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해산의 고통

김레지나 2010. 4. 24. 16:40

부활 2주간 화요일 - 해산의 고통

 


 

생명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피를 흘려야합니다.

예수님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죽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생명의 열매를 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기 위해서도 고통을 당하고 피를 흘립니다. 제왕절개를 해도 마취가 깰 때 많은 아픔을 겪는다고 합니다. 고통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도 그랬습니다. 성모님과 요셉의 고통을 비롯하여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많은 아이들이 헤로데에 의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모세가 태어날 때도 파라오에 의해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도 필연적으로 많은 피가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탄생하면서부터 스테파노를 시작으로 많은 박해와 순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세계 도처에 순교자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 니코데모는 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겠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말씀보다도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즉, 새로 태어남은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죄가 씻겨지고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세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피와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성모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는 당신과 함께 성모님도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성모님은 보이지 않게, 두 분이 하나 되시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새로운 세대의 아담이 되고 성모님은 하와가 됩니다.

이 두 분의 실제적 피 흘림과 숨겨진 해산의 고통으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주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이야기 들어주고 사죄경만 해 주면 될 것 같지만 죄지은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자주 들어도 실증이 나는데 안 좋은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따라서 판공성사 때는 신부님들이 초죽음이 됩니다.

그러나 그 초죽음으로 신자들이 새로 태어나 평화와 기쁨을 얻어 고해소를 나가는 것을 보면 모든 수고가 보람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새 생명을 주는 유일한 공식입니다. 나의 생명을 짜내어 상대를 살리는 것입니다.

 

한 번은 성지순례단과 함께 해외성지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고민들을 가진 신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저만 팔팔하고 그 분들은 매우 힘들어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저만 초췌해지고 신자분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미사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해성사 해 주고 하면서 저는 힘들었지만 신자들은 그것을 통해 힘을 얻고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 달라진 모습들을 보니 몸은 힘들어도 내적인 즐거움은 컸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죽여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짧은 묵상>>

어제는 샤워젤이 다 떨어졌습니다. 간신히 두들겨서 나오는 아주 조금의 양으로 샤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누나 샴푸도 마찬가지지만 이것들은 자신을 소멸시켜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니코데모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높이 달리셔야 한다며 당신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리는 에너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분의 죽음으로 성령이 오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써 주위를 밝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영 어둠 속에서 죽음을 무서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통하여 여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는 결국 빛과 함께 있다가 밤에 예수님을 배반하러 나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음에도 우리 자신이 그 은총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분의 죽음이 헛되고,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있건, 눈을 감고 있건 초는 자신의 죽음으로 주위를 밝힙니다. 우리의 희생이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빛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 죽음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결국 죽음 자체는 나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com/30jose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