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성경 묵상

십자가상 칠언 중 세번째 말씀에 대한 묵상 -풀톤 쉰

김레지나 2008. 8. 28. 22:25

 2007년 엉터리 레지나의 메모

성경공부 첫 시간의 강의를 듣고, “아, 올 한 해 동안 아기가 엄마의 사랑을 알게 되듯,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겠구나.”하는 기대로 마음이 설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한 민족을 통해, 또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셨다는데, 그 사랑의 역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요. ‘성경책 한 번도 통독해보지 못한 엉터리신자’라는 딱지를 올해야말로 떼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문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어머니를 내어주신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완결되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시고, 우리에게 엄마를 주신 하느님의 그 사랑에 한참을 울먹였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실 때부터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보이시려는 계획이 너무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통 중에도 인류를 걱정하시고 엄마를 내어주신 하느님의 그 사랑, 그 고마운 뜻을 묵상하면서 눈물 외의 어떤 것으로 답할 수 있겠습니까? 김양진 선생님 강의 중에 “사랑에 빠지면 상대를 더 많이 알고 싶어하듯....”이라는 말씀이 가슴 속에 살아서 움직인 탓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극심한 고통 중에도 온 인류를 위해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당신 모습 그대로를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하기에, 사랑하지 못하기에,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니 그런 고통쯤이야’라고 쉽게 생각하여 당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까 봐, 고통 속에서 아들을 지켜보고 계시는 그 아픈 성모님을 우리에게 엄마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참아야했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가장 훌륭한 사랑의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은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고통을 감수한 사랑이겠지요. 그 사랑이야말로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들도 감히 고통 중에 하느님과 이웃을 훌륭하게 사랑할 수 있지요. 서로 좋은 것만 줄 수 있으니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면 가치 있는 사랑, 훌륭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훌륭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통을 통해 값지고 훌륭한 사랑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존재들이기에 천사들도 우리 인간들이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한다지요.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된 우리 어머니, 엄마, 성모님을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지요?

“하느님, 우리에게 엄마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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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그 분을 자기 집에다 모셨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 25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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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십자가상의 칠언 중 세 번째 말씀에 대한 쉰주교님의 묵상.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P594-586 (풀톤 쉰 지음. 성요셉 출판사) -


십자가상에서 주님의 세 번째 말씀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던 것과 똑같은 말을 담고 있다. 어머니가 당황하는 주인을 위해 손님들에게 줄 술이 없다고 간단한 기도를 하자 주님은 “여인이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 주님은 항상 당신 수난과 죽음에 대해 “때” 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

우리들의 말로 풀어본다면 가나에서 주님은 자기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부탁은 나에게 나의 신성을 선포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나타나 나의 일과 기적으로 나의 신성을 입증하라는 말씀이란 것 알고 계십니까? 내가 이 일을 하자마나 나는 십자가로 나가는 왕도를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진다면 그것은 갈바리아 산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나의 때를 앞당기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십자가를 향햐 나가기를 진정 바라십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의 관계는 달라집니다. 당신은 지금 나의 어머니십니다. 당신은 이 조그만 마을 어디서나 예수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의 구세주로 나타나 구원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당신의 역할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일단 내가 인류를 구원하게 되면 당신은 나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내가 구원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인류의 머리입니다. 내가 인류 전체를 구하지마라 머리의 어머니신 당신께서는 또한 나의 신비체 즉 교회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보편적인 어머니가 되실 것이며, 내가 새로운 아담인 것처럼 새로운 이브가 될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당신의 역할을 나타내기 위해 나는 당신에게 전세계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사탄에게 너와 여인 사이에, 너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원수를 맺어 주겠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당신을 말한 것입니다. 바로 그 여인의 후손이 납니다. 나는 이제 위대한 여인이라는 칭호를 당신에게 부여하여 기립니다. 나의 때가 왔을 때, 상처 입은 독수리처럼 내가 십자가 위에 양팔이 펼쳐진 채 매달려 있을 때 당신에게 다시 이 칭호를 부여하여 기릴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구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 것은 곧 내 것입니다. 이 시간부터 우리는 마리아와 예수가 아니라 새로운 아담이요, 새로운 하와로써, 새로운 인류를 출발시키며 죄의 물을 생명의 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제가 십자가를 앞당겨지고 갈바리아 산에 가기를 바라십니까?”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기적을 요구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마리아가 자신을 죽음으로 내보내고자 하는지 묻도 계신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당신의 신성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며, 당신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면 언젠가 포도주가 피로 변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 후 삼년이 흘렀다. 이제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십자가에서 내려다보신다. 즉 요한과 당신 어머니시다. 주님은 가나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취하시어 결혼잔치 때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두 번째의 수태고지였다. 먼지 가득한 눈과 가시관을 쓴 머리를 움직이며 주님은 기꺼이 당신을 십자기로 보내시고 이제 십자가 �에 구원의 협력자고 서 계시는 어머니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인이여, 이는 당신 아들입니다. ” 주님은 그를 요한이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만일 요한이라고 부르셨다면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익명으로 불렀기 때문에 요한은 온 인류를 대표한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 이 사람이 너의 어머니시다. ”

마침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머니께서 “첫 아이”를 구유에 뉘이셨다고 하는 복음서의 육화라는 신비로운 표현에 대한 답변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첫 아이라는 이 표현은 마리아께서 또 다른 자식이 있었다는 말일까? 물론 그런 뜻이다. 그러나 육체에 의한 자식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의한 다른 자녀들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구유에서 가나까지의 기간이고, 두 번째 단계는 가나에서 십자가까지의 기간이다. 첫 단계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셨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구원하신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시기 시작한다. 즉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가나까지는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있듯이 마리아는 예수를 데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열 두 살이 되었을 � 마치 늘상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친밀하게 “아들아”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삼십년 동안 마리아와 함께 있었으며, 어려서는 마리아의 팔에 안겨 에집트로 피난 갔으며, 나자렛에서 살았으며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것이었으며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것이었으며, 그들이 잔치집에 들어 갔을 때에는 마리아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옛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가나 이후로 사이가 점점 벌어지며 마리아는 몸소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었다. 가나 잔치 이후 일년이 지났을 때 마리아는 독실한 어머니로서 예수의 전교를 따라 다녔다. 어머니가 자기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주님은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시며 군중들을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12, 48)


그 때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가 혈육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통해 신성과 일치하는데 바탕을 두고 있다는 위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신비를 밝혀 주시며 주님께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2, 50)


이러한 신비는 갈바리아 산에서 끝이 난다. 갈바리아 산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신적인 아들을 잃는 순간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 겉으로는 애정이 소원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애정이 깊어진 것이다. 그 어느 사랑도 더 낮은 차원에 대해 죽지 않고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없다. 마리아는 가나에서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죽었다가 갈바리아 산에서 주님께서 구원한 주님의 신비체와 더불어 예수를 되찾았다. 인류를 얻기 위해 당신 아들을 버린다는 것은 우선 당장 밑지는 거래이지만 실제로는 마리아는 주님을 버리고 인류를 얻은 것이 아니다. 가나의 잔치날 마리아가 전교하는 예수께 왔을 때. 예수께서는 신적인 모성과 온 인류의 새로운 모성을 결합시키기 시작하셨으며, 갈바리아 산에서는 당신이 인류를 사랑하시듯 마리아도 인류를 사랑하게 하셨다.

그것은 널리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새로운 사랑이지 동일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에는 고통이 있었다. 인류를 아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리아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는 마굿간에서 기쁨을 느끼며 예수를 낳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갈바리아 산에서만 낳으실 수 있었으며 그 해산의 고통이 하도 커서 그녀를 순교자들의 여왕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을 때 마리아가 말한 Fiat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이제 또 다른 Fiat 이 되어 그녀는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을 낳게 된다. 또한 이 피앗,은 그녀의 애정을 확대시켜준 만큼 그녀의 고통을 증가시켜 주었다. 하와가 받은 혹독한 저저 - 여인이 고통스럽게 자식을 낳는다는 것 - 가 시므온이 예언한 대로 자궁이 열리는 고통이 아니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실현되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최상의 영고아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도 대단한 영광인 것이다. 첫 번째 아기를 낳을 때에는 여관에 방이 없었지만, 마리아가 두 번째 출산할 때는 전 세계가 방이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 그를 요한이라고 부르시지 않는 점을 상기하라. 그렇게 하셨더라면,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요한을 통해 온 인류가 마리아에

게 맡겨졌으며 마리아는 비유나 언어적인 표현이 아니라 출산의 고통을 통해서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다. 주님께서 요한을 당신 어머니에게 주신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염려가 아니었다. 요한의 어머니가 십자가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어머니가 필요 없었다. 이 말씀의 취지는 영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볼 수 있게 되고 활동하기 시작하게 된 오순절에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구원되고 새롭게 태어난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가 사도들 가운데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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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정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이야기라고 하기도 하고, 개신교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하고 불렀다고 해서 성모님의 역할을 폄하하기도 합니다. 쉰주교님 묵상 뿐만 아니라 다른 해석들도 모두 다 의미있는 해석들입니다. 그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성경을 읽어도 읽어도 늘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우리에게 줄 수 있겠지요. 시몬 신부님께서 “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 공동체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기쁨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 기쁨을 다시 불러 일으켜주십사 예수님께 청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 공동체도...........” 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지요. 그 해석도 참 새롭고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기적이 왜 포도주 만드는 일일까? 하고 어릴 적부터 궁금해했었는데,, 이제야 쬐끔 알 것도 같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냥 개신교 신자들이 “술 먹고 담배 피는 집안치고 안 망하는 집안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라는 비난을 할 때, 그에 대한 답변 정도로만 인용했었지요. “야, 예수님의 첫 기적이 포도주 만드신 건데, 술 먹는다고 카톨릭이 잘못된 종교라니??? ” 하구요.  하지만 아직도 그 의미를 다 배우려면 멀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