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엄마 하느님 - 차동엽신부님

김레지나 2009. 3. 26. 20:42

 "엄마 하느님 "


부성과 모성을 함께 지닌 그분

                                                         차동엽 신부님


 얼마 전에 개봉되었던 영화 '말아톤'이 수백만 관중을 동원하며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정신지체를 안고 사는 실존 인물 배형진군을 소재로 하여 마라톤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행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주고 있다고 들었다. 배우 이미숙이 배역을 맡아 열연한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이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고 들었다.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찡했다.


 이런 모성애가 어디 배형진군 어머니에게만 있는 것이랴. 얼마전에는 뇌 없이 태어난 아이를 헌신적으로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TV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 얼굴은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그 표정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사랑의 거룩함과 엄위로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렇다. 모성애는 무조건적이다. 가이없다. 신성하기까지 하다. 도대체 이 위대한 사랑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신앙인인 우리는 그 근원이 하느님 사랑이라고 믿는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모성애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성애를 화폭에 담아 보려고 고뇌했던 화가가 있었다. 바로 '빛과 어둠을 훔친 작가'로 불리는 렘브란트였다. 그는 그 유명한 그림 '돌아온 탕자'에서 이러한 고뇌를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그림을 그려 명작들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이 작품은 그가 성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안아주는 아버지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아들 등에 얹혀 있는 두 손을 서로 다르게 그렸다.

한 손은 크고 힘센 아버지 손으로, 다른 한 손은 부드러운 어머니 손으로 그렸다.


 왜 그랬을까? 모르긴 몰라도 루가 15,1-32 비유 말씀 속에 '아버지'만 등장하고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에 걸렸던 듯싶다. 필경 그는 물었을 것이다.

"왜 이 비유 말씀에서 어머니 얘기는 빠졌을까? 하느님은 부성애뿐만 아니라 모성애도 지니고 계신 분이 아닌가?"

보통은 '아버지'보다도 더 마음 졸이고 더 가슴 졸이며 아들의 고충을 헤아리는 것이 모정(母情)이다. 렘브란트는 하느님께서 이런 모성애를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부를 수는 없을까?

성서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꼭 '어머니'와 대칭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부성적(父性的)이면서, 동시에 모성적(母性的)이시다. 그래서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의 부성은 또한 모성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내재성과,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 사이의 친밀성에 더 주목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의 언어도 부모들에 대한 인간적 경험에서 도움을 얻는다"(239항).

 하느님의 부성적 표상이 보호자의 특성을 부각시킨다고 한다면, 모성적 표상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하느님의 친밀성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해 준다.


이런 하느님의 모성애를 나타내는 표현들을 우리는 성서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라하힘'이라는 단어가 자궁 또는 모태를 뜻하는 '레헴'에서 왔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느님 자비심은 아이를 잉태한 여성의 '자궁'처럼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돌보는 모성애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 몸을 이루고 생명의 피를 공급하는 '모태'와 같은 것이 하느님 자비라는 것이다.


 둘째, 야훼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모성애에 비유하여 표현하신다.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어미의 자식 사랑보다 더 애틋한 것이 야훼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셋째,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이 아이를 양육하는 어미의 애간장 녹는 모정에 비유되고 있다.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죽을 것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 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만들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호세 11,3-4. 8).


 요컨대, 하느님은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이기도 하시다.

하느님은 '어버이'시다.


 하느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할 때, 간혹 이런 물음이 생길 수 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못난 나를 사랑하시는가?" 답은 간단하다.

은총이다. 부모가 부모이기에 무조건 자녀를 사랑하듯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이기에 사랑하신다. 내가 그 사랑을 받을 만한 무언가를 했기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기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좋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잘났기 때문에, 좋은 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효도를 잘하기 때문에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랑한다.

하느님도 이처럼 거저 사랑하신다. 그분 사랑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은총이란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이 귀중한 것이지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 세상에는 가치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 선남선녀들이 주고받는 사랑이 대체로 그렇다. 잘나서, 돈이 많아서, 직장이 좋아서, 학벌이 좋아서, 얼굴이 예뻐서….


 어떤 것은 사랑받기에 가치가 있다.

이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스럽지 않은 자를 사랑하심으로써

 나를 사랑스러운 자로 만들어 주셨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받기에 누구나 예외없이 가치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가치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가치있습니다" 라고. 

                        -  차동엽 신부님 - 가톨릭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