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신앙 자료

★☆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 大 데레사) -하-

김레지나 2014. 5. 26. 21:28

현실감각 동반된 올바른 영성의 길 제시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9. 성녀 데레사의 「서간집」

▲ 스페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태어난 방에 장식된 데레사 성녀 상. 방은 작은 경당으로 꾸며져 있다.


   성녀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로 인도해주는「서간집」

 지난 호까지 「자서전」, 「완덕의 길」, 「영혼의 성」과 같은 성녀 데레사의 주요 영성 작품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사실 그간 한국교회 신자들은 성녀의 이런 수준 높은 영성 서적들을 통해 지극히 추상적이고 영적으로만 묘사된 '신비가'로서의 성녀 데레사만을 접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성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탈혼 속에 보냈다거나 마치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반쯤 천사 모습을 한 사람처럼 그려져 왔던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특히 성녀 선종 이후, 바로크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적 환경 속에서 성녀를 지극히 천사적 존재로 부각시키거나 모든 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특은을 입은 특별한 존재로 내세워 당시의 대중신심을 북돋우려 했던 작가들의 뻥튀기가 한몫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성녀의 모습은 가히 가관입니다. 몸뚱이도 없고 음식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는 그런 천사적 존재, 거의 언제나 공중 부양을 하며 늘 탈혼 속에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천상만을 쳐다보는 모습이 우리가 성녀에 대해 갖는 대체적 이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녀 데레사에 대한 그런 잘못된 이미지를 한 방에 날려버릴 작품, 성녀 역시 우리와 같이 땅을 딛고 살았고 먹거리에 대해 걱정하고 질병으로 시달렸으며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고민한 평범한 인간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바로 성녀가 쓴 수많은 편지들입니다. 성녀의 편지들은 그간 우리가 생각했던 성녀 데레사에 대한 극단적 이상적 모습에다 현실적 모습을 가미함으로써 성녀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로 인도해 줍니다.
 


 성녀의 속살을 보여주는 작품
 일생 동안 성녀가 몇 통의 편지를 썼는지 정확히 집계하기는 어렵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편지보다 그간 사라져버린 편지가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 편지 가운데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것들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건대,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지만, 성녀는 약 1만 통에서 1만 5000통 정도의 편지를 쓴 것으로 사료됩니다.

 성녀의 인물됨을 비롯해 성녀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편지는 상당히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편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인류가 활용해 온 가장 기본적 소통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는가, 그 편지를 통해 무슨 내용을 나눴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품부터 성격, 습관, 인간관계, 그가 지향하는 가치관, 시기마다 그가 고민했던 문제, 앓았던 질병, 처리해야 했던 현안 등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요소가 종합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또한 편지에는 공식적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그 사람의 속내가 가감 없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사람이 숨기고 싶은 인간관계, 치부까지도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편지를 읽는 것은 그 사람의 속살을 보는 것과 진배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의 편지 모음집인 「서간집」은 그 글을 쓴 성녀의 입장에서 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마치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만인(萬人)에게 내 메일함에 있는 모든 편지를 열어 보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그만큼 더 성녀 데레사의 실제 모습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만나게 됩니다.

 
 편지의 수취인들과 그 내용

 현재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성녀의 편지는 총 486통으로, 스페인의 몬테 가르멜로 출판사를 통해 「성녀 데레사의 서간집」이 나오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우여곡절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486통 중에서도 성녀의 친필로 쓰인 원본은 250통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필사된 것입니다. 전해져 오는 성녀의 편지는 1546년부터 시작해서 선종한 해인 1582년까지 쓰인 것들이지만, 특히 편지 분량이 많은 시기는 성녀의 가르멜 수녀원 창립 활동이 본격화된 1567년부터 1582년까지입니다.

 성녀가 쓴 편지의 수취인들을 그룹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족 구성원들에게 보낸 편지, 2. 맨발 가르멜 수사들에게 보낸 편지, 3. 맨발 가르멜 수녀들에게 보낸 편지(약 30여 명의 제자 수녀들). 4. 신학자들과 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약 24명의 신학자, 영성지도 신부 등), 5창립에 협력한 사람들(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하는 약 27명).

 성녀가 쓴 대부분의 편지에는 여타 다른 영성 작품들과 달리 어떤 가르침을 전하려는 의도가 전혀 묻어나지 않습니다. 다음은 편지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주제들입니다. 1. 성녀가 쓴 편지에는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성녀가 겪었던 질병, 고민했던 개인적 공동체적 문제, 가족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 성녀와 친분을 맺었던 다양한 사람들과의 내밀한 관계 등이 그렇습니다. 2. 우리는 편지를 통해 성녀가 몸담고 살던 당시 스페인을 비롯해 유럽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3. 무엇보다도 편지에는 성녀 데레사의 활동, 특히 창립 활동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많은 구체적인 정보들이 있습니다. 4. 또한 편지 중에는 성녀의 생애와 관련된 직접적 자료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습니다.

 
 현실 감각이 동반된 건강한 영성

 성녀 데레사의 「서간집」은 우리로 하여금 '영성'에 대한 더욱 균형 잡힌 이해를 도모하게 해줍니다. 영성은 단순히 신비스럽고 추상적인 그 무엇인가를 두루뭉술한 어휘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것이고 구체적 삶이자 역사입니다. 영성은 자신이 터한 삶의 자리, 자신과 맺는 수많은 사람,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공동 자아실현의 길로서 건강한 인간적 바탕 위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영성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서간집」은 우리에게 현실 감각을 지닌 올바른 영성이 무엇인지 알려줄 것입니다.

------------

 

 

과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0. 성녀 데레사 영성의 바탕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 탈혼 중에 예수님을 만나는 데레사 성녀. 아빌라에 있는 데레사 생가 색유리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일찍이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이셨던 폰 발타사르는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 대답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인류 구원을 향한 그분의 십자가 여정에 동참하는 사람,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기까지 그분 뒤를 따르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유일하고 참된 순교자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과 더불어 죽고 부활하는 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그분을 닮아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순교'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열망했던 최고의 영성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드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라는 의식은 초세기 당시 신자들이 가졌던 보통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이 돼야 할 예수님

 그러나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신앙'은 과연 어느 정도 밀도를 갖고 있을까요? 최근 어느 앙케이트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순위는 1건강 2자녀 3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신앙은 신자들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고, 어찌 보면 신앙을 취미생활과 거의 같은 등급에 두고 생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제가 여기서 굳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 바탕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기본이야말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익히 잘 아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제대로 놓여 있지 않을 때 그 위에 세워지게 될 건물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근본 정체성에 충실하고 그 정체성을 완전히 꽃피우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신앙생활이 지향하는 바이고 또 그것이 바로 영성생활입니다. 성인, 성녀들의 삶이 이런 근본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인 뜬구름 잡는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교회가 가르쳐온 계시 진리를 충실히 믿고 고백했으며 자신들의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온몸을 던져 그 진리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가르치고 고백해 온 모든 계시 진리의 중심에는 계시의 정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교회는 인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됐으며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그리고 부활을 통해 역사 안에서 실현됐고 궁극적으로는 세말에 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영성: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전망은 영성생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세례를 통해 원죄로 부패된 죄인 상태에서 의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와 동시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됨에 참여하며 그분과 더불어 성부의 공동 상속자로 그 품격이 고양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내주(內住)하시며 그와의 인격적 관계를 심화시켜 나가십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적 여정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그분의 공로로 인해 그가 의화됨으로써 시작되며 그가 걸어가는 구체적 여정 또한 참된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한 길을 계시하신 그리스도를 뒤따르며 그분을 닮아가는 데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인간 구원과 성화 그리고 영적 여정의 절정인 하느님과의 합일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영성생활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 계시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 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성'을 자신의 삶 속에서 얼마나 구현해 내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돼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성녀 데레사의 영적 가르침 역시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녀가 일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이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 갔는가, 또 성녀에게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이며,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는가, 영적 여정의 발전 단계에서 그리스도는 성녀에게 어떤 역할을 하셨는가 하는 점들이 성녀의 영성을 이해하게 해주는 핵심 주제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리스도'야말로 성녀 데레사의 영성, 그리고 그 영성이 담겨 있는 성녀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열어젖히는 핵심 열쇠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 호부터 여러 회를 할애해서 성녀의 영성을 이해하는 근본 바탕으로서 성녀의 생애와 영성 안에서 그분이 예수님과 맺었던 관계에 대해 조명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성녀 데레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 여러분 또한 그것을 거울삼아 여러분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과연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단순히 주말에 성당에서 취미생활을 즐기기 위해 마지못해 만나야 할 거추장스러운 분은 아닌가요? 아니면 그저 추상적인 진리이신 분? 아니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3자는 아닙니까?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그분을 여러분들의 삶의 주인이요 내 모든 삶을, 사랑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가장 소중한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

 

어린 시절 '주님의 기도'로 예수님과 첫 만남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1.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①

 

▲ 순교하러 가는 어린 데레사와 오빠. 아빌라 생가 성당의 색유리화.


 성경과 교리서만으로도 성인(聖人)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일 미사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핵심 중의 핵심을 이룹니다. 신ㆍ구약 성경을 비롯해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가르치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인ㆍ성녀가 되는 데는 사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성경 한 권과 그 진리를 풀어서 설명해 주는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이 담긴 교리서 한 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신심 깊은 겸손한 촌부(村夫)가 신학자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세 당시 사회 내에서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 성녀는 부모님 덕분에 글을 깨치고 어려서부터 적지 않은 신심 서적들을 읽고 실천하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불태워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이 구체적으로는 강생하신 하느님, 즉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 깊어 갔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성인이 된 것은 이러한 '초심'(初心)에 끝까지 충실했고 그렇게 그분과의 관계를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녀의 일생을 '예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훑어보는 것은 성녀의 영성을 올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틀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다

 어린 시절 성녀가 처음 만난 대상은 예수님이라는 구체적인 한 인격이라기보다 조금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추상적인 하느님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데레사가 접한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를 훨씬 너머 저 세상에 계시며 광대무변하시고 모든 것에 침투해 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아직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성녀는 부모님과 미사에 참례하면서 들은 신부님들의 강론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벗이며 신랑으로서 무엇보다 강생을 통해 우리 곁에 오셨다는 진리를 들어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느님 개념을 전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서 배운 묵주기도 드리길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즐겨 읊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완덕의 길」 후반부에 보면 주님의 기도 해설이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성녀가 그 기도의 매 구절을 예수님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묵주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기도에 익숙해졌고 이를 통해 그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조금씩 맛 들여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데레사는 이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강생하셔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 각인시켜 갔습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 아직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관념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통한 예수님과의 만남은 훗날 성녀의 영적 성장에 토대가 됐습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여정에서 성녀에게 도움이 된 또 다른 것으로 성모님 신심을 들 수 있습니다. 성녀의 어머니는 성녀가 어렸을 때부터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갖도록 자주 가르쳤습니다. 성모님 신심은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에 중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강생 교리로 인도해 주실 뿐 아니라 사실 강생 교의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피앗'(fiat: 예)을 통해 오랫동안 인류가 고대해 오던 구세주께서 인간이 돼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느 현대 신학자는, 성모님이야말로 예수님과 관련된 교회의 가르침들을 보호하는 최고 수호자라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은 어린 데레사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 좋은 환경이 돼줬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묵주기도, 더 나아가 성모님과 성인들에 대한 깊은 신심, 다양한 성인전에 대한 독서, 16세기 당시 스페인에 널리 퍼져 있던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성화들은 어린 데레사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강생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을 형성하게 해줬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 데레사는 인간과는 먼 상당히 추상적인 하느님, 심판관이신 하느님에서 인간과 가까이 계신 하느님, 그래서 인간의 육(肉)을 취해 오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겟세마니의 예수님'을 사랑한 소녀 데레사

 그러나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 인간적 애정에 대한 관심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성녀는 그만 냉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태를 극복하게 해준 것은 아버지로 인해 들어가게 된 아우구스티노 수녀원 기숙사에서의 신앙 체험이었습니다. 당시 그곳 사감 수녀님들의 모범적 신앙생활을 보면서 성녀는 점차 어린 시절의 거룩한 열정을 다시 키워가기 시작했고 막연하게나마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성녀는 점점 기도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특히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예수님 모습에 깊이 빠졌다고 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마셔야 할 고통의 잔 앞에서 고뇌하며 피땀을 흘리시는 예수님, 그러나 성부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으며 그 잔을 받아 마신 예수님. 사춘기 소녀 데레사의 마음은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잦아들어 갔습니다. 성녀는 그렇게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긴 채 늘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묵상하며 잠들었다고 합니다(자서전 9,4). 그래서 성녀는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예수님의 수난 사화를 읽곤 했습니다(자서전 3,1).

 이렇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녀에게는 추상적이고 멀리 계시던 하느님이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인간 예수님께서 내면에서부터 자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점차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춘기 소녀 데레사가 관계를 맺기 시작한 하느님은 예수님으로서 그분은 데레사에게서 모든 실존을 건 전인적 응답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당시까지 성녀의 삶에서 예수님이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실로서 객관적인 존재론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체험되는 신앙이자 의미 충만한 신앙으로서 심리적인 차원에서도 성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

 

스무 살 때 그리스도의 정배로 거듭나다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2.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②

 

▲ 성경과 함께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성녀 데레사. 아빌라 생가 성당 색유리화.


 수도성소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

 

 

 사춘기 소녀 데레사는 아우구스티노 수녀원 기숙사에서 약 1년 반을 지내며 신앙의 열정을 회복했고, 사감 수녀들의 모범을 보며 수녀가 되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병에 걸려 그만 기숙사 생활을 접어야 했고 아버님의 뜻에 따라 살라망카 근교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큰 언니 마리아의 집에서 휴양하게 됩니다. 그 근처에는 성녀의 숙부님이 사셨는데 성녀는 가끔 그곳에 가서 숙부님에게서 신앙과 관련된 유익한 얘기며 숙부님이 귀히 여기던 영성서적들을 뒤적여 보는 걸 낙으로 삼았습니다.

   어느 날 그곳 서가를 뒤적이다가 성녀는 「성 예로니모의 서간집」을 읽으며 심금을 울리는 성인의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현명한 일인가?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가던 길을 멈춰서야 되겠는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데레사에게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에 부담이 됐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굳센 결의를 다지며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도록 촉구하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을 들으며 데레사는 그만 정신이 번쩍 뜨였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성녀는 큰 용기를 얻어 아버지께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를 말씀드리며 수도자로서의 첫걸음을 걷게 됩니다(자서전 3,7).

 

 수도성소를 키우는 힘이 됐던 주님의 수난 묵상

 

 이 사건 이후 성녀의 삶에서 예수님의 현존은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갔습니다. 어린 시절 막연한 추상적 진리이자 머나먼 당신으로 여겨졌던 하느님이 이제 살과 뼈를 가진 분, 즉 예수님 안에서 투영되어 드러났으며 그분이 자신을 원한다는 걸 성녀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칠 당시 여성으로서 누군가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동시에 온전히 사랑받고 싶었던 원의를 이제 성녀는 사람이 아닌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데레사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버지는 이내 딸의 수도성소를 반대하고 맙니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수도성소를 키워가는 데 있어 성녀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자서전 3,6). 이 시기를 거치며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구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란 진실을 더욱 깊이 알아들었으며 결국 아버지의 반대에도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성녀는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정배로 받아들이다

 

 이렇게 해서 성녀는 1535년 스무 살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성녀는 온전히 수도생활에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성녀는 자신이 공적으로 발한 수도 서원을 '혼인 서약'으로 생각했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점점 더 성녀의 인격 안에 깊이 뿌리내려갔습니다. 한 마디로 성녀는 수도생활을 그리스도와의 결혼생활로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훗날 성녀가 자주 자신의 허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간적인 우정이 양심의 걸림돌이 되곤 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성녀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서 요구되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에 비춰봤을 때 인간적인 우정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영혼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만나다

 

 이 시기에 성녀는 당대의 대표적 영성가 중 한 사람인 오수나 신부의 「제삼 기도 초보」라는 책을 접하게 됩니다. 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던 성녀는 치료를 위해 잠시 수녀원을 나와 베세다스라는 작은 마을에 살며 예전에 도움을 받았던 숙부님 댁에 가끔 들렀고 거기서 바로 그 책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 책은 당시 새로운 영성 운동 가운데 하나인 '거둠 기도' 방법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영성 교과서였는데, 성녀는 이 책을 보면서 '거둠 기도'를 수련하는 가운데 더욱 깊은 영성 생활을 위한 도약을 하게 됩니다. 성녀는 이 기도를 통해 자기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이미 현존해 계신 그리스도를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처럼, 성녀는 그간 자기 바깥에서 주님을 찾아왔는데, 비로소 그분이 이미 자신 안에 거하고 계심을 깨달았으며 그때부터 자기 내면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성녀는 당시 자신의 기도가 어땠는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저는 제 안에 계시는 우리의 보화이시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 안에 현존시키려 애를 썼습니다"(자서전 4,7). 또한 당시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자 노력했습니다(자서전 11,9).

 

 가장 힘쓸 바는 주님의 일생을 묵상함

 

 성녀 데레사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궤적을 따라가며 알 수 있듯이, 성녀가 예수님을 알아가고 사랑했던 데에는 근본적으로 '주님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묵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주제야말로 구원 역사의 정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는 데는 어떤 거창한 지식이나 신묘한 초자연적 체험이 필요치 않습니다. 성성(聖性)을 향한 길은 여러분 가까이, 아니 여러분 안에 이미 씨앗처럼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 이미 살고 계시는 주님을 느끼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궁구(窮究)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준주성범」 1권 1장 1절의 말씀은 늘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신앙생활의 규범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니, 우리가 진정으로 광명을 받아 깨우칠 마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생활과 행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쓸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함이다."

----------------------------------------------------------------

완덕, 성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여정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3.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③

 

▲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 박물관에 소장된 예수상 ‘보라, 이 사람을.’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갈등

 

수도서원을 발한 후 중병을 앓았던 젊은 수녀 데레사는 점차 건강을 회복하면서 그간 겪었던 여러 가지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아빌라의 여러 계층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매력적이고 천성적으로 사교적인 데다 사람을 좋아했던 젊은 데레사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우정에 집착했습니다. 당시 성녀는 그렇게 사람들과의 우정에 집착한 나머지 자기 힘만으로는 그런 애정을 깨고 하느님께 온전히 사랑을 드릴 수 없다고 여기며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성녀는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전인적인 응답을 요청하시는 주님의 신비로운 부르심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내적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이런 성녀의 내적 고민은,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자신이 수도서원을 통해 맺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결혼으로 보고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배타적, 독점적 사랑을 주님께 드리지 못했다는 데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과의 총체적 우정의 관계

그런데 어느 날 성녀는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던 어떤 사람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첫 번째 현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성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엄한 얼굴로 나타나셔서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당신께 불만스러운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나는 육안으로 뵌 것보다도 더 똑똑히 영혼의 눈으로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무섭고 불안해서 다시는 그분과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자서전 7,6). 이 신비 체험 후 젊은 수녀 데레사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방향이 더욱 확고해져 갔습니다. 성녀는 수도서원이 그 서원을 한 사람을 총체적으로 그리스도와 맺어준다는 진리를 깊이 알아들었습니다. 당시 성녀는 의식 속에서 현시를 통해 아주 분명히 감지했던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했습니다. “그런 대화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이렇듯 신심 깊은 영혼들의 신랑이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은 이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녀의 영성에서 더욱 명료해져 갔습니다.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추상적 관념 역시 모든 것을 보시는 그리스도, 당신께 모든 애정을 드리지 않아 화가 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돼 갔습니다.

성녀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영혼을 찾아오시는 ‘신랑’이자 ‘벗’으로서 그리스도 모습 아래 드러났습니다. 결국, 성녀는 이 그리스도 현시 체험을 통해 자신이 그분에게서 깊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자서전 7,18). 성녀는 종교가 단순히 어떤 이념이나 윤리 또는 완수해야 할 일련의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에 집중돼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신앙이란 예수님과의 총체적 우정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1554년 사순절의 회심

그러나 성녀의 삶에서 주님과의 관계에 더욱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준 사건은 그보다 훨씬 이후인 성녀가 40세 되던 1554년 사순절에 있었습니다. 당시 성녀는 수녀원에서 사순절 예식에 사용하기 위해 구해 놓은 예수님 상(像)을 경당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인 예수님을 묘사한 성상(聖像)으로 인류를 위해 숱한 고통을 참아 견디며 밧줄에 묶인 채 채찍질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날 성녀는 이 성상을 바라보며 가슴 밑바닥부터 전율을 느끼고 영혼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녀는 예수님이 당하신 처절한 고통을 바라보며 우리를 향한, 아니 자신을 향한 주님의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을 깨우쳤으며 동시에 그런 사랑에 보답은커녕 그분을 잊은 채 배은망덕하며 살아온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대면했습니다. 그리고는 슬픔에 휩싸여 그 성상 발밑에 엎드려서 하염없이 회심의 눈물을 흘리며 더는 주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는 은총을 주십사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습니다. 통상 이 사건을 ‘1554년의 회심’이라 부르는데, 이때 성녀는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존의 모든 것이 뒤집히는 체험을 하며 주님을 향한 여정에 전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수도자로 사는 삶에 더욱 철저히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는 회심 속에 있는 완덕

성녀의 삶을 따라가며 보게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주님을 향한 성녀의 여정이 강생하신 하느님, 즉 예수님을 끊임없이 알아가는 여정이자 그분을 향한 회심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오로(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의 체험)를 비롯해 성 아우구스티노(밀라노에서 로마 13,13-14에 대한 체험) 같은 분 역시 주님과의 강렬한 만남을 체험하며 일대 회심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 이전과 이후의 여정을 보면 회심은 결코 일회적이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혼신을 다해 진리를 추구했고 진리이신 주님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더욱더 그분의 사랑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세상에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성녀 데레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분의 여정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 이어져 왔고 1554년의 회심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런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간파한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에펙타시스’(epektasis)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는 한쪽 발을 디딘 상태에서 다른 쪽 발을 앞으로 내뻗는 자세를 표현한 그리스어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3장 12절(“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담고 있는 영성적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신자가 지향하는 ‘완덕’(完德)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성덕을 갖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신앙 여정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영성 생활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이라고 합니다. 성성을 향한 목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본성적 이기주의의 성향을 거슬러 오르지 않으면 세파에 밀려 어느새 우리의 삶은 저만치 떠내려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향해 매일 끊임없이 회심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했듯이 우리 또한 매일 우리의 출애굽을 감행해야 합니다.  

-----------------------------------------------

성령, 그리스도와 ‘영적 약혼’의 은혜 중재

-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4.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④

 

▲ 성녀 데레사가 사랑의 불화살에 심장이 관통되는 장면을 형상화한 조각.


 예수님을 향한 결정적 회심인 영적 약혼

 

성녀는 1554년 사순절에 수난하시는 예수님 상을 보며 인류를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치고 크게 회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체험 이후에도 성녀가 완전히 회심한 것은 아닙니다. 성녀는 사람을 참 좋아했고 그들과의 우정이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필요하다고 합리화하며 그런 관계에 의존하고 애착했습니다.

그러던 중 1556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녀는 예수회 소속 프라다노스 신부에게 영적 지도를 받으며 이 문제에 대해 논쟁하게 됩니다. 당시 프라다노스 신부는 온전히 하느님께 마음을 두기 위해서는 그간 애착하고 있던 여러 우정을 포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성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우정이 갖는 유익한 점들을 들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결국, 성녀를 설득하다 지친 프라다노스 신부는 성녀에게 「오소서, 창조주 성령님」 (Veni, Creator Spiritus), 즉 성령송가를 읊으면서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도록 명하게 됩니다. 자신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여기며 불만스럽게 경당에 가서 성령송가를 바치던 성녀 데레사, 그런데 성녀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 성녀에게 결정적 회심의 은총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 이전에도 성녀는 여러 번 회심했고 특히 1554년 사순절 회심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만, 1556년의 이 회심은 성녀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성녀 데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순간이야말로 성녀가 완전히 하느님께 돌아서게 되는 결정적, 최종적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은 성삼위 가운데 특히 성령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고별사(요한 14,15-31)에서 여러 번 힘주어 가르치셨듯이, 성령께서는 궁극적으로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그분께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성녀에게 영적 약혼의 은혜를 중재해주신 분은 성령이시지만 그 은혜의 내용은 결국, 두 연인이 약혼(約婚)을 통해 서로 사랑을 약속하며 온전히 결합하고 미래를 함께하기 위해 뜻을 모으듯, 그렇게 예수님과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적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영적 약혼의 은혜를 받을 당시 성녀는 내면에서 신비스런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동시에 처음으로 탈혼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또한, 그때부터 성녀는 많은 신비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예비 신부가 된 영혼에 잠깐씩이나마 천상 은혜를 맛보게 해주시고, 특히 신랑이신 당신을 엿보는 특은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성녀에 따르면, 이 단계는 6궁방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영적 여정에서 가장 많은 신비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궁방을 소위 ‘신비체험의 궁방’이라 표현합니다.

 

신비 현상에 대한 올바른 식별

성녀 데레사는 일생 많은 신비 체험을 했습니다. 영적 약혼의 단계에서 특히 그러했는데 시기적으로 보면 1556년부터 시작해서 영적 결혼의 은총을 받은 1572년까지 집중적으로 이 체험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든지, 탈혼한다든가, 예수님의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듯이 그렇게 본다든가,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기도 하고, 심장이 사랑의 불화살에 관통되는 체험 등이 이런 신비 체험에 속합니다. 또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비오 성인처럼 오상(五傷)을 받는 것도 이런 체험에 속합니다.

이 기회에 이런 신비 현상이 신앙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잠시나마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가 사는 자연 본성적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에 기적 같은 현상으로 간주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자칫 신앙의 본질을 흐려버리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신비 현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주 신자들을 현혹하는 ‘사적 계시’ 문제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신비 현상과 사적 계시는 서로 다르지만, 사적 계시 또한 신비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전문가의 식별이 요구됩니다.) 신자들은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건강한 상식을 지녀야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호할 식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대전제로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할 부분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공적인 계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세말에 가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그 계시가 충만하게 완성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비 현상, 사적 계시, 심지어 성모님 발현까지 포함해서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예수님이라는 공적 계시를 부연해 설명해주는 차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계시를 권위 있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주체는 지역 교회 내에서는 사도 계승의 직접적 후계자인 주교, 그리고 주교의 교도권을 일정 부분 위임받은 본당 신부입니다. 따라서 신비 현상, 사적 계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에 대한 식별을 교회 교도권의 해석에 맡겨야 하며 신자들은 그 가르침과 해석에 온전히 ‘순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비 현상, 사적 계시와 관련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식별 기준을 바탕으로 그 현상의 진위(眞僞)를 식별해야 합니다: ①신비체험, 사적 계시에 나타난 진리의 내용이 공적 계시에 부합하는가? ②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치하는가? ③그것이 교도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그리고 그 체험을 한 사람이 교도권에 온전히 순명하는가? ④신비 체험, 사적 계시를 받은 사람이 모든 면에서 정상인가? (통계상 이 현상을 체험한 사람 중에 상당수는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음) ⑤신비 체험, 사적 계시가 참다운 영적 결실을 보게 하는가?

성녀 데레사를 비롯해 수많은 성인은 많은 신비 체험을 했음에도 그것에 전혀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르쳤던 본질적인 것은 예수님,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랑과 순명, 신망애 삼덕 같은 가장 기본적인 지침들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신앙의 기본기를 잘 연마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오늘부터 네가 나의 신부(新婦)가 되리라”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5.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⑤

▲ 예수님과 영적 결혼의 은총을 받는 성녀 데레사. 스페인 아빌라 데레사 생가 성당의 색유리화.



영적 결혼: 상흔을 간직한 예수님과의 일치

성녀 데레사가 영적 약혼의 은총을 받은 것은 1556년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습니다. 그 후 성녀가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인격적 관계의 완성인 영적 결혼에 이른 것은 16년이 지난 1572년 11월 18일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당시 성녀는 원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으며 수도 공동체의 쇄신을 위해 십자가의 성 요한을 영적 지도 신부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십자가의 성 요한이 수녀원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성녀와 영적 담화를 나눴는데, 성녀는 그날 아침 미사 때 사제가 영하는 대제병을 쪼개 자신에게도 영해 준 게 매우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성인은 그 다음 날 미사 때 그런 것에 애착하지 말라며 대제병 조각 대신 다른 수녀들과 똑같이 소제병을 영해 주었습니다. 잔뜩 기대했던 성녀는 소제병을 영하고 나서 대제병 조각을 받지 못해 실망하면서 시무룩한 상태에서 영성체 후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녀에게 나타나 상흔이 있는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녀를 위로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 못을 보아라. 이것은 오늘부터 네가 나의 신부가 되리라는 표시이다. …내 영예는 너의 것이고, 네 영예는 나의 것이다”(영적 보고서 35번). 성녀가 체험한 영성생활의 절정에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성녀는 그때야 비로소 그 예수님을 온전히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사랑으로 일치했습니다.



완덕: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완성

성녀는 예수님과의 사랑 관계를 설명하면서 남녀 간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는 ‘맞선’, ‘약혼’, ‘결혼’ 같은 상징적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인격적 관계’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또 하나는 둘 사이의 심오한 관계를 담아낼 수 있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언어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성성(聖性)의 절정은 결코 불교나 힌두교처럼 비인격적인 절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인격적인 분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자 아들이신 하느님 그리고 거룩한 영이신 하느님, 이렇게 세 위격이자 동시에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랜 불교, 유교 문화권 안에 있는 한국적 심성(心性)은 절대자를 위격적인 분이라기보다는 불교, 유교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절대 진리라고 하는 추상적 실재로 받아들이기 쉬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근본적 차이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두 종교의 신관(神觀)을 함부로 섞어버리면 범신론(汎神論)이라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고 사랑과 자비, 용서를 베푸는 아버지 하느님이시자 우리 곁에 인간이 되어 오신 아들 하느님, 그리고 우리를 성화함으로써 본래 인간을 위해 영원으로부터 마련하신 계획을 완성하는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각 위격과 더불어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이를 성숙시켜 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교부들을 비롯해 여러 영성가들은 그 관계가 무르익어 완성되어 감에 따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남녀 간 사랑의 관계로 풀어서 설명해 왔습니다. 성녀가 자신의 영적 여정에서 도달한 ‘영적 약혼’과 ‘영적 결혼’ 역시 성녀 데레사만이 유일하게 독창적으로 체험하고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교부시대에 오리게네스 교부를 기점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오, 위 디오니시오를 비롯해 중세의 여러 신비가들(성 베르나르도, 복자 뤼스브뤽,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이 끊임없이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인간 간 사랑의 관계에서 ‘결혼’은 사랑을 완성하는 최상의 표현입니다. 거기에는 두 남녀 사이의 밀도 깊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한, 두 존재 간의 완전한 일치의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의 토착화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소위 한국적 토양 위에 신앙을 토착화해야 한다며 ‘토착화(土着化)’를 화두로 내걸곤 하지만, 가톨릭 교회가 2000년간 목숨을 걸고 지켜온 신앙의 진리들을 변질시키는 토착화는 많은 영혼을 잘못된 진리의 길로 몰아갈 뿐입니다. 토착화는 ①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오는 불변의 신앙 진리들(삼위일체 하느님,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죽음, 부활 등)을 바탕으로 ②각 시대와 장소, 민족에게 소통 가능한 적절한 사고의 틀을 통해 그 신앙 진리들을 재해석해서 제시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요소 모두를 분명히 알아야 가능한 작업이며 무엇보다 두 요소 가운데 첫 번째 요소에 무게를 더욱 둬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짧은 한국교회의 경우 신앙의 진리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원천적 자료들(2000년 역사상 전해오는 교회 교도권의 문헌들, 교부 문헌들, 성인들과 신학자들의 작품 원전 등)이 극히 일부밖에 소개되지 못한 상황에서, 어설프게 한국적 사상들을 접목해서 이상한 개념들을 도출하고 거창한 수식어를 달아 표현한 개념들을 토착화 작업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그런 토착화에는 반대입니다. 신앙의 근본 진리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수용이 먼저입니다. 이런 선상에서 저는 성교회가 고백하는 하느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자 인격적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과 대화하고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장(場)이 바로 기도입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할 때 모든 신앙생활이 뒤틀어지고 맙니다. 그럴듯한 불교 교리를 그리스도교 교리와 혼합하고 선(禪) 수행에 빠져 이상한 수행 방법을 기도에 접목해 그리스도교적 기도도, 선 수행도 아닌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많은 신흥 영성 운동이 범람하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에서 늘 경계해야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들의 인성(人性)에 매료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6.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⑥

▲ 성녀 데레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모두를 깊이 사랑했으며, 특히 그분의 인성에 관심을 가졌다. 사진은 예수 탄생에 관한 이콘화. 평화신문 자료사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지난 호까지 성녀 데레사가 일생을 통해 어떻게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성숙시켜 갔는지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녀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살펴봐야 할 점은 성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깊은 관계를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예수님 모습에 매료됐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녀가 쓴 주요 작품들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인성’이란 표현은 신학적인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두 가지 본성(本性)을 일컫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그분에 대한 기억을 간직했던 세대가 사라져가고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자 그분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일 뿐 실은 하느님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가 하면, 예수님은 지고지순한 하느님이지 우리처럼 천박한 피조물은 절대 아니라며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神性)만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생겨나 교회에 큰 물의를 빚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초대 교회는 수백 년 동안 홍역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여러 보편 공의회를 통해 이 문제를 정리하고 ‘신경(信經)’에 담아 불변의 신앙교리로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형태가 소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의 골자(骨子)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과 관련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담겨 있는 고백 중에는 “성부와 한 본체”라는 표현과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성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다”는 말에는 우리와 본질적으로 똑같은 인간이시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본성(本性)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는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강생(降生)의 신비, 성부 하느님과 인류를 이어주는 중개자(仲介者)이신 그리스도 인격의 신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중개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자 동시에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올바른 영성의 기초인 인간 예수님에 대한 사랑

성녀 데레사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두 가지 본성,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모두를 깊이 사랑했으며, 특히 그분의 인성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성생활에서 왜 중요할까? 영성생활은 우리가 믿는 바를 실생활로 이어주는 장(場)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영성생활 이전에 선행되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잘못된 영성생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은 부인한다든지 그 반대로 인성만 받아들이고 신성을 부인하게 되면 왜곡된 영성생활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믿고 받아들여야 제대로 된 영성생활의 바탕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명한 신앙생활의 진리를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의혹의 눈길로 바라봤던 사람들이 늘 있어 왔습니다. 성녀 데레사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당시 소위 열심하다는 영성가들 중에는 특히 예수님의 인성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심지어 부인하기까지 하면서 오직 그분의 신성에만 집중해서 그분과 관계를 맺고 기도수련을 하려 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은 순수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성화(聖化) 또는 신화(神化)되는 것은 그런 하느님을 닮아가기 위해 모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자 영혼을 악으로 인도하는 유혹자로 여기며 거부하고 폄하했으며 거기서 유래하는 모든 자연적인 욕구까지도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고 죄악시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영혼이 천상을 향해 진보하는 것은 이 썩어 없어질 헛된 육신에서 벗어나 천사와 같은 순수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역시 그런 부정한 육체를 취하신 인간의 모습은 참된 예수님이 아니라고 여기며 그분의 신성에만 집착했습니다.

성녀 데레사를 영적으로 지도했던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관상기도는 순수 영적인 것이라 기도에 진보하려면 모든 물질적인 형상을 배척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인성도 멀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잘못된 영성지도자들 때문에 한동안 헤매던 성녀는 그것이 뜬구름 잡는 잘못된 기도였다는 걸 깨달으면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와 그분을 많이 사랑해드리고 일상의 삶 속에, 자기 영혼 안에 깊이 현존해계신 인간 예수님과 더 많은 교감을 나누고자 노력했습니다(자서전 22장).

그래서 성녀는 특히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성상, 성화, 상본을 기도생활에서 자주 활용하며 예수님의 모습을 자기 영혼 안에 각인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성부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되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고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시며 함께 음식을 드시고 병자를 치유하셨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분의 모습은 신약성경에 충만히 소개돼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예수님과의 사랑의 대화이자 교감(交感)이라 한다면 신약성경은 최고의 기도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이신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지금 바로 성경을 펼쳐 그분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성녀 대대레사.hwp

 

▲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대대레사.hwp
0.0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