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유다여, 유다여 -- 차동엽신부님

김레지나 2009. 6. 20. 09:08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차동엽 신부님

 

유다여, 유다여
묻고 싶다. 아니 위로하고 싶다.

유다여, 유다여

어쩌다가 당신은 면면이 이어온 배달겨레의 자존심을 잃어버렸습니까
어쩌다가 당신은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습니까

어쩌다가 당신은 혈육간의 인륜마저 저버렸습니까

어언 50년이 훌쩍 지났어도,
후예들의 가슴은 찢어집니다.

바라보는 심정은 안타깝습니다.

즉시 청산하지 못하고
진작 시효(時效)가 지난 오늘에야

당신들의 해골을 모아놓고
당신들이 끔찍이 여기던 ‘내 새끼’들을 볼모삼아

공과(功過)를 따져야 하는
저 지각 연출이 원망스럽습니다.

유다여, 유다여
왜 그랬습니까.

그들이나, 저들이나, 우리들이나
괴롭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묻고 싶다. 아니 위로하고 싶다.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또 묻고 싶다. 아니 촉구하고 싶다.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표심을 따라, 공천가능성을 따라, 기회를 따라
당적을 옮긴 의원님들이 던질 것인가

복지부동, 수뢰, 직권남용으로
얼룩진 공무원님들이 던질 것인가

정권의 대세가 기우는 대로, 이권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현령비현령의 칼을 휘두른 검찰님들이 던질 것인가

지조보다, 신의보다, 진실보다
생존(生存)의 윤리를 더 귀히 여기는 우리네 소시민이 던질 것인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요한 8,7)하였거늘,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혹시라도 무고한 생명이 다치지 않을까
밤잠을 설칠 수 있는 자만이
그 고역을 맡으라.

설령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그 악역이 주어지거든,
먼저 목욕재계하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괴로워하는 양심을 청하며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모으라.

도대체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정녕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또 묻고 싶다. 아니 촉구하고 싶다.




그를 우리는 유다스 이스가리옷(Judas Iscariot)이라 부른다.
우리말로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악명이 높은 인물 중 하나에 속한다. 성서에 기록된 그의 신상정보는 다음과 같다.

가리옷 시몬의 아들(요한6:7)/ 12 사도 가운데 언제나 맨 끝에 등장함
(마태10,4; 마르 3,19; 루가 6,16)/ 회계를 맡아 보았음(요한 12,6; 13,29)/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에게 불평하였음(요한12,4)/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일도 있음(마태 10,1; 루가 9,1)….

역사는 이 유다를 ‘악마’(요한 6,70), ‘도둑’(요한 12,6), ‘배반자’(마태 27,3)로
낙인찍고 있다. 그가 왜 예수를 배반하였는지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배반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되고 있는 일화로서 베다니아에서 있었던
일이 유명하다. 마르타가 시중들고 있던 사이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이것을 본 유다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요한 12,5)


이어지는 대목에는 그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도둑’이어서
그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6절)는 토가 달려있다.

이를 근거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다가 단순히 욕심이 많고 부정직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를 배반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인 상상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들은 경제적ㆍ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가 예수님에게서 크게 실망을
느끼고 예수님을 거짓메시아로 속단하여 그랬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요컨대, 여러 문학작품과 영화들 속에서 유다는 한편 매우 사악하고
부정직한 탐욕자로, 다른 한편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그려지고 있다.

여하튼 짐작은 이쯤에서 머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시쳇말로 지나친 억측은 유다를 두 번 죽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떤 명분에서였건 유다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요한 13,27) 스승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마태 26,15)에 팔아넘겼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제 정신으로 돌아온
유다는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면서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찾아가 은전 서른 닢을 돌려주며 일을 원점으로 되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마태27,3-5과 사도1,18-19이 서로 다르게 묘사하고 있지만
그가 곧 비극적으로 횡사(橫死)했다는 사실과 은전 서른 닢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그 밭이 훗날 ‘피의 밭’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일치한다.





회한의 노래


미련을 품는다. 아니 희망을 품는다.
유다는 뉘우치며 고백했다.

‘없었던 일로 합시다, 그건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들이 거절하자 유다는 절망하였다.

그리고 유다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마태26,24)
더 좋았을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유다의 죽음은 애처롭다.
유다의 잘못은 배반보다도 자책에 있었다.

그는‘자아’의 늪에 갇혀 있었다.
그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의 죽음은 ‘스스로’가 초래한 비운이었다.
유다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처연하다.

유다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경종(警鐘)이다.
진짜를 보지 못하고 가짜를 탐욕하는 우리,

잇속에 눈멀어 제 꾀에 넘어가는 우리,
매양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헛 약은 우리,

바로 우리를 위한 스캔들이다.
유다의 죽음은 준열(峻烈)한 가르침이다.

이 시대의 유다들, 유다의 후예들을 위한 일침이다.
면목이 없기로는 더할 나위 없었을 베드로를 보라는,

자기심판의 눈물 너머 회개의 눈물을 흘리라는,
벌이 아닌 자비의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피의 밭’으로가 아니라 기회의 벌판으로 향하라는,
내일의 유다들을 위한 뼈아픈 교훈이다.

‘혹여’의 토 달린 쓰라린 초대이다.
미련을 품는다. 아니 희망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