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공심판, 사심판

김레지나 2009. 9. 5. 20:42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죽음 그 이후에 대한 희망


일 년 전 하느님 품으로 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임종 시 남긴 말은 오늘 우리에게
크게 위안이 되고 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 자 우리 다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
교황 요한 23세의 임종유언 역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이제 나의 여행 채비는 다 되었다.”
이렇듯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종말의 때를
기다린다.
스물여섯의 한창 나이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는 죽음 앞에서도 오히려 신자들에게 의연한
믿음을 당부하는 대범함을 보이셨다.
“…모든 세상일을 생각하여 보면 실로 허무한 것뿐이고 슬픈 것뿐이외다. 만약 우리들이
이러한 거칠고 허무한 세상에 있어서 자기의 조물주이시며 다시없는 천주를 깨달아 알지 못
한다면 어찌 난 보람이 있으리오. 오직 우리들은 천주의 은혜로써 이 세상에 나고 다시 큰
은혜로써 성세를 받고 성교회의 한 사람이 되어 귀여운 이름을 받들고 있는 것이오나 그러
나 그에 어울릴 만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이름만이 무슨 쓸 데가 있으리오… (중략) …
재앙에 겁내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천주를 섬기는 데서 물러나지 말고, 오로지 성인들
의 자취를 밟아서 성교회의 영광을 늘이고, 주의 충실한 병사이며 참된 시민임을 증명하여
주시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처럼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게 하였을까? 그것은 죽음 이후의 삶
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소위 심판이라는 것
사람이 죽음으로써 인생이라는 ‘시험 기간’은 끝이 난다. 그리고는 심판과 더불어 응보(應
報)의 ‘영원’이 시작된다. 심판에 대한 신앙은 구약 시대부터 있었다. “주님께는 마지막 날
각자의 행실대로 보상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집회 11,26).
신약성서는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주
로 이야기하지만, ‘각자가 죽은 뒤’ 곧바로 자신의 행실과 믿음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는 것도 반복하여 천명한다. 이를 근거로 해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심판에는 공심판과 사심판
이 있다고 가르친다.


공심판
공심판(公審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마지막 날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포함
한 온 인류가 받게 되는 ‘최후의 심판’이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
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마태오 복음 25장의 진술도 마지막 때에 마치 목자가 ‘염소’와 ‘양’을 가르듯이 ‘악인’과
‘의인’을 가를 것임을 말해 준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선인과 악인을 갈라놓는 이 공심판
을 통해서 실현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정의(正義)를 실천에 옮기며 살아온 사람들은 하
느님 나라에 결정적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될 것이다.


사심판
사심판(私審判)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 앞에 설 때 개인적으로 받는 심판을 말한
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
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고린 5,10).
각 사람은 죽자마자 사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로마서 2장은 그 기준에 대해서 말해준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3가지 기준을 단계적으
로 제시한다.
첫번째 기준은 ‘양심’이다. 이는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
하기도 하면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드러날 것입니다”(로마 2,16).
두번째 기준은 ‘율법’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모르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율법
을 모르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들은 누
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2,12).
종교간 대화와 교회일치운동이 요청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율법’의 범주에 세계의 현자
들이 가르친 계율, 각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합의된 규율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관점이다.
세번째 기준은 ‘믿음’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이후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
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22).
우리는 이들 사이에 등급이 있음을 보게 된다.
‘양심’이라는 기준은 주관적이고 그 기준을 통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래도 가책을
느끼고 저래도 가책을 느끼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이다.
‘율법’이라는 기준은 객관적이고 분명해서 양심보다는 통과하기가 쉽다. 그러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율법으로 ‘의인’ 인정을 받는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기준은 ‘양심’과 ‘율법’이라는 기준보다 수월하다. 마음을 열고 받아
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good news: 복음)인 것이다. ‘믿음’을 버리
고 ‘율법’이나 ‘양심’의 기준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미련하고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 심판의 결과에 따라서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늘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고 가톨릭교회는 믿는다. 바로 지옥, 연옥, 천국행이 결정된
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