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가면 무엇을 할까?
“우리의 구원은 부활 때에 완성됩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4)
천국이 있을까?
요즘 들어 불면증이 조금 좋아져서 간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깼습니다. 병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향긋한 풀 내음을 한껏 들이마시니, 몸도 마음도 싱그러워집니다. 숨 쉬는 건 여전히 불편하지만, 며칠씩 지속되곤 했던 늑막 통증이 사라져서 좋습니다. 많은 분의 기도와 ‘배 째라 영성’ 덕분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 째라 영성’이란 제가 이름 지은 것인데, 저를 죽이고 살리실 분이 저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니 앞일 걱정하지 말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반말하면 안 될 것 같아 ‘배 째십쇼’라고 하려다가, 항의의 뜻을 넣어 흔히 쓰는 표현대로 ‘배 째라’로 이름 지었더니, 떠올릴 때마다 고소하기도 하고 배짱이 두둑해지는 기분이 들어 좋습니다.
폐 전이 이후로 벌써 2년 3개월이 지났습니다. 요즘 기분 같으면 좋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씨티 상으로는 암이 계속 조금씩 번집니다. 한 달쯤 전, 검사 결과지를 뽑아 보고, ‘이젠 정말 회복을 기대할 수 없구나. 가파른 내리막길이구나.’ 싶은 생각에 잠시 가슴이 아렸습니다. 혈액종양내과에서 치료 약을 새로 받았고, 가정의학과에서 마약성 진통제와 완화의료 소견서를 받았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호스피스 병동이 있는 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병실도 둘러보면 좋을 거라고 합니다. 급한 상황이 닥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2주일 후에는 심해진 기침 증상을 확인하러 병원에 가야하고, 심부전 약도 더 받아야 하지만, 요즘엔 통증이 없으니 앞으로도 한참은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쌔액 좋아집니다.
며칠 전 소화 데레사 성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성녀께서는 건강이 나빠진 후로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셨다고 합니다. 성녀께서는 그 시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영원히 천국을 열어주기 위해 천국을 명상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 행복합니다. 믿음을 거스르는 단 한 가지 죄에 대해서도 제 눈물이 보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녀께서는 임종 전의 두려움을 통공의 신비 안에서 귀한 은총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성녀께서는 아름다운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저는 영원의 문턱에 있으니 제가 이해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말씀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죽지 않고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 저를 찾아오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 오, 나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 또한 영원으로 건너가는 문턱에 있으니, 천국에서의 삶에 대해 시시콜콜 상상해보곤 합니다. 많은 분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음은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문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요한 13,1-5) 그리고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27-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성부께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믿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참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수난을 앞둔 고통 중에도 용기를 낼 수 있고 ‘세상을 이겼노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되어
하느님께서 첫 인간을 만드실 때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원죄 때문에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지만’(로마 5,12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로 1,4)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6)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기 때문에’(1코린 13,12)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가톨릭 교리서 1023)
우리는 영원 속에서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갈 능력을 갖춘 영적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 5:48)하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 천국에서의 우리 삶은 역동적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사랑을 받아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깨닫고 배우느라 바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느라 바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삶은 ‘기쁘고 행복하게 머무르는 상태’가 아니라, ‘기쁘고 행복하게 사랑하는 활동’일 것입니다.
아빠 하느님과 엄마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어떻게 나를 구원하셨는지 낱낱이 알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 하나하나,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해주신 일 하나하나에 구체적인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고, 우리의 아빠가 되어주실 것입니다.”(묵시 21,3-7)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두셨습니다.”(1코린 2,9) 우리가 지금은 상상으로도 떠올릴 수 없지만, 하느님의 완전한 위로와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마련해두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셀 수 없이 새롭게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으뜸 피조물이시고 온갖 은총의 보고이신 성모님이 우리의 어머니이셨고, 어머니이시고, 어머니이실 것임을 생생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기르셨던 어머니께서 또한 우리의 어머니이시라니,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아기 예수님의 잉태를 전하면서 성모님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는 대답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기꺼이 동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인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께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모든 사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 새로운 하와가 되실 것이기에, ‘여인’이라고 부르시며 성모님의 뜻을 물으신 것입니다.”(풀톤 쉰 <그리스도의 생애> 참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성모님을 다시 ‘여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9,26-27)
하느님께서는 구원사업의 시작과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과 끝에 성모님을 당신의 협조자로 세상에 알리셨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신앙의 모범으로 세우셨습니다.
천상 어머니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연옥에서도 천국에서도 우리를 지극한 모성으로 돌보십니다. 연옥에서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을 때까지’(마태 5,26)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실 것이고, 천국에서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배우고 닮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고, 성모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
(** 저는 예수님의 공생활 전 30년을 묵상해보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가정을 이루고 사셨던 긴 세월이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셔야 하는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기에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순수하게 아름답고 유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역사에 뛰어들어오신 것은 인간의 외양만을 취한 쇼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셨음에도 죄를 제외한 인간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징으로서만 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성을 취하셨기에, 여느 어린아이들처럼 부모의 돌봄과 가르침이 필요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이미 다 갖춘 채 아기의 모습만 취하시고 태어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유년시절에 대해 복음서는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1-52)라고 기록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시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루카 1,28)’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이 구세주이심을 알고 계셨기에 어린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묻고 배우고 순종하셨고, 당신 마음속에 간직한 모든 일을 통해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부모에게 순종하시면서 지혜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가 더하여지도록 성장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토록 완전하게 당신을 낮추시고 당신 피조물의 협력을 즐겨 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예수님과 우리를 돌보기 위한 흠 없는 사랑이 필요해서, 성모님을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장 훌륭한 하느님 사랑이 성모님을 통해 드러나고, 가장 훌륭한 믿음과 순명이 성모님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특별한 지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피조물의 교만으로 창조주의 권한에 간섭하는 것이고 창조주의 겸손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피에타상의 아름다움을 칭찬할수록 미켈란젤로가 칭찬을 받듯이,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작품인 성모님을 공경함으로써 하느님의 겸손과 사랑에 최고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천사들과 같아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상처를 지니신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한 20,27) 우리도 이 세상에서의 고유한 성품과 인격, 기쁘고 슬픈 기억들을 모두 간직한 채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에 남편을 몹시 싫어하는 민이 언니가 말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새로 태어나는 거니까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의미가 없어질 거라 참 다행이야.” 언니는 천국에 가서도 지긋지긋한 남편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에서는 세상에서의 기억이 다 사라져서 새로운 인간으로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신의 부활은 지상에서 육신으로 쌓은 가치들 그리고 부당하게 겪은 육신의 눈물과 슬픔과 고통 따위가 하나도 상실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회복되어 후한 보상과 함께’ 하늘나라에 동참함을 뜻합니다.”(차동엽 신부님의 <사도신경>에서)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이 없다’는 말은 ‘내 것과 네 것’의 구별이 없어지고 하느님의 것이 곧 우리 각자의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특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가 구분되지는 않지만, 가장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상대로서 ‘고유한’ 사랑을 주고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민이 언니의 고민을 루카 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대입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심성을 다 갖고 산다고 합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연옥에 간다면, 작은아들처럼 통회하며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으로 정화되어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면(루카 6,36)’ 비로소 천국 기쁨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을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맞아들여 잔치를 벌이자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느님과 늘 함께 있고, 하느님의 것이 다 우리의 것이니, 하느님과 한 마음으로 모든 영혼의 구원을 즐기고 기뻐할 것입니다. 만약 민이 언니가 남편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면 ‘하느님에 의해 회복되어’ ‘천사들과 같아져(마르 12,25)’ 있겠기에, 아버지와 한 마음으로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천국에 들 날을 기다리고 응원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고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6-38)
또, 성경에는 죽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마태오 17,1-9) 때에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장)에서는 부자가 저승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라자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세상에 있는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 라자로를 보내줄 것을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시고, 이제와 항상 영원히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돌보시고, 내게 말씀을 건네시고, 내가 슬플 때 함께 슬퍼하시고, 내가 기쁠 때 함께 기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특정한 시점에 ‘짠’하고 창조 작업을 마치시고 그 이후부터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다스림에 맡겨놓고 물러나 쉬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부모가 아기를 낳을 때뿐만 아니라 기를 때에도 영혼의 완성을 위해 돕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면서 당신의 창조 질서가 완성되도록 ‘사랑하는 일’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히 사랑하는 일을 하시니, 우리도 영원히 사랑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 때문에 슬퍼하시면 우리도 슬퍼할 것이고, 사랑 때문에 기뻐하시면 우리도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영혼과 놀라운 삶의 이야기와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를 나누느라 즐거울 것입니다. 또한, 통공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참 고마운 특전입니다.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마태 28,18)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활동하시니,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미 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는 천국의 기쁨을 품고 있는 영원이고,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는 영원입니다.
천국에 대한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압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을 물론이고 남들보다 덜 가진 것들도 감사합니다. 영원 속에서는 남들보다 덜 가졌던 것들이 하느님에 의해 후하게 갚아져 부족함이 없을 것임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미소 한 번 지을 수 있다면, 사랑어린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있다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루카 11,2)하는 데에 귀한 몫을 한 것이고, 백 배, 천 배로 갚아질 ‘거룩한 씨앗’을 천국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참으로 귀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시니 참으로 복되고,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하느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으니 참으로 훌륭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부터’ “용기를 내십시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마태 9,22 참조) 아자! 아자!^^
2017년 6월과 7월에 엉터리 레지나 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히브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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