레지나의 일기


   친정 부모님이 다니시는 00동 성당으로 미사 드리러 갔다. 지금까지 많은 신부님들이 집전하시는 미사에 참례했지만 00동 신부님처럼 웃기시는 분은 처음이었다. 미사 통상문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사투리를 겁나게 많이 쓰시면서 배꼽을 잡게 하셨다. 하느님은 무섭고 엄하시기만 한 분이 아니고 개그맨보다 더 재밌으신 분이시라고도 말씀하셨다. 아마 신부님 당신이 재밌는 분이셔서 하느님도 재밌는 분이시라고 느끼시나 보다. 그런데 나는 미사시간 내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엉엉 울고 싶었는데 신부님이 하도 웃기시는 바람에 웃을까 울까 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미사를 참례했다.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머니 한 분을 보고 재작년에 돌아가신 시할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의 뒷모습이 돌아가신 시할머니와 똑같아서 무척 놀랐다.


   시할머니께서는 아흔이 거의 다 되어서 돌아가셨다. 결혼을 한 번 하셨었는데 아기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시고, 시부모님이 결혼하시기 바로 전에 시할아버지께 개가하셨다고 했다. 큰아버지는 딸을 여럿 두신 후에 아들을 늦게 얻으셨다. 한동안은 내 남편이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 대접을 받았다. 아들만 바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남편이 4살 때 완도에서 광주로 데려오셔서 남편이 중학교 다닐 때까지 키우셨다. 큰아버지도 광주로 오셔서 교편을 잡으셨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셨다. 남편은 어릴 적에 큰아버지 댁에서 사촌들과 같이 보냈기 때문에 큰아버지 가족들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시할아버지께서는 큰어머니가 첫 아들을 낳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병원에 손주를 보러 가셨다. 그런데 간호사가 실수로 “딸인데요“라고 잘못 알려 드리는 바람에 충격으로 쓰러지셔서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큰아버지는 할머니께서 혼자 되신 후로도 30년을 함께 사셨다.

   할머니 또한 당신이 돌보아 주신 손주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셨다. 할머니는 남편을 애틋하게 예뻐하셨다. “내가 00이를 어떻게 키웠는디. 00이가 어릴 적에 하도 음식을 안 먹어서 내가 꿀 한 숟갈씩 먹였어. 입이 짧아서 애를 많이 먹었다..... 광주로 이사 오기 전 완도에 있을 때 00이를 엄마한테 재우러 보냈는데 한 밤중에 우리 집으로 왔어야. 큰 일 날 뻔 했다.” 남편이 밤에 눈밭을 기어서 할머니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시어머님은 아기가 나간 줄도 모르고 주무셨다고 했다. 가슴을 쓸어내릴 얘기지만 남편이 갓난아기일 적부터 할머니께서 남편에게 사랑을 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시어머님의 낳은 정 보다는 시할머니의 기른 정이 더 고마운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언젠가 남편도 “내가 중학교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전부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5년, 여수에서 5년을 살았으니 할머니를 자주 찾아 뵐 수 없었다. 명절 때만 한 번씩 인사를 드렸을 뿐 잘해드리지 못했다.

  재작년에 시할머니께서 치매도 조금 있으시고 몸이 많이 약해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얼마 못 사실 것 같다고 해서 병원에 찾아갔다. 음식을 잘 못 드셔서 요구르트를 사서 드리고, 맛있는 것 사 드시라고 용돈을 조금 드렸다. 아이처럼 좋아하시더니 “내가 안 쓰고 두었다가 오는 사람들한테 우리 손주가 준 거라고 자랑해야겠다”고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친자식이 아닌 큰아버님께 오랜 세월 신세를 졌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셨는지 눈물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나 공밥 안 먹었다. 나 공밥 안 먹었다. 내가 어서 죽어야지.....” 할머니를 그날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평소에 건강하셨기 때문에 더 오래 병원에 계실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돌아가셨다.


   미사 중에 본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서라도 성체를 모시는 것이 정말로 보기 좋았고 부럽기 짝이 없었다.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대세라도 받으시게 할 걸, 할머니 앞에서 기도라도 해 드릴 걸. 남편에게는 할머니가 최고였다고, 고맙다고, 더 잘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꼭 좋은 곳에 가실 거라고 말씀드릴 걸.’하고 후회했다. ‘왜 내가 그 때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내가 냉담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짧게나마 돌아가시기 전후로 기도는 했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할머니 마음을 더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내가 냉담 중이 아니었더라면 가까운 성당의 봉사자들에게 연락을 해서라도 마음의 평화를 갖고 임종을 준비하시도록 도왔을 것이다. 좋은 일 하고 사셨으니 천국에 가시리라고 믿고 있지만 고통스러운 임종의 시간에 “나 공밥 안 먹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혼자 두느냐, 죽기가 두렵다.”라고 하셨을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집에 돌아와서 천주교 신자로서 긴 기간 동안 게으름을 피운 것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통회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는 응석받이처럼 떼를 자주 쓰는 편이다. 미사 빠진 것, 죄 지은 것도 하느님께서 용서 안하고는 못 배기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서 배짱을 부리곤 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 “오랫동안 성당을 안 나가서 벌을 받은 거야”, “좀 더 폼 나게 표현해서, ”하느님이 너를 이제 부르시려나 보다.“는 말을 몇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병에 걸리고 아쉬워져서야  하느님을 찾는 내 자신이 부끄럽긴 했지만 벌 받은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가 봐“라고 대답하면서도 별로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심각하게 후회되거나 죄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벌 받지 않기 위해서든, 내일 일은 모르니까 늘 깨어 있기 위해서든,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기 때문에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는 했다.

  하느님은 늦게 일하러 오는 사람이나 아침부터 일하러 오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한다. 하느님은 누구든지 죽기 직전에라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고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지 벌주시는 분은 아니다. 나는 하느님께 냉담한 것에 대해서 정말로 아픈 마음이 되어서 잘못했다고 빌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많이 울었다. 나의 냉담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간 중에 내가 신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주위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했고, 내가 열심한 신자였다면 도움이 되었을 많은 상황들을 지나쳐버렸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슴 아프게 후회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께 잘못한 것들보다 이웃에게 잘못했던 것들이 훨씬 더 마음에 걸렸다. 내가 아프게 되어서 지금부터라도 무심히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내가 신앙생활에서 냉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마음을 다하지 못하고 지내기가 쉽다. 그러다가 나처럼 큰 병을 얻은 후에야 가족과 이웃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아주 오래 살 수 있을 것처럼 ‘언젠가 잘해 줘야지, 언젠가 열심히 해야지, 언젠가 화해해야지’ 하고 생각할 뿐 정작 실천 못하기 일쑤다. 나도 병을 얻고서야 이웃을 대할 때 냉담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 깊이 결심했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신앙을 꼭 가질 것을 열심히 설득할 것이다.


  여자들의 평균 수명이 팔십이라고 하니, 다행히 병이 낫게 된다면 나는 이제 절반을 산 셈이다. 앞으로 인생을 절반이나 남겨 놓고 병을 얻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절반이나 되는 남은 인생 동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살고, 그 사랑을 알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절반이나 남은 인생 동안 내가 더 많이 남을 위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