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기다리는 건 입술로만 “아멘”이 아닌 삶을 통한 대답
안중근은 더 많은 생명 구하려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죠
사랑 위에 서있는 정의가 진짜 의로움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의로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로는 ‘체다카(Tzedakah)’다. ‘어떤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모호하다. 기독교에서 그 기준은 뭔가.
“시대마다 달랐다. 아브라함에겐 ‘네 양심에 충실했느냐’였다. 모세 때는 ‘십계명’이었다. 십계명을 잘 지켰는지가 의로운가, 아닌가의 기준이었다. 십계명의 알맹이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나중에는 그게 쏙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선 십계명의 껍데기로만 기준을 재는 율법주의가 판을 쳤다. 그걸 예수님께서 뒤집었다.”
-어떻게 뒤집었나.
“‘사랑’으로 뒤집었다. 그건 격식을 파괴하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의로움의 잣대로 ‘사랑’을 명시했다.”
-사랑이 깔린 의로움. 그럼 뭐가 달라지나.
“격이 달라진다. 격이 낮은 의로움은 날카롭고 차갑다. 그건 상대방을 비판하고 단죄한다. 그러나 격이 높은 의로움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상대방을 안아서 녹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허공에다 정의를 외치고, 후자는 눈물로 사랑을 산다.”
-오늘날 얘기로 풀어달라.
“안중근 의사를 보라. 그는 독립운동 근거지가 탄로날 우려가 있음에도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적이 있다. 그리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고 말했다. 그에겐 하나의 생명도 아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던 거다. 안 의사는 그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의 주춧돌 위에 선 정의, 그게 진정한 의로움이다.”
-거창하다. 의로움은 투사의 덕목인가.
“아니다. 의로움(정의)은 투사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다. 이름 없는 소시민도 삶의 뒤안길에서 주워 올릴 수 있는 참 행복의 비밀이기도 하다.”
2000년 전 이스라엘 갈릴리의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다. 그림은 원로화가인 김정자 마리스텔라의 ‘산상수훈’. [김정자 마리스텔라 제공] | |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가 뭔가.
“히브리어로 ‘케세드(Chesed)’다. 이건 굉장히 풍요롭고 심오한 단어다. ‘케세드’는 동정이나 측은지심 등 공감 능력을 뜻한다.”
-쉽게 설명해 달라.
“암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갈수록 성격이 난폭해졌다. 가족은 물론 병원의 전문 상담가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아는 동네 꼬마가 병문안을 왔다. 병실에 들어간 꼬마는 30분 뒤에 나왔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할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과 편안하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가족이 꼬마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니?’ 꼬마가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우시기에 따라서 같이 울었을 뿐이에요.’ 그게 바로 아이가 건넨 자비였다.”
- 그게 왜 자비가 되나.
“상대방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됐으니까. 그렇게 상대와 내가 통했으니까. 예수님이 일생을 통해서 구원 활동을 했던 동기가 뭐겠는가. 바로 자비심 때문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왜 자비를 입게 되나.
“자비는 남는 장사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하늘에서 더 큰 자비가 쏟아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자비는 선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자비가 영적으로 발휘되면 죄에 대한 용서가 되고, 물질적으로 발휘되면 자선이 된다.”
-생활 속에선 어떻게 적용하나.
“‘남을 심판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딱 이 세 마디를 실행하는 거다.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할 때 학장 신부님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학교에 몸담고 있어 자선을 베풀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운전을 할 때라도 자선을 하자는 생각으로 계속 양보 운전을 한다.’ 생활 속 자선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그 말이 그 말 같다. 깨끗함이 뭔가.
“그리스어로는 ‘카타로스(Katharos)’다. 잡티가 없는 순수함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은 ‘카타르시스(katharsis)’의 어원과 같다.”
-어원이 같다는 건.
“카타르시스는 씻겨냄 뒤에 오는 거다. ‘카타로스’도 마찬가지다. 눈물로 씻어내고, 회개로 씻어내는 거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보며 씻어낸다. 예수의 삶을 묵상하며 자신을 씻는다. 그렇게 씻어낸 뒤에야 마음이 깨끗해지는 거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현대인은 정신 없이 바쁘다. ‘씻어냄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이탈리아의 영성가 카를로 카레토가 이 물음에 답을 던진 바 있다. ‘당신이 만약 사막에 갈 수 없다면 당신의 생활 가운데 사막을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침묵과 기도를 하라. 그렇게 영혼을 재건하기 위한 고독을 찾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영성 생활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고 했다. 정말 보는 건가.
“그건 3차원적인 언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꿈에서 하느님을 봤다’‘환시를 통해 하느님을 봤다.’ 그런데 그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낮은 수준이고, 가장 위험한 수준이다. 형상이 없는 하느님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통함’의 의미가 된다.”
-통한다는 게 뭔가.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서로에게 거할 때 통하는 거다. 그때 안테나의 주파수가 맞는 거다. 마음이 깨끗할수록 안테나의 감도도 좋아진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잡음 없이 하느님의 마음을 수신하는 거다. 그게 통함이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평화가 뭔가.
“그리스어로 ‘에이레네(Eirene)’,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다. 죄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는 요즘 평화롭다고, 문제가 없다고.
“그건 주로 세상이 주는 평화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박해가 없을 때, 냉장고가 가득 찼을 때, 생활에 골칫거리가 없을 때 평화롭다고 느낀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화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박해를 받을 때도 평화롭고, 냉장고가 비었을 때도 평화롭고, 생활에 문제가 있을 때도 평화롭다. 예수님은 그런 평화를 말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때 쓰인 ‘안식’이 그리스어로 ‘에이레네(평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참 평화는 풍랑 속에서, 전쟁터에서, 역경의 한복판에서도 누리는 평화다.”
-어떡해야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나.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내 안의 상처, 내 안의 허물을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는 거다. ‘사랑해!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수용하고 사랑하면 화해가 이뤄진다. 그 다음에는 사람과, 또 자연과 평화를 이루는 거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순교’를 떠올리지 싶다.
“이 구절은 팔복의 절정에 해당한다. 여기서 핵심은 순교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의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가 없다.”
-박해를 받는데 왜 행복한가.
“그건 역설적인 행복의 비밀이다. 박해 받음의 상징은 십자가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은 ‘돌팔이 메시아’라고 했고, 그리스인은 ‘어리석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십자가에서 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봤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봤다. ”
- 그건 대체 어떤 힘인가.
“몰아(沒我)적인 사랑에서 뿜어져 나온, 죽음도 이기는 힘이다. 결국 시련과 고통, 박해를 이기는 건 사랑의 힘이다.”
-하늘나라가 왜 그들의 것이 되나.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다. 그 중에 왜 사랑이 제일인가. 믿음과 소망은 완성된 후에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완성된 후에도 영원히 지속된다. 결국 셋 중 사랑만 남는다. 사랑은 하늘나라의 속성이다.”
인터뷰 말미에 차 신부는 성서 속 일화를 하나 꺼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가서 추수를 하라’고 말했다. 한 아들은 ‘네!’ 대답만 하고 추수를 하지 않았다. 다른 아들은 대답 없이 가서 추수를 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느냐?’”
예수의 물음은 지금도 계속된다고 했다. “‘너, 나를 믿느냐? 너, 나를 따르느냐?’ 우리는 이 물음에 ‘아멘!’하고 입술로만 대답한다. 그래서 ‘이름만 그리스도인,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고 만다.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건 입술을 통한 대답이 아니라 삶을 통한 대답이다. 그 구체적인 대답의 지침서가 바로 산상수훈의 팔복이다.”
백성호 기자
▶ 차동엽 신부에게 ‘산상수훈 팔복’을 묻다 <상>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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