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영신 수련

10. 성령의 마음

김레지나 2015. 3. 6. 02:15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늘 도움
‘사랑의 주님’ 항상 상기시켜줘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채 허무의 덫에 빠지고 마는 에고의 마음만 있다면 참으로 우리는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일 것입니다. 허나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일치 내지 합일을 끊임없이 기억해 내며 그 길을 향해 걸어가게끔 해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과 하나된 마음이야말로 우리의 참되고 진정한 모습입니다.

우리 마음과 함께하고 계시는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상기시키십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하느님 사랑의 품을 떠나본 적이 없다고, 하느님의 사랑을 떠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라고, 우리가 하느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요 망상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박해입니까, 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 가지를 열거합니다. 참으로 그 어떤 것으로 인해서도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지면 우리의 존재 자체, 우리의 생명이 말살되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이란 단지 육체적 생명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존재 본래의 생명 즉 영적 생명까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을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치셨다고도 생각합니다. 물론 살아가며 하느님 뜻과는 다른 짓을 하기도 하고 하느님께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말로 다 할 수 없는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의 좁은 머리로 한계 지어서는 안됩니다.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의 사랑은 크고 넓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애비 애미를 생각해 봅시다. 자식이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곤 집을 나갔다고 합시다. 그 자식이 나중에 잘못했다며 돌아왔을 때 애비 애미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식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고 그에 상응한 벌을 내린 다음 그 벌을 다 이행하고 나면 받아들입니까. 그저 잘 돌아왔다며 묻지 않고 끌어안아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처럼 못난 인간들도 사랑을 그렇게 할 줄 압니다. 하물며 하느님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죄를 짓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관점은 루카 복음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이 그토록 크니까 우리는 맘껏 제 갈 길을 가며 개망나니 짓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다 거둬 주시니까 말입니다. 천만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아니까 비로소 온몸과 마음으로 참되고 진실되게 아버지의 뜻을 좇고 아버지를 사랑하고자 할 것입니다. 의무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지못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평온하게 따라갈 것입니다.

늘 깨어 있읍시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 사랑을 망각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계심을 잊지 않도록. 잠시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바로 이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고, 에고의 거짓된 늪에 빠져 지옥의 아수라장을 방황하며 영혼과 마음이 황폐해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명 예외 없이 너무나 아름답고 귀하고 좋은 존재들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된 존재! 더 이상 무엇을 바라며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유시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