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신앙 자료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 오늘은 나, 내일은 너/춘천교구 주보 11월 특집

김레지나 2016. 11. 29. 11:06

‘오늘은 나, 내일은 너’ (HODIE MIHI CRAS TIBI)1

1. (特別禧年)의 보배롭고 상서로운 기운(氣運)과 함께 시작됩니다.

  11월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특별히 되새기는 위령성월이다. 위령성월을 맞아,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자신의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이 뜻깊은 시기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알아본다.

 

1. 위령성월의 의미

 

  위령성월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는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이 기도가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 는 전통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 는 신자들이 위령성월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된다. 즉 하느님 나라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된 공동체로서 이 공동체의 주인이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느님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고 이 안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도 살아있는 이들도 동일한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결국 살아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유대감을 통해 살아있는 이들은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성인들도 세상에 있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이같이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통교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위령기도가 가능한 것이며 아울러 위령성월도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위령성월에 대한 보다 뚜렷한 신학적 근거는 1245년 제1차 리옹 공의회에서 선포된 ‘연옥(Purgatorium)에 대한 교리’ 로 꼽힌다. 리옹 공의회 이후 교회는 연옥 존재에 관한 교의를 지속적으로 확인해 왔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보통 사람들이 세례후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받으면 범한 죄(Peccantum)와 영벌은 없어질 수 있으나 잠벌은 남게되며 이 잠벌은 보속을 통해야만 탕감 받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보속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치러야 할 보속이 있다. 그 보속을 치르는 곳이 연옥이고 또 죄를 씻는 정화의 장소가 연옥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속죄를 위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기도와 자선 행위 및 미사 봉헌 등으로 이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위령성월은 연옥 영혼을 위한 특별한 기도의 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위령성월 중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은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알리고 있다.

 

2.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교회는 죽음이 인간의 죄로부터 왔다고 가르친다. 태초의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 지은 죄를 원죄라 하는데, 이 원죄 때문에 인간은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를 전해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창조 한 하느님만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죽음을 인생 의 마지막 순간에 만나는 하나의 관문이자 ‘하느님의 축복’ 으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의 의미가 더욱 심화된다. 무엇보다 신약에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 의 죽음과 연결하지 않고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원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 진 죽음과 정면으로 대결했고, 부활로써 죽음을 넘어섰다. 이로써 이제 더 이상 죽음은 공포 의 대상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과정이자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되었다. 원죄로 인해 죽음에 직면해야 했던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되고 영원한 생명을 향 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긴 방법이 죽음을 통해서였다는 것 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을 내게서 멀리 해달라” 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결국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며 돌 아가셨지만 그리스도는 그 고통과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간 이들의 모습은 순교자들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인간적인 불행과 참을 수 없는 고통,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생명을 얻었다 는 것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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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은 특별희년(特別禧年)의 보배롭고 상서로운 기운(氣運)과 함께 시작됩니다.

3. 죽음 이후의 종말사건: 천국·지옥·연옥

 

「천국」

  천국이란 의미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근심 걱정 없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곳’ 정도의 피안적인 장소로 이해되어져 왔다.

  초대교회에서 천국은 현실과 다른 종말론적 실재였다고 한다. 이레네오는 천국을 풍요로운 물질 세계가 회복되는 왕국으로 여겼고 아우구스티노는 완전한 영의 세계로 이해했다. 한편 중세에는 새 예루살렘과 같은 영원한 도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곳, 그리스도와 사랑의 결합을 이루는 곳이라는 개념이 천국에 대한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당 천국이란’ 하느님께서 착하게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놓으신 어떤 특정한 장소와 연관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이 같은 천당의 개념에 대해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감추어 계신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영역’ 이라고 밝힌다. 1950년 11월 1일 성모승천과 관련해서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 고 믿을 교리로서의 선포가 이뤄진 바 있는데, 여기서도 특정 장소로서의 천당보다는 ‘천상 영광’ 의 처지로만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셨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즉 하느님 나라를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잔치’ (마태 22,1-10 루카 14,12-24)로 비유하거나, ‘겨자씨’ 로 비유하셨다(루카 18,18-19). 사랑을 향한 겨자씨 같은 선택 안에서 천당은 이미 현세에서 시작된다는 의미이고, 또 사랑의 친교를 통해 체험되는 용서와 평화 그리고 행복 등이 천당의 징표들로 풀이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천국 천당은 ‘인간의 이기심과 외부의 유혹을 이겨내고 남을 위해 또 세상의 평화를 위해 뜻을 둔 가운데 현세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내면서 완성을 향해 성장해 나아가는 것’ 으로 신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특집

「지옥과 연옥」

  지옥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기 위한, 유황불이 타오르고 마귀들이 삼지창을 들고 영혼들을 고문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종말을 주제로 한 옛 성화(聖畵)들에서도 지옥 영혼들이 흉악한 몰골을 한 악신들에 둘러싸여 뜨거운 불가마나 불길 속에서 고통 받는 형상이 천국과 대비되는 장면으로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옥에 대한 이미지는 교부 시대 때부터 의문이 제기됐다. 지옥의 ‘영원한 형벌’ 이 유한한 인간에 의해 범해지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하느님 사랑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라는 물음이었다. 신학자들은 지옥과 관련한 편견에 대해 ‘지옥은 당신 뜻을 거슬러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미리 준비된 특정된 장소가 아니라, 세상 안에 살면서 인간들이 자행한 범죄 행위 안에 내재하는 결과가 죽음과 함께 궁극적으로 굳어진 처지를 의미하는 것’ 으로 풀이한다.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이탈함으로써 결국은 자신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마는 처지가 지옥이라는 것이다.

  연옥 교리는 가톨릭 교회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신앙이다. 예전에는 ‘단련교회’ , 또는 ‘단련지 교회’ 라고 했던 연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죽은 후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충만히 누리는데 장애되는 온갖 흠들을 제거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정화과정의 상태를 말한다. ‘연령’ (煉靈)은 바로 연옥에 있는 영혼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뚜렷이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연옥 존재는 일찍부터 교부들에 의해 긍정돼 왔다. 예를 들면 성 아우구스티노는 죽은 이들을 위한 전구를 인정한바 있다.

  연옥에 대한 믿음이 교리로 정립된 때는 13세기경이었다. 즉 1274년 제2차 리옹공의회에서 연옥에 대한 교리를 공식 인정했으며 1439년 피렌체공의회에서도 이를 다시 확인했다. 종교개혁 과정에서 마르틴 루터가 연옥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는 상황이 빚어졌으나 가톨릭교회는 이후 연옥에 관한 교리를 재정비하게 되었고 1545년 트리엔트공의회서 연옥 교리를 재차 확인 했다.

  종합적으로 ‘우리보다 먼저 간 이들을 위하여’ 중재 기도를 계속 바쳐 온 오랜 전통에 근거, 교회는 ‘죄에 대한 적절한 보속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하느님 뵙는 데에 방해되는 마지막 장애를 연옥에서 씻는다’ 고 가르친다. ‘연옥의 정화과정은 얼마나 지속되는 것일까’ 라는 것은 연옥에 대해 갖는 가장 큰 궁금증 중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은 현세 시간 밖에서 진행되는 것이므로 우리로서는 그 과정이 일어나는 시간이나 공간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생존자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선행을 행하고 미사 봉헌을 통해 연옥의 ‘의인’ 들을 도울 수 있다. 이러한 기도는 통공(通功) 신앙의 표현이다.

                                            출처/가톨릭신문,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