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 담
2006년 3월 26일 일요일
친정 부모님이 다니시는 성당으로 미사 드리러 갔다. 지금까지 많은 신부님들이 집전하시는 미사에 참례했지만 그곳 신부님처럼 웃기시는 분은 처음이었다. 미사 통상문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사투리를 겁나게 많이 쓰시면서 배꼽을 잡게 하셨다. 하느님은 무섭고 엄하시기만 한 분이 아니고 개그맨보다 더 재밌으신 분이시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 신부님이 재밌는 분이셔서 하느님도 재밌는 분이시라고 느끼시나 보다.
그런데 나는 미사시간 내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엉엉 울고 싶었는데 신부님이 하도 웃기시는 바람에 웃을까 울까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미사를 참례했다.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머니 한 분을 보고 재작년에 돌아가신 시할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의 뒷모습이 돌아가신 시할머니와 똑같아서 무척 놀랐다.
시할머니께서는 아흔이 거의 다 되어서 돌아가셨다. 결혼을 한 번 하셨는데 아기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시고, 시부모님이 결혼하시기 바로 전에 시할아버지께 개가하셨다고 했다. 큰아버지는 딸을 여럿 두신 후에 아들을 늦게 얻으셨다. 한동안은 내 남편이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 대접을 받았다. 아들만 바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남편이 4살 때 완도에서 광주로 데려오셔서 남편이 중학교 다닐 때까지 키우셨다. 큰아버지도 광주로 오셔서 교편을 잡으셨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셨다. 남편은 어릴 적에 큰아버지 댁에서 사촌들과 같이 보냈기 때문에 큰아버지 가족들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시할아버지께서는 큰어머니가 첫 아들을 낳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병원에 손주를 보러 가셨다. 그런데 간호사가 실수로“딸인데요“라고 잘못 알려 드리는 바람에 충격으로 쓰러지셔서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큰아버지는 할머니께서 혼자 되신 후로도 30년을 함께 사셨다.
할머니 또한 당신이 돌보아 주신 손주들을 각별히 사랑하셨다. 할머니는 남편을 애틋하게 예뻐하셨다.“내가 00를 어떻게 키웠는데. 00가 어릴 적에 하도 음식을 안 먹어서 내가 꿀 한 숟갈씩 먹였어. 입이 짧아서 애를 많이 먹었다..... 광주로 이사 오기 전 완도에 있을 때 00를 엄마한테 재우러 보냈는데 한 밤중에 우리 집으로 왔어야. 큰 일 날 뻔 했다.” 남편이 밤에 눈밭을 기어서 할머니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시어머님은 아기가 나간 줄도 모르고 주무셨다고 했다. 가슴을 쓸어내릴 얘기지만 남편이 갓난아기일 적부터 할머니께서 남편에게 사랑을 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시어머님의 낳은 정보다는 시할머니의 기른 정이 더 고마운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언젠가 남편도“중학교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전부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5년, 시골에서 5년을 살았으니 할머니를 자주 찾아 뵐 수 없었다. 명절 때만 한 번씩 인사를 드렸을 뿐 잘해드리지 못했다.
재작년에 시할머니께서 치매도 조금 있으시고 몸이 많이 약해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얼마 못 사실 것 같다고 해서 병원에 찾아갔다. 음식을 잘 못 드셔서 요구르트를 사서 드리고, 맛있는 것 사 드시라고 용돈을 조금 드렸다. 아이처럼 좋아하시더니 “내가 안 쓰고 두었다가 오는 사람들한테 우리 손주가 준 거라고 자랑해야겠다”고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친자식이 아닌 큰아버님께 오랜 세월 신세를 졌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셨는지 눈물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나 공밥 안 먹었다. 나 공밥 안 먹었다. 내가 어서 죽어야지.....” 할머니를 그날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평소에 건강하셨기 때문에 더 오래 병원에 계실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돌아가셨다.
미사 중에 본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서라도 성체를 모시는 것이 정말로 보기 좋았고 부럽기 짝이 없었다.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대세라도 받으시게 할 걸, 할머니 앞에서 기도라도 해 드릴 걸. 남편에게는 할머니가 최고였다고, 고맙다고, 더 잘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꼭 좋은 곳에 가실 거라고 말씀드릴 걸.’하고 후회했다.
‘왜 내가 그 때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내가 냉담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짧게나마 돌아가시기 전후로 기도는 했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할머니 마음을 더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내가 냉담 중이 아니었더라면 가까운 성당의 봉사자들에게 연락을 해서라도 마음의 평화를 갖고 임종을 준비하시도록 도왔을 것이다. 좋은 일 하고 사셨으니 천국에 가시리라고 믿고 있지만 고통스러운 임종의 시간에 “나 공밥 안 먹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혼자 두느냐, 죽기가 두렵다.”라고 하셨을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집에 돌아와서 천주교 신자로서 긴 기간 동안 게으름을 피운 것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통회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는 응석받이처럼 떼를 자주 쓰는 편이다. 미사 빠진 것, 죄 지은 것도 하느님께서 용서 안하고는 못 배기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서 배짱을 부리곤 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 “오랫동안 성당을 안 나가서 벌을 받은 거야”좀 더 폼 나게 표현해서,“하느님이 너를 이제 부르시려나 보다.”는 말을 몇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병에 걸리고 아쉬워져서야 하느님을 찾는 내 자신이 부끄럽긴 했지만 벌 받은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가 봐.”라고 대답하면서도 별로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느님은 늦게 일하러 오는 사람이나 아침부터 일하러 오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사랑하시고, 누구든지 죽기 직전에라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고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지 벌주시는 분은 아니다. 그래도 벌 받지 않기 위해서든, 늘 깨어 있기 위해서든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서 내게 그런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는 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프게 울었다. 나의 냉담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간 중에 내가 신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주위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했고, 내가 열심한 신자였다면 도움이 되었을 많은 상황들을 지나쳐버렸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슴 아프게 후회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께 잘못한 것들보다 이웃에게 잘못했던 것들이 훨씬 더 마음에 걸렸다. 내가 아프게 되어서 지금부터라도 무심히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내가 신앙생활에서 냉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마음을 다하지 못하고 지내기가 쉽다. 그러다 나처럼 큰 병을 얻은 후에야 가족과 이웃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아쉬워하게 된다.‘언젠가 잘해 줘야지, 언젠가 열심히 해야지, 언젠가 화해해야지’하다가 정작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일쑤다. 나도 병을 얻고서야 이웃을 대할 때 냉담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 깊이 결심했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신앙을 꼭 가질 것을 열심히 설득할 것이다.
여자들의 평균 수명이 팔십이라고 하니, 다행히 병이 낫게 된다면 나는 이제 절반을 산 셈이다. 앞으로 인생을 절반이나 남겨놓고 병을 얻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절반이나 되는 인생 동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에 힘입어 더 많이 남을 위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멋진 일인가.
내가 아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남편은 15년 넘게 근무했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IMF 때부터 시작된 금융권 구조조정 바람 이후로 해마다 용케 버틴다 싶었는데, 새 직장을 갖기에는 어정쩡한 나이에 명예퇴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아내인 제가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명예퇴직 권유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은 인사부로부터 퇴직압력을 받고 두 말 않고 사직서를 썼습니다. 저는 다른 직원들처럼 버텨보라고 권했지만, 남편은 그동안 적성에 맞지 않는 일 하느라 힘들었다면서 미련 없어 했습니다. 저는 무슨 직장이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냐고 버럭 화를 냈습니다.
동생이 형부의 퇴직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습니다. “언니, 변호사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노동 관련 변호를 전문으로 하는 로펌에서 근무해. 내가 형부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경우에도 소송하면 복직할 수 있대. 합의 하에 명퇴금 받고 퇴직해서 몇 년이 지났더라도 소송하면 확실히 이긴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처를 많이 받게 되겠지만 복직은 할 수 있대.” 저는 귀가 솔깃해서 남편에게 소송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노조에서 하는 일이 뭐야? 월급 인상해 달라는 투쟁만 하고 있으면 돼? 해년마다 미리 인원수를 정해놓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전화해서 퇴직시키는 이유가 뭐야? 그 인원 수 한번 기가 막히게 잘 맞추대. 고통을 분담하더라도 다같이 근무해야 될 거 아니야? 이번에 명퇴한 50명한테 연락해서 뜻을 한 번 모아 봐. 소송을 걸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는데.” 남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해도, 다시 복직해서 어떻게 근무할 수가 있겠어? 그래도 오래 몸담았던 직장인데, 얼굴 붉히고 싸울 수는 없지.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겠어?” 남편과 이야기하다보니 점점 더 화가 났습니다. “누군가가 총대 메고 제동을 걸지 않으면 해년마다 직원을 잘라낼 것 아니야? 일손이 달려서 계약직 직원을 쓰고 있잖아. 작년에도 사상 최대 흑자였다면서? 젊을 때 그렇게 부려먹더니 이제 와서 나가라고?”
남편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저녁 10시, 11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열악한 근무조건에서 일했기 때문에, 저는 늘 가족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이들 키우고, 집안일 하고, 직장생활하면서 남편 도움을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몸이 약한 저는 결혼생활에서 남편의 늦은 귀가가 제일 큰 불만이었습니다. 남편이 소송 걸 마음이 없다고 잘라 말하자 더 열이 올라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할 거야. 누군가는 나서서 해야 되니까. 내가 소송하지 뭐, 지금까지 부당하게 명예퇴직 압력 받고 퇴직했던 사람들 모두 다 구할 거야. 복직하는 건 그 사람들 자유겠지만. 내가 싸우겠어. 이 참에 명분 없는 명퇴 작업 못하게 쐐기를 박아야겠어. 이번 명퇴자 50명 전화번호 줘 봐.” 언제나 조용히 제 말을 듣기만하는 편인 남편이 딱하다는 듯이 한 마디 던졌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내 차례가 되었다고 이제 와서 나설 수는 없어. 지금까지 해마다 구조조정으로 나보다 더 일찍 피해본 가정들 모두 다 내 책임이야. 내가 지금까지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저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화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명예퇴직을 한 후에 열흘도 되지 않아서 제가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게 다 제 병간호에 충실하라는 하느님의 섭리라며 위로했습니다. 사실 남편이 직장에 다녔더라면 제가 마음 놓고 치료받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수술 후에 철침도 빼지 않은 상태에서 글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써대고 있으니, 애들 뒷바라지는 많은 부분 남편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하느님의 계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은 작년 성탄절에 영세를 받았고 매일 묵주기도를 하고, 성경쓰기를 하고, 저보다 더 열심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은총은 남편에게도 쏟아졌습니다. 남편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내 평생에 지금이 제일 행복한 것 같아. 성경을 왜 이제야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세상 사람들이 왜 이 좋은 걸 안 읽어볼까? 하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대도 그 당시와 똑같은 일이 벌어질 거야. 아무리 기적이 많이 일어난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과 사랑이 생기지는 못할 거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잖아? 그 말씀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는지 몰라.” 저는 남편이 갖게 된 믿음과 평화가 반가워서 웃었습니다. “이거 정말 큰일이네. 나는 암환자고, 당신은 실업자인데, 이렇게 둘이 헤죽헤죽 맘 편히 지내다가 조만간 애들 굶기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에고. 하느님, 이러다가 은총 부작용 생깁니다. 남편 마음 쪼금만 덜 편하게 해주세요.”
남편이 천주교 교리에서 제일 놀라워하는 것은 통공교리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과 연옥 영혼들과 이미 천국에 든 성인들의 기도와 공이 서로를 위해서 힘이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극히 훌륭한 사랑의 나눔이라는 겁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오래하면서도 천주교의 통공교리가 그렇게 감동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말을 듣고서야 통공에 대해 새롭게 묵상해보았습니다. 모든 영혼들이 서로를 위해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신 섭리야말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통공의 섭리 안에 가장 잘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의 섭리에 대한 감사와 찬미가 절로 나왔습니다.
통공교리에 대해 묵상하면 할수록 제가 그동안 얼마나 신앙인으로서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지냈는지에 대해서도 통회하게 됩니다. 이웃을 위해 서로의 공이 통한다고 하니, 세상이 비뚤어지고 악이 만연하는 것도 결국은 신앙인으로서 제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남편이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하자 제가 불평 한 마디 못하고 화를 삭이게 되었듯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잘못되었다면 그것도 또한 하느님께 화낼 일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이웃을 위해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니 통공의 교리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누구를 탓하며 불평하겠습니까? 제 자신을 탓할 수밖에요.
하느님께서는 작년에 제 오랜 냉담을 통회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믿었기에 냉담을 괴로워하기는커녕 하느님께 배짱을 부리고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눈물을 흘리며 통회한 것은 오랜 기간 하느님께 관심을 갖지 않고 지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사를 빠지고, 계명을 어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작 제가 눈물로 통회한 것은 제가 신자생활을 했더라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데려다 줄 수 있었던 영혼들을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가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냉담을 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어 있는 신자였다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 일상생활에서 오는 고통을 봉헌하고, 기도를 통해 세상을 더 환하게 밝힐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널리 알리면서 하느님을 증거할 수도 있었겠지요. 세상의 고통과 죄악을 보고도 제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기도와 희생은 안중에도 없고 불평만 해댔으니, 그런 저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은 더 아프셨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하느님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 보다는 제 가족, 제 이웃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일들을 더 아프게 통회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W. H. Davies 가 쓴 The example 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여기 나비 한 마리가 보여주는 Here's an example from
본보기가 있다 A Butterfly ;
거칠고 단단한 바위 위에도 That on a rough, hard rock
행복하게 앉아 있는 나비 Happy can lie;
이 거친 돌 위에 Friendless and all alone
친구 하나 없이 혼자인 나비. on this unsweetened stone.
내 침상이 지금 딱딱하더라도 Now let my bed be hard
나 또한 개의치 않으리. No take care I;
나도 이 작은 나비처럼 I'll make my joy like this
내 기쁨을 만들어가리. Small Butterfly
나비의 행복한 마음은 바위를 Whose happy heart has power
꽃으로 만드는 힘이 있으니(장영희 역) To make a stone a flower.
“나비의 행복한 마음은 바위를 꽃으로 만드는 힘이 있으니.”라는 부분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통공에 대한 묵상을 통해 제가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모든 고통, 제 생각, 사랑, 기도와 희생에 못지않게 제가 누리는 기쁨과 행복 또한 이 세상 사람들의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줄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통 중에 체험한 하느님의 위로와 은총을 저만 간직한다면 또다시 이웃을 위해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낸 일들을 통회하게 되겠지요. 이제부터라도 이웃에 냉담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듯 다른 모든 이들도 사랑하시니 그들 또한 고통 중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저의 행복한 마음이 바위를 꽃으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제가 세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살아왔어요. 용서해주세요. 주님, 제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데 작은 몫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좋겠어요. 게으름 피우지 않도록 애쓸게요. 용기를 주세요. 제 고통과 기쁨과 행복을 모두 다 주님께 드립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도록 미약한 힘이나마 아끼지 않을 거예요. 부족하기만 한 저를 당신의 능력으로 채워주세요.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요. 도와주세요. 아멘.”
'신앙 고백 > 투병일기-200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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