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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곤 발언 계기로 본 KBS 보도실태

김레지나 2014. 5. 19. 13:42

같은 영상 놓고 타방송 “해경, 구경만” KBS는 “선내진입 어려워”

등록 : 2014.05.18 20:16 수정 : 2014.05.18 21:46

 
길환영 한국방송 사장이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김시곤 보도국장의 발언 등과 관련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사과한 뒤 자리를 떠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김시곤 발언 계기로 본 KBS 보도실태

<한국방송>(KBS)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지난 16일 기자협회 총회에서 청와대의 보도 간섭 행태를 폭로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리한 보도는 키우고, 불리한 보도는 축소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케이비에스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9>가 실제로 어떻게 보도했는지 살펴보면, 김 전 국장의 폭로는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KBS 보도 행태 비교(※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 해경 초기 구조 문제 지적 안 해
김 전 국장은 “해경 비판이 이어지니 길환영 사장이 직접 ‘비판하지 말라. 청와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고 폭로했다. 언제 지시가 내려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실제 케이비에스의 보도는 사고 발생 1~2주 뒤부터 다른 방송과 다를 때가 많았다. 이를테면, 해경의 세월호 구조 영상이 최초 공개된 지난달 28일, 한국방송은 ‘해경 경비정 구조하러 왔는데… 적막한 갑판’, ‘구조 안간힘 해경 뒤로 선원들 줄행랑’ 등의 제목으로 선원들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해경은 당시 선체 경사가 심해 선박 내부 진입이 어려웠다. 그래서 외부에서 탈출 지시 방송을 했다”며 해경을 두둔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겼다.

 

반면 <에스비에스>(SBS)는 이날 “해경의 초기 구조작업은 문제가 많았다”, “갑판 위에라도 올라가 배 안에 갇힌 승객을 구해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해경의 초동 대처를 세 꼭지에 걸쳐 비판했다.

 

“승객 구경만 한 해경, 대피 지시도 없었다”고 해경을 정조준하기도 했다. 똑같은 공개 영상에 바탕을 뒀음에도 방향이 완전히 다른 셈이다.

 

SBS “해경 구조작업 문제 많았다”
KBS “해경 안간힘, 선원 줄행랑”

 

‘신고 학생에 위도 물어 6분 허비’
자사 단독보도 21번째 꼭지에 배치

 

타방송 ‘허재호 황제노역’ 보도때
박대통령 유럽순방 보도 ‘심기 경호’
“MB때 김인규사장부터 큐시트 봐”

 

사고 발생 초기인 지난달 21일의 경우, 에스비에스는 네번째 꼭지로 “우왕좌왕 11분 보낸 해경… 엉터리 초동대처”를 보도했으나, 케이비에스는 10번째 꼭지로 “해상교통관제센터(VTS) 해수부-해경 관할 경쟁”을 보도했다. 심지어 “위도·경도 묻는 해경, 초반 6분을 허비했다”는 자사의 단독 보도조차 21번째 꼭지로 배치했다. 23일 “80명 구했으면 대단하다”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킨 해경 간부가 직위해제됐다는 소식을 에스비에스는 별도 꼭지로 보도했으나, 케이비에스 <뉴스9>는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 다른 방송사 ‘황제노역’ 보도하는데, 홀로 ‘박근혜’
김 전 국장은 한국방송이 박 대통령의 ‘심기 경호’에 나선다는 세간의 지적도 사실상 인정했다. “대통령 비판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대통령 관련 뉴스는 뉴스 시작 20분 내로 소화하라는 원칙이 있었다”, “순방 때마다 꼭지 늘리기 고민으로 몸살을 앓았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전남 진도와 경기도 안산 분향소 현장을 찾았을 때 유족들의 분노가 제대로 보도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의 지난 3월 독일 순방 때 각 방송사의 보도 태도는 엇갈렸다. 당시 박 대통령이 한반도 통일구상(드레스덴 선언)을 내놨지만, 국내에선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하루 일당이 5억원에 이른다는 ‘황제노역’ 논란이 들끓고 있었다. 같은 달 29일 에스비에스와 <문화방송>(MBC)은 황제노역 사건을 머리기사로 보도했지만, 한국방송은 박 대통령의 파독 광부·간호사 접견을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황제노역 기사는 “유럽 순방 성과”, “북한 반응”에 이어 네번째 꼭지로 밀렸다. 박 대통령 홍보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셈이다.

 

 

■ “김인규 전 사장부터 큐시트 봤다”
김 전 국장은 이러한 외부의 간섭이 김인규 전 사장 시절 시작됐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캠프 참모를 지낸 김 전 사장은 2009~2012년 사장을 지냈다. 김 전 국장은 “김인규 사장이 뉴스 큐시트를 받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정연주(노무현 정부), 이병순(이명박 정부) 전 사장은 보도 개입을 안 했다. 두 사람은 큐시트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방송 뉴스의 큐시트는 그날 방송될 뉴스의 내용·순서·분량을 기록한 일종의 계획표로 뉴스 제작진이 아니면 볼 수 없도록 돼 있다.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 사장이 시작한 일상적인 보도 간섭 또는 통제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다만, 여권을 위해 서울지하철 사고를 크게 키웠다는 한국방송 노동조합(1노조)의 의혹 제기에 대해 김 전 국장은 “그런 조작은 절대 한 적 없다. 세월호 이후 이어진 사고여서 키울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부인했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신문방송학)는 “김 전 국장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이명박 정부 때부터 청와대가 공영방송을 장악하려 했다는 ‘청영방송’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라며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하루빨리 공영성 강화를 위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뉴스 예고에 대통령 기사 두번째 배치해라”

등록 : 2014.05.18 21:45 수정 : 2014.05.18 21:45

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 노조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방송 별관에서 ‘길환영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5일째 철야농성을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길사장 보도압력 사례

“안철수 기사 당장 빼라” 지시도

<한국방송>(KBS) 기자협회는 18일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직접 작성한 ‘보도 외압 일지’를 공개했다. 이 자료엔 길환영 사장이 보도에 개입한 방식이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길 사장은 지난 6일 서울 조계사 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사과한 소식을 <뉴스9> 헤드라인에 추가하도록 했다. 헤드라인은 뉴스 첫머리에 그날의 주요 뉴스를 모아 예고하는 꼭지다. 김 전 국장은 “대통령이나 정치 아이템이 (헤드라인에) 나오면 시청자가 이탈해 대통령 소식을 예고에 넣지 않았다. 그런데 길 사장이 밤 8시39분에 전화를 걸어와 ‘왜 예고에 대통령 기사 안 나갔느냐. 두번째에 배치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헤드라인은 뉴스 시작 15분 전에 길 사장의 지시대로 바뀌었다.

길 사장은 또 지난 3일 밤 9시5분 김 전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안철수 대표 소식은) 당장 빼라”고 지시했다. 이날 낮 안 대표가 박 대통령의 반성을 촉구했다는 소식을 자막 뉴스로 내보내려던 참이었다. ‘안철수 대표 “대통령 통렬한 사과 요구” vs 새누리 “사과 수습이 먼저”’라고 균형을 잡아 자막 제목을 뽑았는데 이마저도 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김 전 국장은 지난 1~8일 사이 모두 4차례 길 사장이 <뉴스9> 제작에 개입했다고 밝혔다.

해경 비판을 자제하라고 했다는 길 사장의 지시와 관련해 김 전 국장은 “5일 오후 2시, 사장이 누구와 점심을 먹으면서 들었는지 이례적으로 보도본부장·보도국장·편집주간·취재주간 회의를 소집해 해경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라 지시했다”고 했다. 지난 8일엔 해경 비판의 보도 꼭지가 예정기사 목록에 잡히자 그대로 전달되면 사장의 저지가 있을 것으로 보여 ‘해경’이라는 말을 지운 가짜 큐시트를 만들어서 사장실로 보냈다고도 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