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신나고 힘나는 신앙 32 - 부활 사건의 복기

김레지나 2013. 8. 18. 23:33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32) 부활 사건의 복기

“그분은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발행일 : 2013-08-18 [제2858호, 13면]

■ 과연 증명이 필요할까?

영화 「베르나데트의 노래」에서, 베르나데트의 환시와 그에 따른 루르드의 기적을 증명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때, 한 등장인물이 말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런 설명이 필요치 않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부족하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무엇이건 이미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증명’이 필요 없다. 그렇다면 증명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증명이 필요할까? 실효적으로 말해서, 증명이 필요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 삐딱한 시선으로 의심의 물음을 묻는 사람에게는 어떤 증명의 시도도 통하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설령 그럴듯하게 증명을 한다 해도, 그 고집스런 ‘삐딱한 시선’은 또 다른 트집거리를 찾아낼 것이기에.

예수님 부활도 똑같다. 지금부터 내가 아무리 증언해도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얘기는 다 알고 믿어요. 이제 필요 없어요” 이렇게 되지만, 믿음을 안 가진 사람이라면, “그게 뭐? 그래서 어쨌다구?” 계속 이렇게 수긍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는 라틴어로 ‘레술렉시트 아 모르투이스’(resurrexit a mortuis)다. 여기서 ‘레술렉시트’는 ‘다시 일어나다’를 뜻하는 ‘레수르고’(resurgo)의 변화형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성경 본문의 그리스어는 ‘에게이레인’(egeirein)인데, 이는 ‘일어나다’ 또는 ‘깨어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교차적으로 사용되는 또 다른 단어 ‘아나스타시스’(anastasis)는 부활되심의 측면을 부각시킬 때 주로 사용된다. 다시 생명 활동을 영위하게 된 결과를 의미하는 부활(復活)이란 한자어는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쉽지 않은 단어임이 분명하다.

■ 최초의 목격자 마리아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부활을 기술하고 있는가? 낱낱이 살펴보기로 하자.

“그분은 살아 있다!”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둘 늘기 시작하였다. 전대미문의 해괴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문의 원출처는 마리아 막달레나였다(마태 28,1-8 참조).

나는 이 마리아 막달레나가 왜 첫 번째 부활 목격증인이 되었는가에 대해 「맥으로 읽는 성경」 등에서 시로 풀이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핵심만 언급하려 한다.

성경을 따라 가다 보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반드시 열두 제자가 있었다. 이 열두 제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들은 열세 번째 제자였다. 그 여인들의 대표가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항상 이 공식이 성립했는데 후에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실 때 이 공식이 허물어졌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제자들은 없는데 마리아 막달레나 일행이 꼭 함께 하는 것이다.

결국 의리를 더 많이 지켰던 이들은 누군가? 여인들이다.

게다가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 일행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한다. 갑자기 시체를 수습하는 바람에 향유를 발라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잠을 자고 있던 그 꼭두새벽에 세 여인은 예수님께로 간다. 여인 일행은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드리려고 간 것이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 잘 보일 욕심이 있었겠는가, 없었겠는가?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자기의 충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뿐.

그렇다면 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 충실했을까. 이유가 있다. 그녀는 옛날에 일곱 마귀에 걸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은 여자였다. 그런 중에 예수님이 치유를 해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저분이 나의 은인이다. 끝까지 충성을 다하겠다!”는 비상한 의리가 발동했던 것이다.

하여간 여인 일행이 그 새벽에 당신을 찾아갔는데 예수님이 열두 제자 챙기느라고 베드로한테 제일 먼저 딱 나타나시면 되겠는가? 안 된다. 주님에게도 도리가 필요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 주셨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힘이 되는 사실이다. 특권보다도 정성이 먼저다. 우리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정말 예수님께 눈먼 사랑을 보여드리면, 교황님보다 더 먼저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다. 아멘!

■ 열한 제자의 증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와서 사실을 알리자,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는 곧장 무덤으로 달려간다. 베드로 사도는 무덤 안에 들어가서 그 안에 시체가 없고 거기 예수님을 덮고 있던 것들이 한쪽에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고서 그냥 나왔는데, 요한 제자는 같은 것을 보고서 예수님 부활을 직감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베드로 사도보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확신했다. 부활하셨구나!

그러고서 바로 그날 저녁. 그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이 두려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혹시나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추종자였던 자신들을 ‘시체도난범’으로 추적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런데 문을 단단히 잠가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제자들은 죽음을 이기신 장엄한 승리를 함께 나누기 위해 오신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상기된 채 부활의 증거자로 나섰다.

예루살렘에서 30리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토록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그들이 택한 길은 일단 엠마오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지난 며칠 동안의 엄청난 사건에 대해 슬픔과 걱정에 찬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다가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구세주였다. 하지만 그분은 이내 그들에게서 사라지셨고 흥분을 가누지 못한 두 제자는 서로 어리둥절해 하며 얼굴만 쳐다보았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 사도 바오로의 증언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바오로 사도는 목격담들을 수집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8).

그리스도의 부활 소문을 퍼트리며 혹세무민하는 그리스도인을 소탕하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중 바오로는 극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하늘로부터 비춰오는 강렬한 빛에 눈을 못 뜨고 땅에 엎드리자 음성이 들렸다(사도 9,3-5 참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는 음성이 들리고, 우여곡절 끝에 박해자 사울은 부활의 증인 바오로로 바뀌었다.

여담이지만,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사도 9,3)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표현이 좋아서 그렇지 결국 벼락 맞았다는 얘기다. 바오로는 벼락 맞고 살아난 사나이다. 그랬기에 그의 부활 증언은 역동적이고 극적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