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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김레지나 2014. 5. 10. 17:58

‘나 때문이야’가 무력감을 잠재우는 역설

등록 : 2014.04.25 19:30 수정 : 2014.04.27 20:27

[토요판] 최병건의 ‘자학의 거울’

 


(3) 트라우마

앞의 글에서 저는 담론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인 타령’도 그렇게 생산되고 소비됩니다. 이제 ‘한국인 타령’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째 주제는 트라우마(trauma)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외상(外傷)입니다.

일상적으로도 많이 쓰이는 용어라서 익숙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사실 외상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입니다. 외상이라 하면 제일 먼저 테러나 범죄, 사고 등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연상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큰 위험에 처할 때만 외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외상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아서 심한 혼란과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충격이 신변의 위협일 필요는 없습니다. 외상의 핵심은 위험이 아니라 혼란과 무력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생소한 환경에 노출되는 모든 일이 어느 정도의 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갑자기 목숨을 잃으면 당연히 외상이 일어납니다. 부모의 이혼도 아이에게는 외상이 됩니다. 처음 집을 떠나 유치원에 가는 것, 군대에 가는 것 모두 어느 정도 외상적인 경험입니다. 사실,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외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따뜻한 물에 잠겨 있다가 예고도 없이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는 세상으로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한 대 얻어맞기까지 하니까요.

인격 분열된 ‘박하사탕’의 영호를 아시나요

영화 <박하사탕>은 외상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1980년 5월 주인공 영호는 진압군으로 광주에 투입됩니다. 경황없이 뛰던 중 그는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를 총알을 다리에 맞습니다. 통증 때문에 대열에서 낙오한 그가 실수로 발사한 총에 한 소녀가 맞아 죽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립니다.

영호의 외상은 총상 때문도, 실수로 소녀를 죽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전에 이미 외상은 발생했습니다. 제 나라의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라는 명령이 군에 떨어지는 세상은,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믿고 의지했던 삶의 의미와 인간의 가치는 그날 광주에서 말살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혼란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습니다.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그의 정신은 붕괴되어 갔습니다.

 

외상이 가져오는 불안과 공포는 사람의 마음에서 해리(解離)를 유발합니다. 끔찍한 사고나 범죄의 희생자들이 경험하는 소위 유체이탈이나 기억상실이 해리 현상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해리는 외상의 기억을 마음의 다른 부분에서 격리하려는 시도입니다. 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기억을 격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상의 기억이 의식에서 지워집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에서 어떤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식에서 지워져도 외상의 기억은 무의식에 남아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과거가 연상되는 일이 생기면 영호는 다리를 접니다.

 

격리된 기억 속 세상은 평소와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기억 속 자신 또한 평소의 자신이 아닙니다. 그런 기억이 마음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여러 사람의 기억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인격은 분열됩니다. 소위 다중인격장애는 극단적인 분열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 인격장애는 한 사람의 몸 안에 여러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만들어냅니다. 그 여럿은 이름과 나이, 성별이 다르고 성격도 완전히 다릅니다. 서로 알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었을 때의 일을 기억도 못합니다. 다중인격만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일관되지 못한 행동을 통해 인격의 분열을 드러냅니다. 세상에 대한 시각이나 가치관에 일관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영호는 아내의 외도 현장을 습격하러 가면서 정작 자신은 내연녀를 동반합니다. 잔인한 고문을 마친 후의 회식자리에서는 미성년자인 술집 종업원을 훈계하는 뜬금없는 윤리의식을 보여줍니다.

 

외상에 의해 마음이 조각나고 인격이 분열되는 것이 해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외상은 피해자들에게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유발합니다. 외상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나 그 후손을 대상으로 가장 많이 연구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던 상황, 언제든 누구든 끌려가서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부조리한 폭력에 저항도 못하고 희생자들(특히 가족)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기만 한 것에 대해 심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프리모 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서 사라지게, 익사한 사람들이여. 난 누구의 자리도 빼앗지 않았네.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네. 나 대신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대들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내가 살아서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자고 입고 있는 건 내 잘못이 아니라네.”

이런 감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가족과 동료가 희생되는 상황에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운 좋게 혼자 살아남았다면 수치심과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감정이 얼마나 괴로울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감정뿐이라면 세상의 위로와 격려 속에서 어느 정도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중 많은 수가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정신분석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상식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훨씬 뿌리 깊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찾아냈습니다. 이 정체불명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정신분석은 무력감에 대한 방어로 설명합니다.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한국인 타령’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탄생 자체가 외상이라는 이야기를 앞에서도 했지만, 사람은 철저하게 무력한 상태로 세상에 나옵니다. 부모가 돌봐주지 않으면 아기는 살 수 없습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나의 생존을 전적으로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타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소멸될 것이라는 공포입니다. 이것을 ‘소멸불안’이라 부릅니다. 소멸불안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공포라고 정신분석은 생각합니다.

 

스스로 생 마감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맘속에 정체불명의
뿌리깊은 수치심과 죄책감
정신분석은 이러한 심리를
무력감에 대한 방어로 설명

외상 입은 사람의 자기비하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입니다
외상이 남의 손 아닌 내 손에
달려있었다는 전능한 생각이
공포의 소멸불안 잠재워줍니다

 

자기비하와 전능감의 절묘한 조화

 

소멸불안을 떨쳐내려면 혼자 살 수 있다는 착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부모의 능력과 자신의 능력을 혼동해야 합니다. 즉, 배가 고프면 저절로 젖이 입에 들어오고 기저귀가 축축해서 불쾌하면 자동적으로 새 기저귀가 채워진다고 느껴야 합니다.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느끼게 되는 이런 착각을 전능감(全能感)이라고 부릅니다.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건 엄마라는 사실을 모르는 아기 입장에서는 당연한 착각이기도 하지만 모든 아기에게 이 착각이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능감은, 아기에게 필요한 것을 민감하게 감지해서 제공하는 엄마가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해서 소멸불안이 지속되면 나중에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외상은 모든 사람에게 극도의 혼란과 무력감을 유발합니다. 그 결과, 마음속 깊숙이 숨어 있던 소멸불안이 의식으로 올라옵니다. 궁극의 공포, 소멸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전능감을 소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 내가 원하면 뭐든지 이루어진다는 유아기의 전능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어른의 마음은 전능감을 되찾기 위해 괴상한 일을 벌입니다. 바로 자기비하입니다.

 

자기비하와 전능감은 일견 정반대의 개념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전능하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 모순인 이 두 가지는 마음속에서 절묘하고도 역설적인 조화를 이루어냅니다.

 

외상 입은 사람의 자기비하는 외상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즉, 내가 못나서 외상이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음은 엄마가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 채워줬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원해서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아기의 생각처럼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입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는 모든 것이 나 때문이고, 따라서 외상도 나 때문입니다. 내가 무능력해서 외상이 일어났고, 바꾸어 말하면 내가 유능했으면, 또는 내가 달리 행동했으면 외상을 막을 수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결국 외상이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에 달려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그야말로 전능한 생각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구된 전능감은 외상의 혼란과 무력감, 그로 인한 소멸불안을 잠재워줍니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외상이 나 때문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뿌리 깊은 수치심과 죄책감의 원인입니다. 이것은, 가능한 한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의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보다는 무력감과 소멸불안이 훨씬 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대가로 무력감과 소멸불안을 잠재우는 거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비하가 전능감을 뒷받침하는 역설이 성립합니다.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선조들의 독립의지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해방도 우리 힘으로 이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식민지가 된 것도, 해방이 된 것도 남에 의해서였습니다. 그 후에 이 땅의 허리가 잘린 것도, 이 땅이 미국과 소련의 전쟁터가 된 것도 우리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이어진 긴 세월의 군사독재는 탄압과 고문, 비상사태와 계엄령의 시간이었습니다. 비행기가 하늘에서 폭파되기도 하고, 1980년에는 군이 국민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야당 총재가 하루아침에 여당 총재가 되는 일도 있었고, 전직 대통령의 자살도 있었습니다. 1년 사이에 한강 다리와 백화점이 연달아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사이코패스’라는 담론의 거래

 

외상은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도, 국가도 외상에 노출됩니다. 그 효과는 개인이 외상을 당했을 때와 동일합니다. 극도의 혼란이 찾아오고, 사회의 가치는 분열됩니다. 그 와중에 사회의 개개인은 극심한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있다는, 세상이 내 통제하에 있다는 착각, 전능감을 회복하기 위해 자기비하가 시작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그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무력감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못나서’라는 생각이 견디기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상의 이유를 모르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불편한지를 잘 보여주는 예는 사이코패스 담론입니다. 동기가 불분명한 연쇄살인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공포감을 느낍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해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이코패스’ 담론이 급조됩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사이코패스 운운하면서, 마치 범인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그 괴물이 무섭기는 하지만 모르고 있을 때의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은 완화됩니다. 막연한 공포를 구체적인 공포로 대체하는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 100년은 외상으로 점철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100년의 세월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남의 손에 운명이 좌우되었던 무력감을 떨쳐내기 위해 소환된 전능감은 이 사회에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는 자기비하에 의한 ‘한국인 타령’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능감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과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우리는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겉으로는 정반대의 현상이지만 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쌍둥이일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외상에 대한 다른 이야기와 더불어 다음 회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 이 원고를 쓰는 동안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또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이 크나큰 외상 속에서 우리 모두는 또 한번 무력감의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이 사고로 희생되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등록 : 2014.05.09 19:31 수정 : 2014.05.10 14:18  한겨레 신문

[토요판] 최병건의 자학의 거울
(4) 외상의 극복

혼란과 무력감, 그리고 분출할 곳 없는 분노가 또다시 우리를 집어삼켰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또 한번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해야 하는지, 아무 말도 않는 것이 나을지, 저 또한 깜박이는 커서만 바라보며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었습니다. 이미 무성한 말잔치에 쓸데없는 소리를 보태는 것은 아닐지, 자칫 누군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외상을 이야기하면서 이 일에 대해 침묵하는 것 또한 옳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상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건에 대해, 그리고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사건을 겪으면서 느꼈던 혼란과 무력감, 그리고 공포. 그 후에 찾아오는 수치심과 죄책감, 우울, 분노. 그 모든 것이 충분히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외상에 대한 이야기는 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무척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상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고통을 직면할 수 있는 마음도 준비되어 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알게 돼서 모르는 역설, 그것이 외상

 

 

외상을 겪으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이제껏 알고 믿었던 세상의 의미와 삶의 가치가 산산조각 나고, 혼란으로 가득한 생경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한번 그 세상을 경험하면 다시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지만, 그가 돌아갈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래의 세상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외상은 새로운 것을 ‘알아버리는’ 경험입니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끔찍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몰라야 할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갑자기 뭐가 뭔지 모를 혼란에 빠집니다. 알게 돼서 모르게 되는 역설. 그것이 외상입니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고 꼭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원래의 시각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새로운 정보는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줍니다. 완전히 생소한 정보는 이해보다는 혼란을 초래합니다. 이 혼란에 대처하는 손쉬운 방법은 그 정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면 이 방법도 나쁠 것 없습니다. 사실, 세상의 무수한 정보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걸러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한 정보도 곧잘 무시합니다. 마음속 선입견이 어떤 정보는 처음부터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티브이의 정치 토론에서 토론자가 상대의 의견에 설득되는 장면을 보신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입니다. 상대가 어떤 정보를 제시하든 토론자들은 시종일관 자기 얘기만 합니다. 선입견으로 가득한 마음에 새로운 정보가 더해져 봤자 쇠귀에 경 읽기밖에는 안 됩니다.

 

앞글에서 설명한 해리는 새로운 정보를 무시하는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외상적 경험을 마음의 한 부분에 격리하는 것이 해리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상의 일차적 고통은 줄지만 인격의 분열이라는 큰 대가가 따릅니다. 고통은 줄지만 혼란은 줄지 않습니다. 해리는 새로운 정보를 배척해서 원래의 세상을 지키려는 시도이지만,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원래의 세상은 이미 깨졌기 때문입니다. 외상에 관한 한, 무시는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해결책은 이야기뿐입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외상의 극복을 돕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가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상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내는 주관적 세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있는 그대로의 세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몸에 있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가시영역의 색만 보고 가청영역의 소리만 듣습니다. 적외선, 자외선이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의 세상과는 무관합니다. 초음파로 지도를 그리는 박쥐의 세상과 눈을 통해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학습도 세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중세 유럽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달린 세상이었습니다. 조선시대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세상이었고 1970년대에 우리는 공산당이 없어지면 세계평화가 찾아온다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지금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각자의 경험에 의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내가 아는 엄마는 내 엄마이고 내가 아는 고통은 내가 겪어본 고통입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다는 걸 들어서 상상할 수 있지만,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운이 좋아서, 우리 대부분은 엄마에게 학대받지 않고 자라고, 고문 같은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지도 않습니다.

 

감각과 학습도 경험이라고 본다면, 우리의 세상은 결국 우리의 경험으로 구성됩니다. 우리 경험의 한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무엇인지,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나는 누구인지 압니다. 아니, 안다고 느낍니다. 경험 안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차근차근 만들어 갑니다.

 

외상이 궁극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외상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외상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깨져버린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어도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들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외상이 파괴한 삶의 의미를 대신할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면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집니다. 그 의미는 외상의 피해자와 전문가 사이의 오랜 이야기를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삶의 의미는 각자의 몫입니다. 누구도 의미를 만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전문가의 역할 또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입니다.

 

 

 

희생자뿐 아니라 삶의 의미도
함께 잃어버린 세월호 유가족들
위로와 격려는 별 도움 못됩니다
그분들이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함께 세워줄 이들이 필요합니다

책임자들을 엄벌해야겠지만
무력감 피하려는 한국인 타령은
외상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일 뿐
이제 집요하게 이야기를 합시다
외상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자기 탓과 남 탓, 실패할 운명의 몸부림

 

 

세월호 침몰과 같은 엄청난 외상을 당한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분들이 잃은 것은 희생자만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분들이 애도해야 할 것도 희생자만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마음속에서는 잃어버린 삶의 의미에 대한 애도도 같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길고 힘든 과정입니다. 섣부른 위로나 격려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옆에서 그 먼 길을 같이 걸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만일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면, 외상을 입은 마음은 ‘자가치유’를 시도합니다. 그런 시도 중 하나가 자기비하라는 것을 앞의 글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자가치유의 또 한 가지 방법은 나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탓하는 것입니다. ‘투사’라고 부르는 방법을 통해서, 외상을 입은 사람의 마음은 누군가를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해서 분노를 쏟아내고 복수를 다짐합니다. 자기 탓과 남 탓. 정반대로 보이지만 둘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외상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이유를 찾는 목적은 당연히 혼란과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탓도, 남 탓도 세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처절한, 하지만 실패할 운명의 몸부림입니다.

 

앞글에서 자기비하와 전능감의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전능감은 겉보기에는 자기비하와 정반대로 과도한 자신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외상의 경험을 이겨냈으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인데, 외상의 무력감에 대한 역작용이기 때문에 건강한 자신감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네까짓 게 뭘 안다고?’라는 식의 우월감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회가 경험하는 외상의 경우에는 전문적 도움 같은 것을 기대하기가 더욱 힘듭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모두가 외상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가 외상을 받으면 위에 열거한 자가치유의 모든 현상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외상으로 점철된 근대사를 가진 우리 사회가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서로 편을 갈라 싸우겠지만, 우리의 남 탓 또한 어느 곳 못지않습니다. 정치로 갈리고, 지역으로 갈리고, 세대로 갈리고, 심지어는 남녀로 갈려서 서로를 비방합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이 모양이고, 그들만 없으면 세상이 잘 돌아갈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의 혼란과 무력감을 누군가의 원인으로 돌려서 적개심을 뿜어내는 것입니다.

 

유아기적 전능감이 만들어내는 과도한 자신감이 표현되는 예로는 핵무장을 하면 아무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폭력적인 생각, 세계 최고의 줄기세포 기술을 미국이 빼돌렸다는 음모론, 민족 정서에 호소한 수준 이하 영화의 흥행,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광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서글픈 우월의식은 그 자신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자기비하 하지 말자더니, 이 글이야말로 자기비하가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하와 반성은 다릅니다.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자는 것이지 우리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반성하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무척 지루하고 어려운 작업입니다. 외면하고 싶은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인 타령’이나 ‘대한민국 만세’로 자꾸만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나든, 남이든,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훨씬 쉽고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일견 반성처럼 보이는 자기비하는,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은 것을 외면하는 얄팍한 방법일 뿐, 진지한 반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는 졸부일 뿐 선진국이 아닙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기사 중에 ‘껍데기만 선진 한국, 불신지옥에 빠지다’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자기비하와 우월의식이 기묘하게 섞인 우리의 자기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입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선진국이었습니까? 미국의 용병이 되어서 번 돈, 인권을 팽개치고 돈을 택해서 번 돈, 오이시디(OECD) 국가 평균의 세 배에 달하는 자살률을 대가로 번 돈으로 선진국이 되었다는 생각 자체가 반성 없는 사회의 자기인식입니다. 우리는 졸부일 뿐, 선진국이 아닙니다. 개인도, 사회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양한 토론과 뼈저린 반성이 필요합니다.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2차 대전의 전범이라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된 독일과 자신들의 잘못을 한사코 외면한 일본의 차이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군부독재를 겪은 우리는 어땠습니까? 회복에 필요한 시간도, 이야기도, 반성도 우리는 가지지 못했습니다. 친일파를 숙청하지도 못했고 독재자들을 심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혼란과 무력감이 괴로워서 과거를 외면한 채 나를 탓하고 남을 탓하기에 바빴습니다. 이제 외면을 멈추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하나하나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외상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길입니다.

 

세월호의 침몰에 관여한 자들은 당연히 엄벌해야겠지만, 그런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그래 왔듯 우리는 속시원한 결론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늘 그래 왔듯 이 사건도 어느 정도 파헤쳐지다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총체적인 부정부패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 흩어져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또 한 번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통감할 것이고, 우리의 분노는 표적을 놓쳐버린 울분이 되어 가슴을 멍들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뻔히 예상되는 이 사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외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입니다. 무력감을 피하려고 한국인 타령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국인 타령, 국민성 운운은 반성이 아닙니다. 외상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늘 한국인 타령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건을 잊을 때쯤 되면 또다른 자기비하, ‘냄비근성’이라는 말로 한국인 타령을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이클을 돌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였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길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외면하고 싶겠지만, 집요하게, 끝까지 가야 합니다. 아니,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에 대해서, 우리가 입은 외상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