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2011. 4. 20. 수)(마태오 26,14-25)
<갈림길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제자들에게 중대한 갈림길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떠날 것인가, 살 길을 찾아서 예수님을 떠날 것인가?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했습니다(요한 13,37).
그 말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베드로가 그 말을 하기 전에 이미 떠나서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유다가 제자로 뽑힌 것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도 다른 제자들과 똑같은 권한과 임무를 받았고,
파견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도 다른 제자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흔들렸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차츰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흔들리다가
결국에는 자기 살 길을 찾아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살고 싶어서 떠났다면 혼자서 조용히 떠날 것이지 왜 배반을 하고 밀고를 했을까?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려면
확실하게 유대인들 편에 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무덤에서 살아나온 라자로도 죽이려고(요한 12,10) 했으니까
아마도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도 위험이 다가온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다 입장에서는 자기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 받기 위해서
예수님 배반을 선택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흔히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하는데,
유다의 경우는 시간을 두고 결심하고 계획하고 실행한 배반이지만,
베드로의 경우는 우발적인 일이었습니다.
유다의 경우는 믿음이 흔들리다가 그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고,
베드로의 경우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냥 겁에 질린 것입니다.
유다의 경우는 완전히 떠난 것이고, 베드로의 경우는 그냥 넘어진 것입니다.
유다의 경우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던 생명선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버린 것이고,
베드로의 경우는 연결 장치가 조금 고장 난 것입니다.
고장 난 것은 다시 고치면 됩니다.
베드로는 고장 난 것을 다시 고쳤고, 연결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끊어진 생명선을 다시 연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쉽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다시 연결할 수는 있습니다.
유다는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해버렸습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길이 더 좋은 길인지 안다면 당연히 그 길을 선택하겠지만,
그걸 알 수 없으니 망설이고, 정보를 수집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상담을 하고, 기도하고, 그러다가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최선이라고 판단하느냐? 그 판단 기준입니다.
“자기만” 사는 길이 최선의 길인가?
예수님의 겟세마니에서의 기도는 갈림길에서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뜻이 갈림길이 되어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를 망설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고,
이미 결심한 것을 좀 더 확실하게 굳히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그 갈림길에서 최선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길은 당신 자신을 죽이고 모두를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순교자들은 예수님 뒤를 따르는 길을 선택한 분들입니다.
(그 길이 사실은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유다는 남을 죽이고 자기 자신만 사는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갈림길은 늘 양자택일로 다가옵니다.
중립도 없고, 제3의 길도 없습니다. (항상 그렇게 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자기만 사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정답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제 상황에서 실천할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건 각자의 숙제입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자기 혼자서만 살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기는 죽어도 다른 사람은 살리려고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옛날 위인전과 성인전을 읽게 하는 것은
자기는 죽어도 다른 사람은 살리려고 한 위인들과 성인들을 본받으라는 뜻인데......
지금 세상의 모습을 보면,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더 위인전과 성인전을 읽고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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