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나야, 나오너라."
작년 12월 3일, 의사 선생님은 제게 암이 폐와 간, 뼈, 늑막, 복막 등에 가득 퍼져서 남은 여명이 두세 달에 불과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통방통하게도 다섯 달이 훌쩍 지났고, 그간은 진통제로 통증이 제법 조절되었습니다.
한 달쯤 전에는 호흡곤란이 심한 데다 숨 쉴 때마다 통증이 심해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호스피스 병실에 입원하려고 알아보았더니, 빈 병상이 없어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증상들이 조금 잦아들어서 입원을 미루고 다시 한 달을 견디었습니다.
일주일 전에는 기침이 너무 심하고 배가 딱딱하게 부풀어서 당장 흉수를 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진료를 보았고 지금은 다시 병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작년 초부터 호스피스 진료를 권유 받았으니, 벌써 2년 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온 셈이고, 제법 평온하게 많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성령 충만하신 L 신부님께서는 제게 안수를 해주실 때마다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을 것입니다.”라든가 “나을 수 있을 겁니다. 병마 때문이니 싸워봐야지요.” 라고 하십니다. 신부님의 진심어린 격려 말씀 덕분에 주님의 위로를 느끼고 희망을 품을 수 있어서 고마워하다가도 가끔은 뭔가 부족해서 치유가 안 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지인들은 (제 표정이 늘 밝아서 더더욱) 제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제 믿음이 부족해서 아픈 거라는 충고도 쉽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제 태도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나아야할 병이 낫지 않고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제게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믿음은 모자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방식에 차이가 있어서 주위의 기대와 제 상황이 일치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너는 오래 살 것이다.”라고 하신다면, 저는 ‘수년을 더 살 것’이라고 알아듣기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빛내는 데 충분할 만큼 살 것’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영원한 생명에 해가 되는 일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분이시니,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만이 은총이라고 떼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행여 제가 쫓아내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병마’가 있다면, 그것은 제가 받은 큰 은총에 합당치 않은 어리석은 생각과 사랑 없는 행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상 예수님의 오른편에 있던 도둑이 그러했듯, 제게는 고쳐 살 수 있는 시간과 힘이 다해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행실이 부족하다고 해서 우리에게 베푸실 은총을 숨기고 미루시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주님께서는 제게 다 주셨고, 저는 이미 다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주님, 저를 기억해주십시오.”라고 십자가상 우도의 기도를 올릴 수만 있으면, 저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 구원의 조건은 제 공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고, 구원은 제 몫이 아니라 주님의 몫입니다. 제게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못나고 부족한 모습 이대로도 기쁘게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제 믿음으로 얻은 위로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제 마음을 어지럽히는 자잘한 일들이 못 다한 숙제처럼 여겨져서 조바심이 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남은 불안을 말끔히 씻어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아, 내가 할 일은 없다. 나는 이미 죽어 누워 있는 라자로다.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해도 된다. 내가 응답할 수 없어도 주님은 나를 불러주실 것이다. “레지나야, 나오너라.”하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누워 있는 라자로를 “이리 나와라.”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살려내셨습니다. 라자로는 믿음도 기도도 선행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그저 무덤 안에서 누워 있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시며 라자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아가 눈물을 흘리시는 그 큰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L 신부님의 바람처럼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좋기는 좋겠습니다. 하지만 당장 내일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부활의 희망을 품고 떠날 수 있으면, 부족함 없는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마르타처럼 “주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와 항상 영원히, 주님은 저의 구원자, 저와 함께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 14)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 16~17)
2019년 5월 12일, 입원을 하루 앞두고, 엉터리 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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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사랑하는 M자매님이 보내준 답장입니다. 넘 좋아서 자랑하는 겁니당.^^ 우쭐우쭐ㅋㅋ
(레지나는 어제 입원했습니다. 흉수 빼는 시술 기둘리는 중이어유. 적당히 치료 받고 퇴원할 수 있겠지유.^^)
사랑하는 레지나님..
올려주신 글을 천천히 읽었어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여전히 밝고 담대하고 당찬 우리 레지나님의 믿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혹시나 많이 힘들어하지는 않으시나 항상 걱정하던 제 마음이 놓였어요. 역시 우리 하느님아버지는 비록 눈치는? 쬐금 없으실지언정 의리파이시구나..레지나님 끝까지 붙들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계시는구나..하고요.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는 누구나 죄인이고 모자라고 엉터리겠지만..저한테만큼은 레지나님은 엉터리가 아니세요.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순교자들 성인들이 나오지만.. 정작 제가 환란의 고통 속에 있을 때는 그 모든 인물들이 신화 속의 전설 속의 존재인 양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멀게 느껴지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조차도 과연 계시는 건가 의문이 들고 신앙자체에 대해 깊은 회의가 드는 게 저라는 인간이었어요. 그런 제가 어떤 자매를 만난 거예요. 제가 보기엔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기에 넘치도록 충분할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데도 이상하게 너무나 밝고 씩씩하고 명랑한 자매. 오히려 그런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받을 은총과 위로를 모두 받았다며 굳은 믿음으로 감사하는 자매. 처음엔 이해할수없어서 신기했고 뭐 이런 사람이 다있나 싶기도했던 어떤 자매..
하지만 그 자매를 통해서 저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것인지..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아주 조금씩 깨달을수있었어요. 너무 나약하고 아둔해서 성인성녀도 안통하고 성모님도 안통하고 하느님 말씀도 귓등으로 듣는 나일롱신자인 저에게 그 자매를 통해서 끝까지 냉담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저에게 선물을 주신 거라 믿어요. 레지나님은 저에게 그런 귀한 선물과 같은 분이세요. 저 혼자였다면 절대로 그 시간들을 냉담의 유혹 속에서 버티어내지 못했을거에요.
몇달전.. 거의 5년 만에 처음으로 대녀친구를 만났었죠. 그사이 냉담에 빠져버린 대녀친구가 안타까워서 레지나님 블로그 얘기를 하던 중에..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내가 레지나님을 엄청 의지하는것같은데 혹시 레지나님이 건강회복못하면 너무 충격 받아서 쓰러지는 거 아니냐고. 근데 그때 저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어요. "괜찮아. 오직 하느님 뜻만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게 가장 좋은 거니까. 나중에 천국에서 다같이 만날 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죽음도 더이상 무섭지가 않잖아."
레지나님이 제게 했던말들이 무의식중에 제 마음에 와서 박힌 건지 저답지 않은 답변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너 좀변했다' 그러고는 웃더라구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제게 선물처럼 오신 레지나님..레지나님이 고난없는 평탄한 삶을 사는 분이셨다면 저는 절대로 절대로 레지나님이 하신 신앙체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에요. 레지나님의 그 고통의 십자가가 있었기에 저같이 뿌리 깊은 불가지론자가 비로소 하느님을 찾을 용기를 내게 된 거라 생각해요. 제 자신은 하느님을 잘 모르고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그래도 그 아리송한 듯한 하느님을 끝까지 굳세게 믿는 레지나님의 믿음을 보고 저도 믿어요. 너무 힘들때는 다 때려치우고 싶고 멋대로 되는 대로 꼴리는 대로 살다 콱 죽어버리고 싶은 제 못된 심보를 억누르고 제 뜻보다는 하느님 뜻을 찾으려 노력해요.
제게 죽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 목숨이 제가 사랑하는.. 저를 저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 손에 맡겨져 있음을 떠올리면 안도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어떤 죽음일지라도 그것이 저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에 제게 일어날 것임을 저도 레지나님처럼 그렇게 담대히 믿고 싶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아있는 지금 이순간들을 후회없이 사랑하며 사는것밖엔 없는 거 같아요.
이제 입원을 앞둔 우리 레지나님..
레지나님 손을 꼭잡고 같이 입원 준비하시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손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곁에서 레지나님 불안하지않게 같이 동행하시는 의리파 예수님! 그런 예수님이 레지나님과 함께해주시니까 우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오너라..하고 부르시면, 그때 우리 이 모든 고통과 고난으로 얼룩진 무덤에서 기쁘게 "네!"하고 일어나 나가요. 그곳이 이곳이든 아님 천국이든 그것은 상관없어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꼭 만날 것이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레지나님..항상 죽음이 두려운 저에게 죽음마저도 사랑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든지 우리에게는 돌아가서 안길 든든한 아버지의 품이 있으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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