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신부님들 말씀

예수님과 함게 죽으라. 김태광 아오스딩 신부님

김레지나 2016. 6. 12. 22:35

평화방송 강의 / 자비의 사도 여정 / 회복/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라.

 

(전략)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에 벽을 뚫고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함께 음식을 드시고, 만져보라고도 하셨어요.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몸이었다가 만질 수 있는 몸으로도 되신 거여요. 문이 닫혀져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변형이라는 것은 ..... 내면적인 것이 바뀐다는 것은 겉으로는 변화가 없지만 하느님의 힘으로 회복된다는 것이에요? (방송 강의를 대충 받아쓴 것을 채워넣은 문장이라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죽음, 묻히심, 부활의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지만..... 우리가 왕노릇하고 살아갈 때 하느님의 자비는 내 안에서 발휘되지 않아요.

자비의 여정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음으로 인해서 더 이상 자비의 여정이 아니라 회복의 여정이게되 됩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에서 죽고 묻히고 부활하신 여정은 파스카 신비의 여정이자 회복의 여정이다. 이 말은 우리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시면서 걸으셨던 그 길을 같이 따라걸을 때 회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회복의 길은 없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함께 하다 보면,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묻히고 부활할 수 있습니다.

 

3단계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죽어라입니다.

우리 전례력에 있어서 가장 최절정이 성삼일 전례이다. 그 중에 성금요일에 예수님 수난 예식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십자가 경배를 합니다. 십자가의 길도 합니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성목요일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경배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나의 존재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경배하는 것이고 동시에 나의 존재도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가 부활의 은총을 만끽하지 못하느냐면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수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죄를 쳐이기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피흘리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사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뀌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로마 6: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6: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6: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갈라 2:19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2: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

회복의 3단계.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예수 그리스도 함께 다시 사는 것을 믿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번째 십자가 바라보기. -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악행과 죄악을 본다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53: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의 상처로 우리가 나았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악행을 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눈물 흘리면서.. 밖에 나가서는 또 싸우고..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님이 으스러진 것은 내 죄악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거룩한 몸을 보면서. 내 죄악 때문임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을 감상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두번째 십자가의 조명 받기 - 하느님의 의도적인 뜻을 깨닫고 나와 예수님의 일치를 깨닫는다

십자가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왜 예수님의 당신의 아들을 그렇게 으스러지게 찔리게 하셨을까요?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사 53,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고, 하느님은 그를 으스러뜨리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상처로 치부할 게 아니라, 나로 인안 상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끔...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조명을 받으면서 예수님이 고통 받고 죽으신 것은 하느님의 의도하심이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

3. 십자가에 못에 함께 못박히기...

예수님이 찔리고 나무에만 의지한 채 매달리셨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갈라 5: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갈라 5,17 5: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5:19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5:20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5:21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육의 행실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예수님 묵상하면서 육을 매달라는 것입니다. 욕정과 욕구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행실을 이해를 못한다.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악을 저지르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 마음 옆에 악이 도시라고 있고....

근본적으로 육의 생활을 못박는 것도 중요합니다. 손과 발 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옛 인간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10.5.. 2.19..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더이상 예수님의 몸을 지탱하는 것은 대못이 아니라 나의 악행이고 죄악입니다. 근본적으로 이제는 예수님께 이런 것 고쳐주세요. 문제 해결해주세요. 기도하고.. 그게 아니라, 나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못박으라는 것이에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루카 23: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 아버지, ‘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제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긴다고 했어요. 다른 성경에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죠. 이제 죽음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다는 . 우리가 다 구원이 되어야 돼요. 이제는 다 이루게 하시려면 이제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꼐 죽어야 합니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다. 내 존재 자체가 옛 인간으로는 안 됩니다.

에페 4,22. 4: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4: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4: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날에 생활 방식에 젖어만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묵주기도를 많이 하고 성제조배를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건만.. 왜 내 존재 자체가 변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수술할 떄 가장 좋은 상태는 수술대에 누워서 가만히 있는 상태에요. 그래야 하느님의 수술을 하실 수 있어요. 내가 눈 뜨고 살아보려고 두리번거리면 안 됩니다. 피정을 가면 자신을 죽이지도 않고, 근본적인 해결을 하지 않은 채, 옛 인간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배웁니다. 내 중심이 변하지 않고 주워들은 걸로만 내가 기쁘고 행복하구나 해봐야 금방 또 울게 됩니다.

자비의 여정으로 끝나면 되는데, 자비를 전하고 사도가 됩시다 하면면 되는에 왜 회복의 여정을 하는가? 내 존재가 더 이상 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버지가 되어 방황하는 이들을 끌어안아야 될 것 아니에요. 옛 인간 작은 아들은 이제 죽고, 아버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비를 구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주님 살려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였던 나 자신이

이제 당신이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걸어가셨던 그 여정 대로

주님, 저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