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나눔터 게시글 186번, 까붕이님의 술에 관한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까붕이님,,,, 요즘 겁나 바빠서 본당 홈피 몇 초간은 슬쩍 자주 들러보는데, 글을 차분히 읽을 시간도 답글 달 시간도 없었네용. 죄송혀용. )
“이태백이 진작에 요한복음을 읽었더라면 그의 싯귀에는 당연히 ‘예수께서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그가 행한 첫 번째 기적이 술을 만든 것이었겠는가’ 하는 호언豪言이 등장했을 것이다.” 부분을 읽으니,, 고등학교 때 어떤 목사님한테 들었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술 먹고 담배피는 집안 치고 안 망하는 집안 없다. 천주교가 우짜고 저짜고...”ㅎㅎㅎ...
결혼 상대자로 믿는 이를 고집하던 개신교 다니던 친구가 선보고 올 때마다 ‘술 담배를 하느냐 안 하느냐’로 사이비 신자인가 아닌가의 기준을 삼던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도 술을 만드신 거잖아.”하고 대꾸했던 기억도 납니다. 갑자기 그 친구가 보고싶네요.ㅎㅎ
토토리님~~ 오랜만에 글 올려주셔서 반가워서 눈물이 날 뻔 했슴다. 자주 뵙게요. ^^
“믿음” “붙들림”.... 하인들의 입장을 묵상하신 내용이 새롭고 감동적이네요. 고맙습니다.
제가 접한 가나의 혼인잔치에 관한 몇 가지 묵상들은 나름대로 다 다른 훌륭한 맛이 있었어요. (햇살 신부님이 작년에 하신 강론말씀도 넘 좋았구요.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기쁨을 주러 오셨다........... 제가 좀 게으른데다 능력도 안 되서 성경묵상을 잘 못하고, 늘 다른 분들이 해 주시는 묵상을 거저 맛보기만 하니 탈입니다. ^^* )
까붕이님과 토토리님 글에 대한 답으로 쉰 주교님의 묵상을 올립니다.
작년에 “십자가상 세 번째 말씀에 대한 묵상” 이라는 글을 홈피 사랑방에 올렸었는데.. 지금은 닫혀져서 읽어볼 수가 없네요. 혹시 다운 받아놓으셨다면 아래 글과 함께 다시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당.
토토리님 말씀처럼 성경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본당 교우님들 각자에게 알맞은 “레마”로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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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톤 쉰 주교님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옮겨왔습니다. 성요셉 출판사)
< ‘때’의 시작 >
복음서를 죽 보면 십자가에 대해 경고할 때마다, 천중과 번개가 서로 동반하는 것처럼, 부활의 영광이 함께 이야기 된다. 구속적인 수난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마다 그 후에 이루어질 정신적 자유의 빛이 함께 보인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이러한 대위법을 가나 마을에서 일어난 주님의 첫 번째 기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죄 많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선포하러 오신 그분이 결혼 잔치를 도와주며 공공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그분의 행동양식이다.
구약시대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되었다. 주께서는 당신께서 세우실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과 당신과의 관계도 똑같으리라고 암시하셨다. 주님은 신랑이 되고 주님의 교회는 신부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구원받은 인류를 이처럼 일치시키러 오셨기 때문에 결혼잔치를 도와줌으로써 당신의 공적인 전교활동을 시작하신 것은 옳은 일이었다. 나중에 성 바오로가 남녀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의 상징이라고 에페소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새로운 사랑을 소개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에페소서 5,25)
결혼잔치일은 기쁨에 넘치는 때이며, 기쁨의 표시로 포도주가 나온다. 이러한 상징적 가치를 지난 가나 혼인잔치에서 십자가가 기쁨에 그림자를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이 먼저고 십자가가 나중에 온다. 그러나 기쁨이 다 했을 때 십자가의 그림자가 잔치를 그늘지운다.
주님은 요르단 강에서 이미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확인되셨다. 주님은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 가운데서 다섯 명을 뽑았다. 그들은 복음사가 요한과 안드레아, 베드로, 필립보, 나타나엘이었다. 주님은 이들을 한참 무르익어가는 결혼잔치에 데려오셨으며 결혼잔치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당시 신부 집의 부모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큰 부담을 감수했다. 왜냐하면 흥겨운 잔치가 팔일 동안이나 계속되기 때문이다. 술이 떨어진 이유 중에 하나는 주님께서 너무도 많은 불청객을 데려오셨기 때문일 것이다. 요르단 강에서 하늘이 열리어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해준 엄청나게 흥분스러운 사건이 있은 이후로 주님께 수백 명의 추종자들이 따라 붙었으며 이들도 잔칫집에 들어왔다. 주님은 마을의 목수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요 메시아로서 결혼식에 오셨다. 흥겨운 잔치가 끝나가기 전에 주님이 십자가와 마주쳤음이 드러난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잔치집에 있었다. 주님의 생애 가운데 유일하게 마리아가 아들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주장하신 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주의 첫 번째 기적, 표징의 도구가 되실 것이다. 마리아는 태중에 있는 요한 세례자를 축성해 준 도구가 된 적이 이미 있으며, 이제는 자신의 간청으로, 앞으로 이루어질 수많은 기적의 서막을 알렸다. 마리아의 간구는 너무도 강해서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이름으로 자연과 은총의 기적을 간구하였다.
이미 제자로 뽑힌 요한 복음사가도 그 잔치에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마리아가 가나에서 한 일을 눈과 귀로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요한은 십자가 밑에서도 마리아와 함께 있었으며 두 사건을 충실하게 복음서에 기록하였다. 성전과 요르단 강에서, 아버지의 축복과 인가를 받은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시작하셨다. 가나에서 주님께서는 인간 부모의 동의를 받으셨다. 후에 갈바리아의 혹심한 고독 속에서 아버지께서 그를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어둠의 때가 오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시편을 인용하실 것이다.
“야훼여!
당신께서 힘이 되어 주시오니 우리의 왕이 기뻐합니다.
당신께서는 승리를 안겨 주시오니 크게 즐거워합니다.(시편 21,1)
주님께서 어머니를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또 한 순간이 올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요한 19,26)
가나에서 포도주가 동이 났을 때, 마리아가 포도주 담당자보다 더 손님들에 관심을 쏟는 걸 보면 흥미 있다. 왜냐하면 포도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포도주 담당자가 아닌 마리아였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완전한 기도의 정신으로 자신의 신적인 아들에게 도움을 부탁하였다. 주님을 완전히 믿고 주님의 자비에 신뢰하면서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다. (요한 2,3)
그것은 사적인 부탁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이미 충만한 기쁨을 찾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중개자가 되셨다. 마리아는 단순한 방관자로 자처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이 곤궁에 빠졌을 때 흔쾌히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능력, 서로간의 사랑에 의해서 나온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였다. 주님은 분명히 망설이면서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 가 오지 않았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4)
“ 그 일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신 말씀을 우선 생각해보자. 이것은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히브리식 표현이다. 성 요한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그리스어로 옮겼으며 불가따 라틴번역도 문자 그대로 옮겨서 Quid mihi et tibe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 일“이란 말은 원래의 표현에는 없는 말이지만 뜻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하시 위해 우리말로 옮길 때 첨가한 것이다. 녹스(Knox)는 의역을 해서 ”왜 그 일로 저를 귀찮게 하십니까“라고 번역했다.
주님의 말뜻을 보다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고 한 말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 “때”란 분명히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때”란 분명히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신양ㄱ성서에서 “때”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영광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때”에 관한 언급이 요한복음에서만 일곱 번 나온다. 그 중 몇 가지를 여기에 적어 본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잡고 싶었으나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의 EO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7,30)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 궤가 있는 곳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8,20)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요한 12,23)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요한 12,27)
“그러나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그 때는 이미 왔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16,32)
“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
그러므로 “때”라는 것은 십자가형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주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가리킨다. 가나에서, 주님은 갈바리아를 가리키시며 구원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정해진 때가 아직 가까이 오지 않았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기적을 부탁하고 있고, 주님은 당신의 신성을 보여 주는 기적은 곧 당신의 죽음이 시작하는 것임을 암시하신다. 주님께서 사람들 앞에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실 때 그들의 미움을 사실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평범함은 관용해줄 수 있지만 최상의 선은 견디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부탁하는 기적은 주님의 구원과 연계되어 있음을 바로 알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두 번 주님의 인성이 고통의 짐을 지기를 꺼려하는 것처럼 보인 때가 있었다. 올리브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가능하면 자기가 마셔야 할 불행의 잔을 멀리해 주시도록 아버지께 부탁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즉시 아버지의 뜻에 순순히 따르셨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주님은 어머니의 뜻을 대하면서도 분명히 주저하는 빛을 드러내셨다. 가나는 골고타의 연습이었다. 주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는데 대한 지혜와 특정한 이 시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지혜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주저하는 주님의 인성을 십자가에 순종케하는 문제였다. 아버지께서 주님께 공적인 죽음을 명한 점은 서로 기막힌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두 가지 경우 다 순종이 승리한다. 가나에서 물은 포도주로 변화되었고, 갈바리아에서는 포도주가 피로 변화되었다.
주님은 어머니가 사실상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는 어머니는 거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마리아는 사실상 당신 아들과 악의 세력과의 사생결단의 시간을 재촉하고 있다. 만일 주님이 어머니의 부탁에 동의한다면 주님의 죽음과 영광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하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고, 또 하나는 지상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중 사명을 띠고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다.
주님께서 당신의 “때”를 시작하겠다고 동의하시자마자, 이제부터 어머니와 자기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것을 즉시 말씀드렸다. 지금까지 사생활을 보내는 동안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 통했으니 이제 주님께서 구원사업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어머니만이 아니고 주님께서 구원하신 모든 인간 형제들의 어머니시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보편적인 어머니” 또는 “여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말은 구약의 빛 속에 사고 있는 자들에게 엄청난 의미를 주었다.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하느님은 사탄에게 그의 후손과 “여인” 사이에 원수를 맺어 주겠다고 예언하셨다. 세상은 사탄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상국가(the City of Man)일 뿐만 아니라 신국(the City of God)이기도 하다. “여인”에게는 후손이 하나 있었으며 그 후손이 결혼 잔치에 참석하고 있다. 이제 그 후손은 땅에 떨어져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솟아 오를 것이다.
“때”가 시작하는 순간 마리아는 “여인”이 되었다. 마리아는 육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에 의한 다른 자녀들도 두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원된 인류의 창시자인 새로운 아담이라면 마리아는 새로운 하와요 새 인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셨다. 또한 주님은 구세주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께서 구원하실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결혼식에 참석한 요한은 “때”의 절정을 이루는 갈바리아 산에도 있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리아를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또 “보십시오. 당신 아들입니다.”하고 마리아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제 요한은 마리아의 새 가족의 상징과 같았다. 주님께서는 나임의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며 “그를 그 어머니에게 주라”고 하셨듯이,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는 다른 아들 요한과 그리고 구원된 인류 전체를 마리아에게 맡기심으로 당신 어머니를 위로하셨다.
부활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 자신을 되돌려 주시어, 그녀가 새로운 자녀들을 얻었기에 당신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 주셨다. 시므온이 성전에서 마리아에게 한 예언이 가나에서 확인되었다. 이제부터는 그 아들에게 관계되는 것은 무엇이나 자신에게도 관계가 되며, 자기 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야할 운명이라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다면 마리아 역시 더 이상 단순한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다. 구세주 예수께서 구원하실 모든 사람의 어머니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인자(人子)”라고 부르신 칭호는 온 인류를 얼싸안는 이름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이제부터 “인류의 어머니”라고 불리울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 때를 시작하셨을 때 마리아가 주님 곁에 있었듯이, 그 때가 마지막 정점에 도달했을 때도 마리아는 주님 곁에 있게 될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열두살 때 성전에서 데려오셨을 때는 아직 주님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순종하여 그녀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마리아가 그 때를 시작하도록 명하자 주님은 그대로 복종하셨다. 가나에서 마리아는 죄인들에게 주님을 구세주로 주었으며, 십자가 위해서 주님은 죄인들에게 마리아를 피난처로 주셨다.
주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기적으로 당신의 십자가와 죽음이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며 마리아는 이제부터 고통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암시하셨을 때 마리아는 즉시 포도주 담당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일렀다. (요한 2,5)
얼마나 뛰어난 고별사인가! 성서에서는 더 이상 마리아의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마리아의 말은 성서에 일곱 번 나오지만, 그리스도께서 신성(神性)의 찬란한 광채 속에서 태양처럼 당신 자신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요한이 나중에 그녀에 대해 묘사한 것처럼 마리아는 달처럼 기꺼이 빛을 잃는다.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채워졌으며 그 양은 백이십 갈론 쯤 되었다. 리챠드 크라쇼(Richared Crashow)는 이렇게 멋있는 표현을 썼다. “의식을 가진 물이 그 하느님을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 첫 번째 기적은 창조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말씀”의 능력으로 이뤄졌다. 주님께서 만드신 포도주가 너무도 훌륭해서 신랑은 포도주 담당자로부터 비난을 샀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일이오!”하고 감탄하였다. (요한 2,10)
진짜 좋은 포도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때까지 계시의 전개과정을 볼 때 덜 좋은 포도주는 예언자들, 판관들, 왕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 여호수아로서 이 모든 사람들은 민족들이 기대하던 분의 기적을 기다리는 물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세상은 일반적으로 가장 좋은 기쁨을 먼저 주나, 그 후에는 찌꺼기와 쓴 맛만 남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순서를 뒤바꿔서 단식 후의 잔치를, 십자가형을 받은 후에 부활을, 성금요일의 슬픔 뒤에 부활 주일의 기쁨을 주신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한 2,11)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다. 아무나 긴장을 풀면서 양 팔을 쭉 내뻗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인자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나타내는 형상을 나타내게 된다. 가나에서도 십자가의 그림자가 “여인”에게 드리워졌으며, “때”를 알리는 첫 시계 종 소리는 사형집행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발생한 그 밖의 모든 사건을 볼 때 항상 십자가가 먼저 왔고 그 다음에 기쁨이 뒤따랐다. 그러나 가나에서는 결혼식의 기쁨이 먼저였다. 그것은 신랑과 구원된 인류라는 신부의 결혼식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을 누린 후에야 십자가가 그러한 환희의 조건임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거부하셨던 일을 결혼잔치에서는 행하셨다. 사탄 앞에서는 거부하셨던 일을 사람들이 빤히 지켜보는 데서 행하셨다. 사탄은 주님께 경제적인 메시아가 되도록 돌을 빵이 되게 하라고 요구했다. 마리아는 주님께 구세주가 되도록 물을 술로 변화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사탄은 죽음을 피하도록 주님을 유혹했으며, 마리아는 죽음과 부활로 나가도록 주님을 “부추겼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부터 떼놓으려고 애썼지만,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향해 가게 하였다. 나중에 주님께서는 사탄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한 빵과, 당신 어머니가 결혼잔치 손님들에게 포도주가 필요하단 말을 들으시고 둘 다 당신 수난과 죽음의 기념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이 기념을 새롭게 하도록 명하셨다. 그리스도 인생의 대응송이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지만, 그리스도는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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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토리 아저씨와 까붕이님이 올리셨던 글입니다.>
까붕이님의 술에 대한 답글을 적으면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성경 요한복음서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나옵니다
잔치집에서 잔치를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렇게 물으시니까
예수님께서
어머니!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집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의 말을 들은 하인들이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잖아요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니까
하인들이 물을 술항아리에 부었어요
8절에 주님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떠서 연회장에 갖다주라
하인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손님들에게 갖고 갑니다
그리고 연회장에 온 손님들에게 떠서 주었어요
사무엘상15장22절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물이 언제부터 포도주로 변했냐 하면
언제 물이 술로 변했다고 성경에는 안나옵니다
돌항아리에 물을 떠다 붓고 들여다 본 후
그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확인하고
포도주를 손님들에게 갖다 준것도 아닌데~~~
그런데 성경은
하인들이 아직도 포도주로 변하지 않은 돌항아리를 들고
마음을 조이면서 연회장에 모인 손님 앞으로 갑니다
그러면 이 하인들이
돌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연회장으로 갖고 갔을까 하고 생각해 보앗는데
그렇게 하지않고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것이지요
그럼 이 하인들이 언제 순종을 했냐하면
저의 생각으로는
돌항아리의 물을 들여다 보니까 물 그대로예요
그러나 주님이 갖다 주라고 했으니까 그대로 갖고 갑니다
가면서 봐도 물 그대로예요
연회장 앞에 까지 갔는데도 항아리의 물은 그대로 물이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갖다 주라고 했잖아요
이 하인들은 뺨맞을 각오를 하고
발길질 당할 각오를 하고
눈을 꼭감고 물을 퍼서 손님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그 물을 손님이 맛있게 마시고 있잖아요
너무나 이상해서
돌항아리 안을 쳐다보니까 물이 온통 포도주로 변했잖아요
만약 이물이 물 그대로 였다면
손님들이 왜 마시겠어요
포도주니까 마셨지요
까붕이님이 한번 연회석에 초청을 받아서
술자리에 술이 떨어졌는데
그집에 하인들이
물항아리를 들고와서 술이라고 마시라면
그물을 마시겟어요
ㅎㅎㅎ
그러니까
손님들이 떠서 마시려고 하는 순간
그물이 포도주로 변한거예요
그런데
물이 포도주로 변한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9절 이하에 보니까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물로된 포도주를 맛보고 기쁨이 충만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이 포도주로 변한것을
연회장도 모르고
신랑과 신부도 모르고
신랑측 가족도 신부측 가족도
참석한 손님들도 다 모르는데
누구만 아는가 하면 물떠온 하인들만 알더라 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포도주 사건을 통해서
다 마시고 배부르고 신나게 다 지나가버렸는데
물떠온 하인들만 붙들렸어요
여기 붙잡혔다는 뜻은
주님의 말씀 앞에 붙잡힌거예요
예수님이 한마디 하시면 물도 포도주로 변하는데
기적이 일어났는데
왜 주님을 안따랐겠어요
부족한 저나
까붕이님도 우리가 말씀 앞에 붙잡혀야돼요
하느님의 말씀이
신부님의 입을 통해서 전파될때에
이 말씀이 나의 심령속에 임하여서 붙잡혀야 되는거예요
구경꾼과
예루살렘의 딸의 차이점은
내가 말씀속에 붙잡혔느냐 붙잡히지 않았느냐
이 차이점입니다
말씀앞에 붙잡히면 주님이 쓰고
말씀앞에 붙잡히지 않으면 주님이 쓰지 않아요
내가 말씀을 붙잡는것 아니예요
말씀이 나를 붙잡는거에요
예루살렘의 딸들을 보세요
주님에게 붙잡히니까
요한복음서 11장2절에
자기의 전 재산인 향유를 깨서 주님의 발에 붓고
안이숙사모처럼
자기의 전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
자기의 전 생활을 주님을 위해서 살고
다니엘처럼 사자의 밥도 되고
불속에도 들어가고
물속에서
땅속에서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까지도 했어요
그러나 지나가는 구경꾼들은 몰라요
사자의 밥이 되는 그 순교자들의
예루살렘의 딸의 기쁨을 어느 누가 압니까
구경꾼들은 몰라요
알수가 없지요
디모데오의 둘째편지 3장5절의 말씀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어요
우리의 삶속에서
스쳐가고 지나가는 것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들은
신부님을 통해서 듣고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속에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레마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야 하는 거예요
주님을 만나서 나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또 새로이 태어나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영어로 Bone Again 이란 말이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주님을 믿기 시작하는 거예요
바로 신앙생활이 시작 되는거예요
까붕이님한테 너무 나열했나
그냥 스치고 지나가려했는데
자꾸 돌섬에서 까붕이님이
한잔하자고 손짓하는것 같아서 달려왓건만
보여야 할님은 안보이고
돌섬 선술집 이쁜 마님한테 잡혓네여 ㅋㅋㅋ
지송해요
이쁘게 봐줘여~~~ㅎㅎㅎ
♥~토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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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시중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우게....” 라는 신약 구절이 있습니다.
가나안의 혼인잔치 때의 일이죠....
거기서 예수님의 첫 번째 표징이 일어납니다.
그 표징은,
장독 속의 물이 포도 향이 진한 감미로운 술로 변환 되는 대 사건 말입니다.
그래서,
술에 대한 이야기를 “성서 옆에 논어 놓고, 논어 옆에 성서 놓고” 의 책속에서 성서와 논어에 나오는 술에 대한 이야기들을 옮겨 와 봅니다.
저자는 최기섭 신부님과 김형기님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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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이야기, 술타령
앵두꽃은 하얗게 피더니 이내 저버린다.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어느새 고운 연두 빛으로 열매가 달렸다. 늦봄이 기울고 여름에 접어들면 빨간 앵두가 가지마다 익을 것이다. 그럴 무렵이면 앵두 술을 담가도 좋다. 시장에서 사다 담근다고 해서 그릇 될 것은 없다. 잘 먹지는 못하지만, 술을 빚는 행사는 왠지 기껍다. 산딸기가 맺히면 복분자술을, 머루가 영글면 머루술을, 솔잎이나 솔방울로도 술을 담그는 우리네들의 생활 속내야말로 술을 닮아 발갛게 달아오른 빛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참 다사로운 심성이다.
인류 역사에 술이 없었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마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르게 굴렀을 것이다. 그만큼 술은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물질이다. 때로는 정상적인 사람을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이 술이요, 빡빡하기가 장마철 습기에 퉁퉁 불은 나무 문짝 같은 사람을 대충 엉성하게 나사가 풀리도록 하는 작용을 하는 것도 술이다. 그래서 장사꾼들은 거래를 트고자 의도를 감춘 채, 감미로운 술로 상대를 취하게 한다. 마치 낚시터에서 떡밥을 풀어 순진한 물고기를 홀리듯이 말이다. 조만간 미끼에 걸린 물고기처럼 늘어진 모습으로 넘어갈 상대방은 이미 술안줏감이 되어 있다. 이런 용도로 쓰이는 술은 의몽스럽다.
때로 은근한 술자리는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마른 옥수수대처럼 서걱서걱 부대끼는 생활 속에서 술은 주고받는 이들의 마음의 언저리를 적셔 주는 감로甘露가 된다. 그래서 술을 먹기보다는 술 먹는 자리에 간다는 기대감 때문에 술을 못하지만 술 모임에 나서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따뜻한 술자리에 소외되지 않고 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는 자기 확인이 술자리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또한 연인끼리 마시는 술은 둘의 사랑을 더욱 다가서게 하는 묘약이 되기도 하고, 친구 간에 마시는 술은 우정을 다짐하는 맹세를 대신해 준다. 이래저래 술 마시는 주변 분위기는 술 향기와 함께 늘상 보랏빛으로 채색된다.
성서와 논어에 나오는 술
그러나 술이 맡은 구실 중 가장 중요한 몫은 종교적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인간을 마냥 형편없이 풀어놓아 죄를 짓게 하는 원천이 되거나 실족하게 하는 악역으로부터 벗어나 성스러운 기능을 담당하는 물질로 쓰였던 것이다. 성서에서 최후의 만찬에서 나누어진 술이나 논어에서 체제禘祭 에 등장하는 울창주酒가 그런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와 논어에서는 술을 통해서도 예수와 공자의 존재를 새삼 확인 할 수 있다.
성서에서 예수가 행한 최초의 기적은 바로 술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도 다른 자리가 아닌 혼인 잔치에서의 일이다. 하객들이 너무 많았던 탓일까. 포도주가 부족했다. 찬치에 음식이 부족하면 주인의 입장에서는 큰 낭패를 겪는다. 더구나 잔치의 흥을 돋우는 음식인 술이 부족한 것은 크게 빈축을 살 수 있다. 그 자리에서 하객으로 초대 된 마리아가 예수님께 술이 부족하다고 걱정했다. 이때 두 분이 나눈 대화는 참으로 의아한 구석이 있다.
마리아:(예수를 보며)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예 수:(마리아를 향해) “부인, 부인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시중꾼들에게) “그가 무엇이든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 하시오.”
이러한 대화 끝에 예수는 시중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울 것을 지시하였고, 그 물이 바로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요한복음에 첫 표징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남의 잔치 집 술을 걱정하는 마리아의 태도부터 예사롭지 않다. 물론 남의 제사에 감내라, 대추 내라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잔치를 잔치답게 하는 것이 술일 터이면 비록 손님으로 초대 되었지만 술이 부족하여 낭패를 겪을 주인을 염려 해 주는 성모의 따뜻한 마음씨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의 걱정에 대해 예수는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로 대답한다. “부인, 부인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처럼 생모生母에게 마치 남이나 되는 듯이 건네는 이 말은 신학적 설명이 충분히 동원 된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예수의 거절하는 듯한 말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포도주가 부족한 이들에게 아들이 어떠한 배려를 하리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시중꾼들에게 “그가 무엇이든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 하시오” 라고 지시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뿐만 아니다. 예수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거절을 해 놓고도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나타낸다. 비록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로 부정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배려였을까. 구하는 이에게 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임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일까. 어째든 그래서 물동이에 채워진 맹물은 하객들이 감탄할 만한 맛을 지닌 포도주가 되었다.
곁말로 하는 이야기지만, 술을 끊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술꾼들에게 맹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은 구원의 복음이 될 수도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고금古今을 통틀어 대표적인 술꾼인 이태백李太白의 말마따나 “하늘이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하늘에 주성酒星이 없었을 것이요, 땅이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땅에 주천酒泉이라는 고을이 없었을 것[天苦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苦不愛酒 地應無酒泉]”이니, 아마도 이태백이 진작에 요한복음을 읽었더라면 그의 싯귀에는 당연히 ‘예수께서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그가 행한 첫 번째 기적이 술을 만든 것이었겠는가’ 하는 호언豪言이 등장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일부 교단에서 술을 지나치게 통제하여 찬치 집이나 상가喪家에서까지 술을 배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논어의 <향당鄕黨>에서 공자의 음주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모두冒頭에 가려 뽑은 “술은 양이 없으셨으나 어지럽도록 드시지는 않으셨다.”고 한 구절이 그것이다. 아마도 무인武人의 혈통을 지닌 공자는 체력도 대단하여 술을 퍽 많이 드셨던 모양이다. 흔히들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을 가리켜 ‘밑 빠진 독’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를 한문으로 나타낸다면 ‘무량無量’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공자의 주량이 바로 그런 정도의 양이었기에 ‘무량’ 이라고 했음직하다. 주량酒量이야 무량無量이었으되, 공자는 술에 취해서 주변을 어지럽게 할 만큼 드시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竹林七賢중 한 사람인 유령劉伶은 술을 퍽이나 좋아하여 ‘주덕송酒德頌’이라는 글을 지었다. 그는 그 글에서 “오똑하게 취하고, 황홀하게 깬다[兀然而醉 恍爾而醒]”고 읊었으니, 술이란 다소간은 취해야 맛일 것이다. 술이란 물건이 그렇게 취하기를 작정하고 마시는 것일진대, 공자의 음주 모습은 유령劉伶과 같이 질펀하게 취하는 주당酒黨들과는 사뭇 다른 근엄한 점이 있어 술의 기능을 절반은 감쇄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식이 반듯하게 잘라지지 않으면 드시지 않았다.[割不正不食]’ (<논어>향당 제8절)는 공자의 일상생활 모습을 생각하면 이점은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자른 면이 반듯하지 않으면 그것이 깍두기가 되었든, 고기가 되었든 먹지 않는 생활 태도를 생각할 때, 술을 마셔도 어지러이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는, 성인의 절제하는 모습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지나치지 않게 절제된 술 모임이나 술자리는 모두 나와 너의 거리를 더욱 가깝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술을 공연히 죄악시 할 필요는 없다. 삶의 풍요로움을 좀 더 헤프게 누리기 위해서라도 술은 소중하다. 그것에 신명神明으로 통하는 오묘한 마력이 없어도 좋다. 술에 절어서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로되, 난잡함[亂]에 이르지는 않는 정도에서 취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은가. 아카시아꽃 향기 밑에서 향긋한 과일주나 텁텁한 곡주 한잔으로 대우주大宇宙를 부앙俯仰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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