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영진 신부님

☆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했다는 것 -몇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심 송영진 신부

김레지나 2011. 4. 29. 21:38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2011. 4. 26. 화)(요한 20,11-18)

 

<평소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가 ‘라뿌니!’ 하고 응답합니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 10장의 착한 목자에 관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3-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마리아가 기억해냈다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듣던 친숙한 음성을 알아듣고,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암!’이라는 아람어 이름으로 부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마리암’으로 부르신 것 같습니다.

‘라뿌니’도 아람어입니다.

마리아도 평소에 예수님을 ‘랍비’ 라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라뿌니’ 라는 아람어로 부른 것 같습니다.

평소에 듣던 그 음성, 그 말투를 기억해내고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양들이 아무나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목자가 불러야 따라갑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듣던 그 친숙하고 사랑 넘치는 음성을...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에는 왜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을까?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생각과

시신이 없어졌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고,

그렇게 묻는 남자가 정원지기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무서워했던 일(마태 14,26)과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름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 라는 뜻으로 ‘나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마리암!’ 하고 부르신 것은

‘나는 정원지기가 아니라

평소에 너를 마리암이라고 부르는 스승 예수다.’ 라는 뜻입니다.

 

어떻든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을 귀여겨듣고, 새겨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하고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 장면을 흔히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묵상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도 ‘평소에’ 하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다음에 새삼스럽게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평소에 늘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 그대로 무덤에 갔고, 시신을 찾았고, 울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마주쳤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몇몇 여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고,

예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우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만난 적도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개종시키셨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박해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라는 분을 믿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의 대화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그때 바오로 사도는 예수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비록 박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었겠지만

그는 평소에 늘 ‘예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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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계시를 받았다고 예언자 흉내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평소의 신앙생활이 불성실했던 사람에게 느닷없이 계시가 내리거나

성령의 특은이 내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느닷없이 어떤 체험을 하고 회개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평소에 잘해야 합니다.

평소에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편애하시거나 차별대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밝은 햇빛 속으로 나오면 눈을 뜰 수 없고,

빛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햇빛 속에서 제대로 눈을 뜨려면 평소에 햇빛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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