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십자가여야 하지?
한동안 저는 매일 성체조배를 하면서 하느님과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전지전능한 분이 가까이 지켜주고 계셨으므로 항상 든든했고, 제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하느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아무 걱정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제 인생이 뜬금없는 방향으로 꼬이게 되었고, 그렇게 이끌어간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허락하신 하느님도 그만 싫어졌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왜 굳이 이 세상을 죄와 고통으로 물들게 하시고 나를 따르라면서 매달려 계시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전지전능하고 선하신 하느님이 당신이 세상에 허락하신 죄와 고통으로 인해 십자가에 매달려서 ‘너희가 나만큼 아프지는 않지 않느냐’고 묻고 계시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순 덩어리였습니다. 종교는 인간들이 죽음과 고통을 나름대로 이겨내 보고자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하였고 친하게 지냈던 하느님도 제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나 싶었습니다. 종종 십자가 앞을 지나면서 째려보고 혀를 차곤 했습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하느님과 씨름하던 중에 세월호 사건을 만났습니다. 제 고통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고통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함께 나누어 가지는데 어떤 이는 상대방의 죄로 인해 자신의 죄에 비해 더 무거운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의 대가나 주님이 주시는 견책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해 고통을 겪을 수도 있고, 그런 고통을 십자가라고 하는가보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따르는 보상은 영원 속에서 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십자가의 의미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필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도 지라고 하시는 걸까?’ 책을 찾아보고 교리 선생님께도 물어보아 제법 좋은 답들을 발견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웠습니다. 하루는 이 지긋지긋한 문제로 수년간이나 씨름하다니,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잠결에 남편이 출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남편이 문을 열어놓고 가서 누군가 침입한 것 같았습니다. 내려가 문을 잠그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는 계속 들렸습니다. 기어이 그가 방까지 들어와 침대 발치에 앉았습니다. 검은 소 모양의 마귀 같았습니다. 검은 소가 제 몸을 무겁게 누르더니 목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가위에 눌렸을 때 구마경을 외우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웬일인지 100% 퇴치율을 보이던 구마 기도가 효력이 없었습니다. 안간힘을 써서 검은 소를 이겨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퍼뜩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외쳐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마지못해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그래, 십자가! 인정!"하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스르르 검은 소가 사라졌고 가위에서 풀려났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마음속의 미움과 원망이 말끔히 개이고 십자가를 흘겨보던 버릇도 없어졌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긴 어둠의 터널 후에야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기쁨이 차 올라왔습니다. 다음날 주일미사 중에 신부님께서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엄밀히 말해 신자라고 할 수 없으며 십자가를 알게 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늘 절묘한 타이밍으로 말씀을 주시는 성령께서 제게 재차 십자가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였습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은 알지만 저렇게 무능하게 고통을 겪는 예수님은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가 바로 저였던 것입니다. 다른 이의 잘못으로 인해 부당하게 당하는 고통들,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들, 그것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신비 안에 있으며, 십자가야말로 영광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제 지난 고통들이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검은소 쇼’를 통해 십자가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십자가로써 제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주신 예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감사는 제가 사랑으로 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임을 이제는 압니다. 앞으로 겪게 될 어려운 일들 앞에서 나를 온전히 죽이고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영광을 희망하면서 평화를 잃지 않고 고통의 신비를 잘 살아낼 수 있는 은총을 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찬가 (콜로 1장 19-20절)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2016년 5월 15일 김유리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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