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06년

잡채여! 잡채여!

김레지나 2008. 8. 28. 16:49

  1차 항암 주사 후에는 속이 울렁거렸고, 얼굴에 종기가 가득 났고, 입이 헐었고, 위가 헐어서 아프고 입에서 심한 냄새가 났고, 엄청 피곤했고, 숨이 찼고, 어깨가 심하게 아팠고, 잠을 못 잘 정도로 한쪽 허리가 아팠고, 불면증이 있었다.  

 2차 항암주사의 후유증은 1차 항암주사 때 보다 조금 덜했다. 지난 일주일간 울렁거리고 피곤하긴 했지만 종기도 나지 않고 위가 헐지도 않았다. 단지 두통이 있었고 약한 설사를 이틀간 했을 뿐이다. 목요일부터는 어깨가 심하게 아파서 진찰을 받고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별로 차도는 없다. 어제부터는 먹는 것도 심하게 괴롭지 않다.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데 엄마가 물리치료실로 찾아 오셨다. 그 때 갑자기 잡채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잡채가 먹고 싶어요”했더니

“그래? 그럼 해 줘야지”하셨다.

 해롭고 기름이 많다고 안된다고 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쾌히 대답하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주사 맞은 다음날부터는 어떤 음식도 맛이 없었고, 무수히 많은 종류의 음식을 연상해 보아도 지레 느끼하게 생각되었다. 며칠이 지나니 심한 울렁거림이 덜하더니만 드디어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긴 것이다. (심한 입덧을 해 보거나 항암주사 맞아 본 사람들은 알 거다. 얼마나 힘든 느낌인지.)

 물리치료실의 간호사가

“어머, 항암 치료 중에는 잘 못 먹는다고 하던데 먹고 싶은 게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하며 기뻐해 주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해낸 것이 대견스러웠다.

 (아! 잡채,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엄마에게  “ 그냥 중국집에서 시켜 먹으면 안 될까요? ”라고 했더니,

 “시켜 먹으면 기름이 너무 많아서 안 돼. 내가 맛있게 해 줄께”라고 하셨다.

 (엄마가 이 글을 보시면 화내실까봐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엄마는 요리에는 흥미도 소질도 없으시다. )

 내가 “엄마를 믿을 수가 없는데..”라고 했더니, 엄마가 당당한 미소를 머금고 “걱정 마, 나를 어떻게 보고..” 하셨다. 나는 그 당당하고 자신감 어린 미소를 믿어 보기로 했다.  

 

   피곤해져서 방에 누워서 잠을 자려고 했는데 불면증이 시작되었는지 피곤한데도 잠을 못 잤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곧 잡채를 먹게 되나 보다 싶어서 행복한 마음으로 누워있었다.

 ‘먹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 얼마만이냐, 엄청 많이 먹어야지, 히히히.’ 웃음이 절로 났다.

  

   드디어 엄마가 “진아야, 밥 먹자”하고 부르셨다. 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식탁에 앉았다. 짜잔!, 잡채가 나왔다. 잡채를 아무리 보아도 고기도 시금치도 당근도 없었다. 대신 노랗고 빨간 피망, 부추, 쑥갓, 양파가 보였다.

 “아니 이게 무슨 잡채야?”

 “야, 내가 금방 아파트 뒤에서 뜯어 온 부추에다가 몸에 좋은 것 다 넣어서 만들었는데 ..”

나는 울상이 되었다.

 “고기는?“

 ”고기가 없어서 못 넣었다“

내가 짜증을 내자 엄마는 장조림을 뚝뚝 잘라서 잡채에 넣으셨다. 잡채 색깔도 허연 것이 수상했다. 맛을 보았더니 과연 지나치게 싱거웠다.

 ”짠 것이 몸에 해로우니까 내가 간장을 거의 안 쳤는데..“

 

 ‘오호, 통재라! 오호,애재라!,’

나는 투덜거리며 맛없고 쑥갓향이 나는 요상한 잡채를 당면만 골라서 몇 젓가락 먹고 난 후에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엄마의 당당한 미소를 애초에 믿는 게 아니었다. 한 두 번 속은 게 아니었는데 ...

 

  '아이고, 아이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잡채야, 잡채야,.........’

입만 열면 곡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속이 상해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수술한 다음날에 아팠어도 울지는 않았었는데.. 잡채 한 그릇 때문에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꾸욱 참았다.

 

   토요일에는 엄마가 잡채 맛없이 해 줘서 미안하시다며 팔보채를 사 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반가웠다.

‘아, 드디어 외식이다. 근데 팔보채가 뭐지? 야채를 겨자 소스에 찍어 먹는 건가?’

무슨 음식이 팔보채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신이 나서 따라 나섰다.

 

  중국집에서 팔보채가 뭐냐고 물어 보았더니 해물을 여러 가지 넣어서 만든 요리라고 했다.

 “어? 나 해물 싫은데,, 여수에서 오 년간 살면서 많이 먹었는데, 그럼 양장피는 뭐에요?”

내가 생각했던 새콤한 야채요리는 팔보채가 아니라 양장피였던 것이다. 나는 가격표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잡채의 한을 풀기 위해 비싸지만 평소에 못 먹어 본 양장피를 시키려고 했다. 엄마가 “야, 겨자소스 매워서 위에 안 좋아. 팔보채가 몸에 좋지”하시면서 팔보채를 주문하셨다.

 

  ‘아, 바로 이 음식이 팔보채였구나’

  팔보채가 나온 후에야 그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얼마 전에 00에서 질리도록 먹은 키조개랑 멀건 소스가 비위에 거슬렸다. 음식 값이 아까워서 꾹 참고 먹었다. 먹고 나서도 느끼한 게 괴로워서 속을 달래려고 매운 짬뽕을 한 그릇 시켰다. 짬뽕에도 질리는 해물이 몽땅 들어 있었다. 엄마는 맛있다면서 아주 많이 드셨다. (흥!)

 

 배가 부르게 먹었지만 후회막심이었다.

 ‘차라리 잡채나 먹을 걸, 아! 잡채..’ 

모처럼 중국집에 왔다고 평소에 안 먹어 본 것 먹어보려다가 별 맛도 못 느끼고 배를 채운 셈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잡채는 못 먹어 보았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엄마에게 내일은 잡채 시켜 먹자고 말씀 드렸더니 추어탕을 먹자고 하셨다.

 

  나는 오늘에야 엄마한테 잡채를 얻어먹는 것을 포기했다. 곧 집에 돌아가니 그 때나 시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울렁거림이 거의 없으니 잡채가 절실하게 먹고 싶지 않다. 지난 금요일의 잡채와 앞으로 여수에서 사 먹을 잡채가 어찌 같은 잡채란 말인가. 금요일에 먹었더라면 백 배는 맛있었을 것을......^^;;

 

(항암치료 중인 환자를 간호하시는 분들께 고함)  

환자 먹고 싶다는 거 다 해 주세요. 원하는 요리법과 재료로.. 몸에 좋다고 창의적인 재료를 넣어서 만드시면 아주 곤란해요. 환자 방에서 곡소리가 날지도 몰라요. ^^* 각별히 조심하세요. 

 

(항암치료 중인 산샘회원님들께) 

항암치료 받으신 모든 분들은 비슷한 기억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회원님들 심심하지 마시라고 제 자잘한 기억들도 정리해 보았는데 재미있네요. 제 어머니는 내년이 칠순이세요. 저 때문에 무슨 고생이신지 마음이 참 아프답니다. 엄마한테 투정해가면서 공주처럼 투병하는 제가 참 호강하는 거지요. 엄마는 제가 음식투정을 해도 토하지 않은 것만도 기특하고 고맙다면서 싱글벙글이세요. 저랑 같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시대요. 제 덕에 잘 먹고 사신다며 “말년에 내가 복이 있지” 하셔요. (오히려 엄마 친구 분들이 ‘자식이 아픈 것 같이 괴로운 것 없다’시며 눈물까지 글썽이셔요. )

어제 제가 이 글을 인쇄해서 보여드렸더니만

“엄마 망신 다 시킨다”고 하시면서도 재밌게 잘 썼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3차 항암주사 맞은 후에는 꼭 잡채를 맛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구요.. 히히.. 글 쓴 보람이 있어요.

 

AC맞을 때만 속이 울렁거리고 탁솔은 괜찮다고 하니 저도 울렁거리는 고통은 반이나 지났네요.

주위의 도움을 별로 못 받고 사시는 분들은 엄청 힘드시겠지만 잘 견디시길 바래요. 울렁거려서 음식 먹기가 괴로울 때는 죽이나 과일이나 믹서로 갈아서 빨대로 삼켜버리면 먹는 시간이 짧고 소화도 잘 되니 좋다고 하던데요...(저는 과일 씹는 것도 괴로웠어요..) 같은 음식이 자꾸 남아서 먹으려면 고생스러우시니 주변 분식집에서라도 한 끼씩은 해결하는 것도 좋겠구요. (저는 엄마가 외식이 해롭다시면서 맛 없는 것만 해 주셔서 괴로웠어요. 헤헤. 행복한 투정이지요?)  

꼭꼭 먹을 것 챙겨서 드세요. 비타민제도 가능하면 챙겨 드시구요. 맛 없어도 꾹 참고 잘 드셔야 합니당. 물론 물도 많이 드시구요. 아자, 아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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