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3일 광주평화방송 조영대신부님 강론:
마르코 12.18-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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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 죄도 크게 짓지 않았으며 하느님을 믿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큰 시련과 고통에 처해 있는 경우를 보면서,
흔히들 위로의 말로 하느님께서 뜻이 있어 고통을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글쎄요. 혹독한 시련 속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이 쉽게 가 닿을까요?
세월호의 희생자들, 순박한 어린 학생들의 그 억울한 죽음에 있어
이 사건과 하느님의 정의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그 희생자들의 한을 씻어주시고 그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당신 정의의 승리를 드러내실 것임을 믿고 의탁하며 올바름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할 것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본연의 태도입니다.
오늘 1독서는 기꺼이 자선을 베풀었지만 늘 불행만 만난 토빗과 일곱번이나 결혼했지만 첫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매 번 신랑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사라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얼마나 괴로웠으면 고통과 모욕을 당하게 되기보다는 목숨을 거두어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간절히 의탁하며 올바름을 지켜나갔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게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토빗과 사라는 죄도 짓지 않았고 하느님을 진실로 섬겼던 모범된 의인이었으니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 욥을 연상케합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요컨대, 그 고통의 상황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하느님을 붙들고 씨름했던 욥의 이야기는
고통은 상선벌악의 틀 안에 갇혀있지 않은 신비임을 역설하면서
인간의 이해를 무한히 넘어서시는 하느님,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 앞에 올바르게 충실히 남아있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일깨워줍니다.
토빗과 사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겪은 시련과 고통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해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하느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구들이 늘 진실과 선행의 삶을 살았고 시련 속에서도 목숨을 끊지 않고 하느님께 끝까지 의탁하며 하느님 앞에 올바르게 서있고자 했던 그 신앙과 인내를 우리 신앙인의 귀감으로 세워주시고,
끝까지 올바름을 지킨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당신 정의와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신다는 확신을 심어주고자 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토빗과 사라를 바라보면서 더 나아가 십자가상 구세주 예수님, 사도들과 수많은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이해할 수 없느 시련들 속에서도 인내하며 신앙을 잃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갈 때 궁극적으로는 가장 큰 복, 곧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임을 굳게 믿고,
오늘도 각자의 십자가를 충실히 짊어지고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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