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어떤 분이 제게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지 못하면,,, 복음을 살지 못하면 구원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당이라는 개념으로 국한시키면 안됩니다. 교회는 통치개념이 아닙니다.지금 하느님의 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당에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산다면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으면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서,,,,
다음은 김수환추기경님의 강론 말씀 중에서 일부 옮깁니다. 저는 강론말씀을 읽으면서 구원의 범주,, 구원의 의미,, 그리스도신자의 뜻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은 혹시 복음 선교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신자를 만드는 데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선교를 좁게 해석한 것뿐이지요. 여러분 중에는 아무도 선교를 이렇게만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듯이 복음 선교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세우는 데 있습니다. 즉 복음의 기쁜 소식을 사회 모든 계층과 전 인류에게 전해 주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 5; 2고린 5, 17)라고 한 것과 같이 복음의 힘으로 사회 전체와 인류 전체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그 신적 능력, 즉 성령의 힘으로 누룩과 같이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의 생활과 활동, 그들의 삶 자체, 그들의 구체적 사회 환경을 변화시켜 갑니다. 교회의 선교는 이래야 하고 또 이럴 때 우리는 참으로 복음 선교를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최초의, 또한 최대의 복음 선교자였고 바로 그 자신이 복음의 내용이기도 한 예수와 같이 우리도 성령에 힘입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며, 눈먼 사람을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줌으로써"(루가 4, 18)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그리스도 안에 서로 형제 되어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어 나누는 공동체가 이 땅에 이룩되고 이것이 점차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간다면 우리의 복음 선교는 참된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서 이것을 모르실 분도 없고 이렇게 선교를 안하실 분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이 시간, 정녕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사실 모르겠습니다. 단지 있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과연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같은 복음 선교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예수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와 같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예수와 같이 눈먼 이들에게 시력을 주고 묶인 이들, 억압된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고 있는가? 우리들 곧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교회는, 이 땅에서 그런 의미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며, 인간과 사회를 내적으로 변혁시키는 누룩의 구실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고 반성해 보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문제의 다른 측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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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교회에서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사람들을 신자로 봅니다.
1) 세례를 받은 사람
2) 성당에 잘 다니는 사람(특히 주일 미사 참례를 잘하는 사람)
3) 아침, 저녁 기도를 잘 드리는 사람
4) 교무금과 연보를 잘 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신자요 어쩌면 훌륭한 신자일 것입니다. 여기다 더 욕심을 낸다면,
5) 신자 재교육 운동이나 피정에 자주 참여하고 이런 일에 적극적인 사람
6) 자기 소속 본당에서 사목 위원, 반장으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
그 위에 교리도 잘 알고 성경도 잘 알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신자라고 간주할 것입니다.
용어 표현은 좀 다르겠지만 개신교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1) 세례받고 성경을 잘 알며
2) 주일 예배(수요 예배)에 잘 나가고
3) 집에서도 기도 잘 드리고
4) 십일조 헌금을 비롯하여 각종 헌금을 잘 내는 사람
5) 권사, 집사, 장로로서 헌신적으로 전도와 교회 운영에 봉사하는 사람
6)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
대충 이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런 분들이 신자이고 또한 훌륭한 신자라는 데 동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와 같이 통념적으로 세례받고 교회에 잘 나가고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의 규율을 잘 지키고 성경 교리를 잘 알고 헌금을 잘 내고 등등을 좋은 신자 규범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예수 시대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 같은 개념으로 누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있지 않나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할례를 받은 자, 안식일을 비롯한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자, 회당에 성금을 잘하는 자 등이 훌륭한 신자였습니다. 이들은 바로 이렇게 스스로 훌륭하다고 자부하였기에 선민 의식에 젖어 있었고 또 하느님 나라의 시민 자격을 지녔다고 자신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좋은 신자, 열심한 신자들도 같은 선민 의식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교역자들인 우리 자신이 이같이 자부하고 또한 자신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 없이는 구원될 수 없어
그런데 이 같은 관념에 대해서 예수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그 어떤 사람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까? 산상 수훈은 이에 대해서 명백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2) 슬퍼하는 사람
3) 온유한 사람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5) 자비를 베푸는 사람
6) 마음이 깨끗한 사람
7)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8)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바로 예수 자신을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와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요 그중에서도 가난한 이, 죄인, 창녀, 간음한 여인 등 보잘것없고 버림받고 억눌린 이들을 사랑할 줄 알 뿐 아니라, 그들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용서해 줄 줄 알고, 드디어는 예수와 같이 진리를 위해 몸 바치고 이웃을 위해, 모든 이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바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처럼 참된 형제애에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리면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고"(필립 2, 5)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으로 예수의 사람, 곧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와 비신자의 근본 분류는 아마도 세례로써 정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를 너무 형식화시키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세례 자체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례는 결코 개인적 구원의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구원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몸의 다른 지체들과 믿음과 사랑으로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다른 지체들과 사랑으로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고 다툴 때에도 세례를 받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구원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우리는 세례만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훌륭한 설교도 기적도 선교도 헌신적 활동 등,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없으면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모든 재산을 남에게 주는 `자선'까지도 소용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저는 이 때문에 예수께서 루가 복음 10장 25절에서 37절에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누가 신자인지를 밝히는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지닌 좋은 신자 개념에는 `사랑'이라는 본질이 빠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여기서는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을 향하여 열린 교회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을 살 때에 참으로 신자입니다. 그리고 형제적 사랑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일하심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의 유일한 증거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줄 알고 그 사랑으로 모든 이를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고 억눌린 이들을 우리가 가슴에 품을 줄 알 때입니다. 그들과 고통을 나눌 줄 알 때입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의 전인적 해방을 위해서 헌신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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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님의 또 다른 강론 중에서 일부말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사랑
아무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먼저 같은 핏줄, 같은 종교에 속하는 사람이요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핏줄, 종교, 계층, 파벌은 누가 이웃인지 규정하는 중요한 척도였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안에서도 본래의 율법 정신과 현실에서 실천의 괴리 때문에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서 상당한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 율법학자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한 비유를 들면서 답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돈도 빼앗기고 심한 상처를 입은 채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비유 전개에서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이 `어떤 사람'을 우리 이웃으로 내세우십니다. 생각해 보면 뜻 깊은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 예수님은 그의 국적, 그의 종교, 그의 계층, 신분, 그 어느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사람'입니다. `사람'인 한에 있어서 예수님에게는 이웃 사랑의 대상으로서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한 사제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음에는 역시 사제족에 속하는 레위 사람도 그 사람을 보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나 제사를 드리고 예리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같이 보입니다. 예리고는 당시 사제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왜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도 피해 갔는지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겁이 나서 또는 귀찮아서 혹은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등등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서도 그를 돌보아 주어야겠다는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제나 레위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드실 때에 내용뿐 아니라 용어 선택에 있어서도 깊은 의미를 두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입은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린 사람으로 하필이면 사제와 레위를 등장시켰습니까? 그냥 때마침 그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제와 레위라는 둘 다 신분이 뚜렷한 사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또한 그것도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 성전에서 방금 하느님께 엄숙하고 경건한 제사와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임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라면 본시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요 또 방금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와 기도를 드렸던 사람들이라면 그 하느님이 무엇보다도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했어야 옳았습니다.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전심 전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마르 12, 33 참조).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바치고 제사를 바쳐도 그와 같은 예배 속에 담긴 정신, 곧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를 등장시키고 또 그들이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도 피해서 지나쳐 버린 사람으로 묘사하시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점을 지적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그 당시의 사제, 레위, 율법학자 등,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빠져 있는 위선을, 신앙과 실천의 괴리를 지적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고보 서간에 보면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어떤 좋은 언변도 어떤 깊은 신학 지식도 산을 옮기는 큰 믿음도 심지어 큰 자선 행위나 영웅적 행위까지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님이 비유에서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도 한번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우리도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미사 성제를 열심히 봉헌하지만 이 비유의 사제와 레위와 같이 실생활에서는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반성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십자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예수
이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이웃 사랑을 참으로 실천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그는 사제나 레위는 물론 아니요 유다인도 아닙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는 먼 지방이요 예루살렘에 가까운 예리고에 사는 사제나 레위에 비하면 먼 길을 가는 사람일 뿐 아니라 유다 땅에서는 나그네입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과 사이도 나빴고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부하는 유다인들로부터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방인과 같이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돈도 빼앗기고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을 보고서 가엾은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친절히 위로하고 치료해 주었으며 그를 자기 나귀에 태워서 여관에 데려다 주었을 뿐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잘 부탁하고 돈을 지불했으며 만일 돈이 더 든다면 돌아오는 길에 그것까지도 다 갚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입은 사람을 현재의 곤경에서 구해 줄 뿐 아니라 그의 미래까지도 걱정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사제도 레위도 유다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을, 곧 나그네요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을 등장시킨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참된 크리스찬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시사요 그 답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성당에 잘 다니는 신자일지라도 또는 사제나 수도자일지라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그런 신분, 그런 위치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을 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면 그가 비록 사제나 수도자가 아닐지라도 회장이나 사목 위원이 아닐지라도 신자가 아닐지라도 그가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누가 어떤 사람이 참으로 믿는 사람이냐에 대한 근본 문제 제기입니다. 크리스찬이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 사제, 수도자인 신분이 헛되다는 말이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사제나 수도자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의 은혜, 특히 우리 모두를 당신의 성자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곧 그리스도를 닮아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끔 신자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그 은총과 자비를 생각하면 우리가 받은 신자로서의 신분, 사제나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비할 데 없이 큰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서 우리의 처지를 자랑해도 좋고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참으로 하느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만일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신자 아닌 사람들보다도 못하다든지, 더욱이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위선이요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교회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참으로 이웃 사랑을 증거하고 있느냐,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상처입은 존재
이 사랑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증거입니다. 우리 서로간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주장하는 교회 쇄신이나, 특히 올해의 목표인 `하느님 백성의 일치'는 바로 이 사랑의 실천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4년 후에 맞이하게 되는 선교 200주년 기념도 이 점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200주년에 우리가 외적으로 어떤 거대한 기념 행사를 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만일 우리 모두의 삶이, 한국 교회의 삶이 내적으로 이웃 사랑에 충만되어 있다면, 그 마음이 열려 있다면,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면, 함께 아파할 줄 안다면 그리하여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종교나 신념에 관계없이 이 교회에서만은 사랑과 자비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보호를 받고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이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면, 한마디로 이 교회의 모습 속에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 우리는 200주년을 기념하고 남을 뿐 아니라, 교회는 진실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이 나라 안에 있어서 누룩이 되고 땅의 소금이 되며 세상의 빛으로 빛날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 신자요 교회인 우리의 사명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써 이 땅의 모든 이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마지막에 가서 "자,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율법학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 양식도 중요합니다. 이는 율법학자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질문과 비교해 보면 생각의 중심이 다릅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로서 `나'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마지막 질문에서는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냐?"로 강도를 만난 사람, 곧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생각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랑은 남을 중심으로 할 때 참사랑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남을 위하면서도 자신을 앞세우기 쉬운 데 비해서, 남이 중심인 사랑은 진실로 봉사적이요 헌신적이요 몰아적인 사랑입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조건 없이 내주는 사랑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율법학자는 이번에도 바른 답을 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그러자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이 하느님의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개개인도 인류 전체도 도대체 인간은 원죄 이후, 강도를 만나 상처입은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로 말미암아 본래부터 가졌던 좋은 것을 다 빼앗기고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사랑 없이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고독과 정신적, 육체적 병고, 삶의 고달픔, 그리고 죽음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인간을 이 깊은 상처와 죽음의 고해에서 건져 줄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이 실존적 고통에서 스스로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인간을 다른 모든 이가 외면해도 외면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곧 하느님이십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내용은 참으로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이 인간의 상처를 고치고 그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하느님이 얼마나 큰 자비를 베푸시는지를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이 인간의 이웃이 되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인간의 친구가 되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이 상처받은 인간을 보시고 너무나 측은하게 생각하신 나머지 바로 당신 자신이 혈육을 취하시어 이 상처받은 인간과 같은 인간이 되어 세상 속에 인생과 역사 깊숙이 들어오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상처받은 인간의 친구, 이웃만이 아니라 그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이는 당신 자신이 상처받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상처받은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배척당한 예수, 버림받은 예수, 드디어 십자가에 참혹히 죽은 예수가 바로 이 그리스도요 이 하느님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한편 이 수난의 예수를 상징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그들,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중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 굶주린 사람, 그 헐벗은 사람, 그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 그 옥고를 치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믿음으로 가난과 굶주림, 병고와 옥고 등 고통 중에 버림받고 배척당한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버릴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줄 안다면 우리는 누구도 감히 그를 외면하고 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런 이웃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네가 외면한 그가 바로 나다."라고 하십니다. "내 이웃을 버릴 것인가?"라는 이 질문은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릴 것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우리는 "하느님을 버릴 것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가난과 병고, 소외와 천시에 우는 이웃을 버리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요 하느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엔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는 나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 36)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가능할 뿐 아니라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목적이요 성자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어 오시게까지 하시어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룩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에제키엘서 36장 26절에서 예언되었듯이 우리의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을 우리는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로마 5, 5). 이렇게 성령, 하느님의 얼을 받아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참으로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실천과 아울러 겸손되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얼, 성령 앞에 여는 것입니다.
(1980. 3. 22. 명동 대성당)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사랑
아무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먼저 같은 핏줄, 같은 종교에 속하는 사람이요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핏줄, 종교, 계층, 파벌은 누가 이웃인지 규정하는 중요한 척도였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안에서도 본래의 율법 정신과 현실에서 실천의 괴리 때문에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서 상당한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 율법학자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한 비유를 들면서 답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돈도 빼앗기고 심한 상처를 입은 채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비유 전개에서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이 `어떤 사람'을 우리 이웃으로 내세우십니다. 생각해 보면 뜻 깊은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 예수님은 그의 국적, 그의 종교, 그의 계층, 신분, 그 어느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사람'입니다. `사람'인 한에 있어서 예수님에게는 이웃 사랑의 대상으로서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한 사제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음에는 역시 사제족에 속하는 레위 사람도 그 사람을 보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나 제사를 드리고 예리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같이 보입니다. 예리고는 당시 사제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왜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도 피해 갔는지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겁이 나서 또는 귀찮아서 혹은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등등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서도 그를 돌보아 주어야겠다는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제나 레위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드실 때에 내용뿐 아니라 용어 선택에 있어서도 깊은 의미를 두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입은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린 사람으로 하필이면 사제와 레위를 등장시켰습니까? 그냥 때마침 그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제와 레위라는 둘 다 신분이 뚜렷한 사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또한 그것도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 성전에서 방금 하느님께 엄숙하고 경건한 제사와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임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라면 본시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요 또 방금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와 기도를 드렸던 사람들이라면 그 하느님이 무엇보다도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했어야 옳았습니다.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전심 전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마르 12, 33 참조).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바치고 제사를 바쳐도 그와 같은 예배 속에 담긴 정신, 곧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를 등장시키고 또 그들이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도 피해서 지나쳐 버린 사람으로 묘사하시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점을 지적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그 당시의 사제, 레위, 율법학자 등,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빠져 있는 위선을, 신앙과 실천의 괴리를 지적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고보 서간에 보면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어떤 좋은 언변도 어떤 깊은 신학 지식도 산을 옮기는 큰 믿음도 심지어 큰 자선 행위나 영웅적 행위까지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님이 비유에서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도 한번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우리도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미사 성제를 열심히 봉헌하지만 이 비유의 사제와 레위와 같이 실생활에서는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반성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십자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예수
이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이웃 사랑을 참으로 실천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그는 사제나 레위는 물론 아니요 유다인도 아닙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는 먼 지방이요 예루살렘에 가까운 예리고에 사는 사제나 레위에 비하면 먼 길을 가는 사람일 뿐 아니라 유다 땅에서는 나그네입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과 사이도 나빴고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부하는 유다인들로부터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방인과 같이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돈도 빼앗기고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을 보고서 가엾은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친절히 위로하고 치료해 주었으며 그를 자기 나귀에 태워서 여관에 데려다 주었을 뿐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잘 부탁하고 돈을 지불했으며 만일 돈이 더 든다면 돌아오는 길에 그것까지도 다 갚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입은 사람을 현재의 곤경에서 구해 줄 뿐 아니라 그의 미래까지도 걱정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사제도 레위도 유다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을, 곧 나그네요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을 등장시킨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참된 크리스찬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시사요 그 답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성당에 잘 다니는 신자일지라도 또는 사제나 수도자일지라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그런 신분, 그런 위치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을 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면 그가 비록 사제나 수도자가 아닐지라도 회장이나 사목 위원이 아닐지라도 신자가 아닐지라도 그가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누가 어떤 사람이 참으로 믿는 사람이냐에 대한 근본 문제 제기입니다. 크리스찬이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 사제, 수도자인 신분이 헛되다는 말이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사제나 수도자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의 은혜, 특히 우리 모두를 당신의 성자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곧 그리스도를 닮아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끔 신자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그 은총과 자비를 생각하면 우리가 받은 신자로서의 신분, 사제나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비할 데 없이 큰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서 우리의 처지를 자랑해도 좋고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참으로 하느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만일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신자 아닌 사람들보다도 못하다든지, 더욱이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위선이요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교회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참으로 이웃 사랑을 증거하고 있느냐,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상처입은 존재
이 사랑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증거입니다. 우리 서로간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주장하는 교회 쇄신이나, 특히 올해의 목표인 `하느님 백성의 일치'는 바로 이 사랑의 실천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4년 후에 맞이하게 되는 선교 200주년 기념도 이 점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200주년에 우리가 외적으로 어떤 거대한 기념 행사를 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만일 우리 모두의 삶이, 한국 교회의 삶이 내적으로 이웃 사랑에 충만되어 있다면, 그 마음이 열려 있다면,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면, 함께 아파할 줄 안다면 그리하여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종교나 신념에 관계없이 이 교회에서만은 사랑과 자비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보호를 받고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이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면, 한마디로 이 교회의 모습 속에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 우리는 200주년을 기념하고 남을 뿐 아니라, 교회는 진실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이 나라 안에 있어서 누룩이 되고 땅의 소금이 되며 세상의 빛으로 빛날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 신자요 교회인 우리의 사명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써 이 땅의 모든 이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마지막에 가서 "자,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율법학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 양식도 중요합니다. 이는 율법학자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질문과 비교해 보면 생각의 중심이 다릅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로서 `나'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마지막 질문에서는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냐?"로 강도를 만난 사람, 곧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생각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랑은 남을 중심으로 할 때 참사랑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남을 위하면서도 자신을 앞세우기 쉬운 데 비해서, 남이 중심인 사랑은 진실로 봉사적이요 헌신적이요 몰아적인 사랑입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조건 없이 내주는 사랑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율법학자는 이번에도 바른 답을 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그러자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이 하느님의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개개인도 인류 전체도 도대체 인간은 원죄 이후, 강도를 만나 상처입은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로 말미암아 본래부터 가졌던 좋은 것을 다 빼앗기고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사랑 없이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고독과 정신적, 육체적 병고, 삶의 고달픔, 그리고 죽음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인간을 이 깊은 상처와 죽음의 고해에서 건져 줄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이 실존적 고통에서 스스로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인간을 다른 모든 이가 외면해도 외면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곧 하느님이십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내용은 참으로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이 인간의 상처를 고치고 그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하느님이 얼마나 큰 자비를 베푸시는지를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이 인간의 이웃이 되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인간의 친구가 되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이 상처받은 인간을 보시고 너무나 측은하게 생각하신 나머지 바로 당신 자신이 혈육을 취하시어 이 상처받은 인간과 같은 인간이 되어 세상 속에 인생과 역사 깊숙이 들어오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상처받은 인간의 친구, 이웃만이 아니라 그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이는 당신 자신이 상처받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상처받은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배척당한 예수, 버림받은 예수, 드디어 십자가에 참혹히 죽은 예수가 바로 이 그리스도요 이 하느님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한편 이 수난의 예수를 상징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그들,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중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 굶주린 사람, 그 헐벗은 사람, 그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 그 옥고를 치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믿음으로 가난과 굶주림, 병고와 옥고 등 고통 중에 버림받고 배척당한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버릴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줄 안다면 우리는 누구도 감히 그를 외면하고 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런 이웃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네가 외면한 그가 바로 나다."라고 하십니다. "내 이웃을 버릴 것인가?"라는 이 질문은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릴 것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우리는 "하느님을 버릴 것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가난과 병고, 소외와 천시에 우는 이웃을 버리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요 하느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엔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는 나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 36)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가능할 뿐 아니라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목적이요 성자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어 오시게까지 하시어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룩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에제키엘서 36장 26절에서 예언되었듯이 우리의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을 우리는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로마 5, 5). 이렇게 성령, 하느님의 얼을 받아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참으로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실천과 아울러 겸손되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얼, 성령 앞에 여는 것입니다.
(1980. 3. 22. 명동 대성당)
이번 사순절을 맞이하여 200주년 정신 운동의 일환으로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특별 강론은 유혹이 주제이고,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것은 예수께서 받으신 광야에서의 유혹입니다.
유혹의 본질은 하느님께 대한 배신
공관 복음을 보면 마태오, 마르코, 루가 세 복음 모두가 예수께서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짧게 유혹받으셨다고만 전하고 마태오와 루가는 그 내용을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태오에서 둘째 번에 나오는 성전 꼭대기에서의 유혹이 루가에서는 마지막 셋째 유혹으로 나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막의 유혹은 내일, 사순 첫주일 복음입니다. 내일 주일 성경은 루가 복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마태오 복음을 따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유는 유혹이란 보통으로 처음에는 본색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끝에 가서 본색을 드러내는데 마태오 복음이 그런 순서로 유혹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은 이러합니다(마태 4, 1-11 참조). 이 유혹을 보면 빵과 영광과 권세에 대한 유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닌 생리적 욕구, 사회적 인정 욕구, 그리고 지배적 욕구를 이용한 유혹입니다. 보통 우리 인간들은 이런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인간의 자기 실현, 즉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얻은 다음에는 허탈감에 빠지고 맙니다. 그것은 자기 실현과는 정반대로 자기 상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는 모두 그런 욕구 충족을 위해 살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것이 끝에 가서 자기 상실의 허탈감만을 안겨 준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유는 인간은 결코 빵과 세속적 영광과 권세 등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것을 위해서, 즉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 불멸의 생명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빵과 영광과 권세를 따르다 보면 이 본질적 인간 목적에서 이탈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마음속 깊이에서 염원하고 있는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 곧 불멸의 생명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 때문에 빵과 영광과 권세만을 따르면 이 하느님으로부터 떠나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보면 유혹이란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등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고 찬반을 가리게 하는 것, 하느님께 대해서 `예'냐 `아니오'냐 하는 것이 모든 유혹의 본질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도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대해 찬부를 가리게 하는 유혹입니다. 이런 점은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셋째 번 마지막 유혹을 하는 악마의 말에서 확실히 드러납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세상 모든 것을 얻는 대신 악마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비록 세상 모든 것을 얻기는 하지만 악마의 종이 됨으로써 자기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라고 하신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유혹도 너무나 뚜렷하게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기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그를 일축하고 마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첫째와 둘째 유혹 역시 결국 노리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선택 여부, 곧 믿음의 여부입니다.
죄악의 근본은 이기주의
첫째와 둘째 유혹에서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하면서 말을 겁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시오."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알고 싶은 것입니다. 저의 소년 시절에는 이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신가고 의심하면서 이를 알아보려고 복음 성경 여기저기를 뒤져 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때 돌을 빵으로 만드셨다든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셨는데 상처 하나 입지 않으셨다면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고 많은 이가 믿고 따르게 되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법합니다. 그러나 이 첫째 둘째 유혹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그분을 등지고 거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흉악한 속셈이 첫째와 둘째 유혹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숨어 있기 때문에 첫째와 둘째 유혹이 유혹의 본색을 완전히 드러낸 셋째 것보다 더 음흉하고 무섭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첫째와 둘째 유혹이 왜 그런지 좀더 분석하며 생각해 볼까 합니다. 첫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께서 40일간이나 단식하셔서 죽도록 허기지셨을 때였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무엇보다 먼저 무엇이든 먹고 싶을 때, 참으로 그럴 때는 돌도 빵으로 보일 만큼 눈이 뒤집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년 전 칠레의 안데스 산맥 위에 비행기가 추락하였을 때 거기서 살아 남은 사람들은 이미 죽은 동료 또는 죽어 가는 사람의 고기를 먹고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악마의 유혹은 단지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 역시 인간으로서 굶주림을 못 이겨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우선 자기 배를 채우는 데 쓰도록, 다시 말해 예수도 그런 극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남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빠지도록 하는 유감이 숨겨져 있습니다. 남을 구하기 위해 구세주로 오신 예수가 극한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부터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빠지고 말면, 비록 그가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해도 어떤 처지에서도 믿을 수 있고 구원해 주는 메시아는 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의 죄란 무엇입니까? 왜 이 세상에는 죄악과 불행이 가득합니까? 그 근본은 이기주의에 있습니다. 모두가 남보다는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을 거스르고 미워하고 해치고 죽이는 죄악이 범람하기에 인간 세계는 이렇게 오늘까지 구원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혹시 각자 자기는 남보다 덜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심리가 벌써 남을 깔보고 자기를 앞세우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남보다 자신을 먼저 위하게 하는 유혹
어떤 분이 쓴 책에 이런 대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죄를 계산하는 저울과 타인의 죄를 다는 저울 두 개를 가지고 있는데, 같은 잘못을 두고 남이 한 것은 호되게 비판하거나 적어도 속으로 단죄하면서도 자기가 한 짓에는 이유를 붙이고 변명을 해서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의 누구도 이런 이기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의 구원은 이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데서부터 옵니다. 자기 자신 역시 남과 같이 가난하고 불행할지라도 사람이 만일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안다면 거기서 인간의 구원은 시작될 것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보면 마지막 행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떤 유다교 랍비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가서 "메시아는 언제 오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네가 가서 그분께 직접 물어 보아라."고 하셨습니다. 랍비는 어리둥절해져서 "도대체 어디 누구에게 가서 물어 보라는 것입니까." 반문했습니다. 이 물음에 엘리야는 "저 성내에 가면 병든 거지 떼들이 모여 앉아 있다. 모두가 상처입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 상처를 감은 붕대를 한꺼번에 풀었다 감았다 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 거지 하나는 자신 역시 상처입고 가난한 거지이면서도 남과는 달리 상처에 감은 붕대의 한 부분만을 풀었다 감았다 한다. 그는 늘 어느 순간이든지 남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즉시 가서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지. 이렇게 항상 남을 생각하고 있다. 이 사람이 메시아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세상의 구원은 이 사람처럼 자신도 남과 같이 상처입고 가난하면서도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삶, 존재까지도 남을 위해 바치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가 바로 그런 마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분은 죄를 빼놓고는 우리와 똑같이 되신 분, 유혹까지도 받으신 인간, 가난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 자신보다는 언제나 남을 더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분은 만인의 메시아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남을 위해 있는 분, 바로 이 점을 악마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맨 먼저 이 점에 대해 공격해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으려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복음에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깨닫는다면 자기 실현, 자기 완성이 나를 주는 사랑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생명을 얻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만일 자신의 굶주림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먼저 자신을 위해서 썼더라면 그는 결국 자기 생명을 얻으려다가 잃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유혹에 예수가 떨어졌더라면 그를 통해서 이룩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좌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악마가 먼저 노린 것은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빵을 줌으로써 왕이 되라는 유혹
다음으로는 인간의 구원과 빵과의 상관 관계입니다. 굶주리는 자에게는 무엇보다고 빵이 선결 문제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가서 기도나 하시오 하면 그것이 참사랑인가 하고 성경은 여러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빵 문제는 큰 문제입니다. 우리 나라 안에도 아직 절대 빈곤으로 굶주리는 사람이 없지 않고, 세계적으로는 5억에 가까운 사람이 빵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빵 문제는 인간과 인간 사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빵 문제가 인간의 근본 문제이냐? 빵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냐?" 하면 우리는 누구도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빵 문제를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할 때에 빵의 기적으로 많은 이의 굶주림을 덜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 6장에 보면 사람들이 빵의 기적을 체험한 후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게 된 예언자, 곧 메시아이시다."라고 말하며 그를 왕으로 삼으려 했을 때, 예수는 이 낌새를 아시고 홀로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고 왕으로 섬기려까지 했는데도 왜 예수는 이를 거절하고 피했는가라고 우리는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빵 문제가 결코 인간의 문제 전부가 아님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이룩하시려는 인간과 세계 구원은 죄와 죽음에서의 구출, 참된 자유와 해방, 그리고 불멸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하시는데 당신을 계속 찾고 있는 군중에게 "정말 잘 들어 두시오. 당신들이 지금 나를 찾는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는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남을 위해서도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하라는 악마의 유혹, 빵을 배부르게 먹여 주면 왕으로 모시겠소 하는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첫번째 유혹의 말을 더 깊이 분석해 보면 거기에는 그보다 더 큰 시험의 복병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보낸 그 하느님을 끝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시험입니다. 예수를 광야로 인도한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느님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출애급기를 보면 예수가 당한 시련을 이스라엘 민족도 광야에서 당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굶주렸고 그 때문에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이런 데로 데려내어 왔느냐고 모세에게 원망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한 것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절대로 이 민족을 굶겨 죽이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신 대로 모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본 듯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유혹
모세는 이렇게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두고 믿음으로 그것을 이겨 냈습니다. 이 믿음 이것이 구원의 관건입니다. 어떤 처지에 놓여도 하느님은 진실하신 분이시요 우리를 끝내 구해 주시는 분이시다라고,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는 듯 믿었기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급의 모세처럼 예수는 이제 온 인류를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탈출시켜 자유와 해방의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가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룩해야 할 인류 구원은 결코 일시적으로 굶주림을 면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주를 충족시켜 주는 것만도 아닙니다. 인간을 참으로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돌을 빵으로 만드는 그런 기적으로 증명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 회개할 때에 이룩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 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길 때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와 같이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시며 첫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는 악마의 모든 유혹을 그 속에 깔린 모든 저의를 갈파하시고 물리치셨습니다. 둘째 시험은 더욱 심각합니다. 여기서는 악마가 성서의 말씀을 들어 시험합니다.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 들게 하시리니 그들의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고 하지 않았소."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더 한층 깊이 예수가 그렇게 믿는 하느님이 과연 성서에서 말한 대로 어떤 처지에서도 지켜 주는 믿을 만한 분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는 유혹입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다시 말해 내가 예수라면 이렇게 거듭 떠보는 악마에게 화가 치밀어서라도 "네 이놈,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 줄 뿐 아니라 하느님은 그렇게 믿을 만한 분이심을 네가 말하는 대로 내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 하고 뛰어내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하느님과 나의 위대함을 보여 주고 모두가 경탄하여 하느님의 아들인 나를 믿고 악마를 돌로 쳐죽이도록 만들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라고 하시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얼핏 이해하기 힘듭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천사들이 받들어 상처 하나 입지 않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 더 명약관화하게 마귀를 물리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다시 말해 이런 때야말로 하느님이 능력을 발휘하셔서 그놈 악마의 교만한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예수는 왜 소극적인 말씀으로 이에 대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시련을 겪을 때, 하느님의 힘이 또는 교회의 단결된 힘이 이를 물리쳐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유혹을 과거 여러 번 시련을 겪을 때 당했습니다. 힘에 대한 힘의 과시, 그럼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고 거거서 승리의 쾌감을 찾는 그런 유혹을 때로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 의미의 승리와 영광의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유혹도 깊이 살펴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하느님은 어떤 처지에서도 믿을 만한 분인지 아닌지 인간 예수가 하느님을 시험해 보는 의도가 덫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가 이 유혹에 넘어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기적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예수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이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인간에게 죄와 죽음이 들어온 것은 인간 아담이 하느님께 순종치 않음으로써였습니다. 때문에 구원은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이룩되는 것입니다. 결코 그 반대가 아닙니다(로마 5, 19).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악마는 이것을 미리 내다보고 바로 이것을 저지시키기 위해, 다시 말해 하느님께 대한 절대 순종의 길을 막기 위해 이런 유혹을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성서의 말씀으로 당신을 유혹하는 악마에게 같은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라고 하시면서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물리친 유혹
마태오에서 두 번째 오는 이 유혹은 루가에서는 마지막에 옵니다. 이것은 루가 복음 자체를 볼 때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유혹의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루가에게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구원이 결정적으로 이룩되는 곳이요 예루살렘은 또한 거기서부터 구원의 은혜가 온 세상에 전파되는 곳입니다. 루가는 복음과 사도 행전 두 가지를 쓰셨는데, 이 두 책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중심입니다. 그래서 루가 복음의 예수님은 항상 이 예루살렘을 마음으로 그리며 그리로 향해 가는 나그네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거기서 구원 사업을 이룩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루가 복음입니다. 또한 그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시고 당신 친히 생명의 말씀으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 갑니다. 이것을 쓴 것이 사도 행전입니다. 이렇게 루가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구원의 중심, 구원이 완성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이룩하신 구원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상 천외의 곡예와도 같은 기적을 보여 줌으로써가 아니고 아주 무력한 자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입니다. 루가는 어쩌면 이 점을 더욱 뚜렷하게 밝히기 위해서 마태오가 두 번째로 둔 유혹을 마지막 유혹으로 서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기적과 십자가는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악마는 예수께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길로 세상을 구하시고자 하심을 미리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이를 저지시키려고 십자가의 길과는 전혀 반대인 화려한 길을 택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악마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악마는 거기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악마는 끝까지 이것만은 저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루가는 이 점에 유념해서 이 광야의 유혹의 서술 말미에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악마는 그 후 여러 기회를 노렸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했을 때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처음 시험한 그 악마가 바로 당신 제자인 베드로의 입을 빌려서 당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저지시키려 든다고 보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까지 강하게 제자를 사탄이라고 질타하실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유다 지도자들의 입을 통하여 다시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이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라고 조롱했습니다. 함께 못 박힌 죄수 중 하나, 즉 좌도(左盜)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마태오 복음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는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고 조롱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런 무도한 놈들의 조롱과 오만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주셨으면 하는 것이 우리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오히려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십자가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다면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습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삶도 죽음도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이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악마가 참을 수 없는 십자가 사랑
이 사랑은 진정 역시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말하는 그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 가실 줄 모르는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려도 하느님의 이 사랑이 있는 한 나는 든든합니다. 얼마나 많은 죄인들 병자들 고독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 때문에 위로와 격려를 얻고 죄 사함의 기쁨, 재생의 기쁨을 얻었습니까? 인간과 세상을 구하는 것은 바로 사랑,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세상을 밝히는 가장 큰 빛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세상을 구하는 가장 큰 힘입니다. 이렇게 보면 악마가 결정적으로 노린 것은 무엇이냐를 다시 묻게 됩니다. 악마가 노린 것은 예수께서 이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어 오는 것도 참을 수 없지만 더욱이 그 사랑을 위해 남김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와 죽음, 비참 깊숙이 들어오면 자신의 설 땅이 없다고 악마는 본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것만은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악마의 이 같은 계략은 예수를 처음 유혹할 때, 특히 그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데려갔을 때 이미 숨어 있었습니다. 악마는 처음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보았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가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세 번째로 나오는 유혹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너무나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으로 더 분석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 본색을 아는 한 누구도 거기 걸려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참으로 흔한 세상 유혹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의식 무의식중에 하느님보다는 이 세상 재물을, 세상의 권세와 부귀 영화를 더 섬기기 쉽습니다. 현세에 사는 우리 인간이, 특히 가진 사람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것이 이 셋째 유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특히 200주년을 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이런 시기에 우리 순교 선열들이 어떻게 사셨는지, 무엇 때문에 순교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분들에게 세상 유혹이 왜 없었겠습니까? 한 예를 들면 원주에서 순교하신 최해성 요한의 경우, 고을 원님은 그에게 배교한다는 한마디 말만 한다면 원주 고을 전체를 주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 최요한은 원주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준다 해도 만물의 주이시고 생명이신 천주님은 버릴 수 없습니다, 하며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순교 선열들은 천주, 곧 하느님은 나의 존재, 나의 생명,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시요 그분과 함께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분 없이는 비록 세상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다 헛된 것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들은 그 시련의 시간, 그 혹독한 박해와 고통과 비참 속에서 때로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으로부터까지 버림받는 것 같은 절망과 고독 속에서도 신의 침묵 앞에서도 진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에 예수의 유혹을 묵상하면서 우리 순교 선열들의 믿음을 또한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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