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월요일 - 참된 자유인으로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남
어떤 신부님의 강의 테이프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자매님의 이야기인데 저는 그런 일도 있나 싶었습니다.
그 자매의 남편은 술, 도박, 여자, 구타 등 온갖 안 좋은 것은 다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얼마나 때리는지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어떤 때는 목숨까지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신앙의 힘으로 참아오고 있었는데 한 번은 임신한 아내를 구타하여 아이가 유산되었습니다. 배를 얼마나 때렸는지 아이가 나왔는데 아이의 온 몸이 검게 멍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타한 이유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믿지 못할 인간이기에 남까지 의심하는 의처증까지 생긴 것입니다.
그 자매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해외 모 성모님 성지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 성지에서 기도하다가 문득, 남편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만 생각해 왔는데 자신도 남편을 많이 무시하며 살았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남편을 용서하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용서는 정말 은총입니다. 은총이 없으면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때도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라고 하시듯이 성령님만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 자매는 성지순례에서 성령님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용서 못하는 육적 인간에서 용서 할 수 있는 영적 인간으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을 용서할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편이 공항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회개한 것은 자신인데 남편까지 회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신이 잘못을 뉘우치고 술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부부는 매일 함께 기도하는 성가정이 되었습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은 미움으로, 한 사람은 죄로 종살이 하던 몸이었지만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 자신들이 만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고 하시며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니코데모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반문합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인한 새로 태어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위의 자매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났고 미움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얻게 되는 참 자유입니다.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청년들에게 신학교나 수녀원에 들어가라고 하면 많은 경우에 그들은 “거긴 규율이 있잖아요. 전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하고 말합니다. 이들은 아직 성령으로 태어나는 참다운 자유를 알지 못합니다. 참된 자유는 육이 아니라 영의 자유입니다.
제가 직접 증언을 들은 마약 중독자도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치유 공동체에 들어오기를 거부하였었습니다. 그 사람은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런 규율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 안에 갇힌 것이고 마약의 노예생활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그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참다운 자유란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서 육체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새로 태어난 이의 자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우리는 매일매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합니다. 그렇게 영이 육을 이기게 될 때 더 자유로워지고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새는 한 가닥 얇은 줄에 발이 묶여 있어도 날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 발을 묶고 있는 육적인 집착들을 성령의 칼로 끊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무엇을 끊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성령의 은혜로 또 하나 끊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결심합시다.
<<짧은 묵상>>
성경에는 ‘성령의 인도로’란 구절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별히 구약에선 엘리야가 성령의 인도로 떠났다가 돌아왔다를 반복합니다. 결국 그는 성령의 불마차에 들어올려져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도행전에서 필립보도 성령의 인도로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큼 전 생애를 성령의 인도로 사신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서 사탄으로부터 유혹받도록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이겨냅니다.
이는 성령님만이 인간의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해 주실 분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갈라 5,16)라고 하시며 성령님만이 육체를 이기게 하여 참으로 자신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안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라는 말은 결국 성령의 힘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고, 성령만이 육체의 종살이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참다운 에너지이고 힘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사는 것이 어쩌면 자신을 속박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면 그 바람은 우리를 천상 나라로 이끌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깁시다. 그러면 마치 연처럼 하늘을 나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을 자유의 나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전삼용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짐으로써 시작된다. (0) | 2010.04.24 |
---|---|
해산의 고통 (0) | 2010.04.24 |
예수님도 교회에 순종하신다. (0) | 2010.04.11 |
☆ 특별은총과 교회 (0) | 2010.04.11 |
신앙이란 무릎 꿇는 것 (0) | 2010.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