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오피니언부장 |
폴레마르코스 집에 초대받은 소크라테스는 묻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격대로 집주인과 ‘정의란 무엇인가’를 놓고 슬슬 문답을 주고받는다. 다소 단조롭게 이어지던 대화는 트라시마코스가 두 사람 사이에 “야수처럼” 뛰어들면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 기세등등한 소피스트는 정의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 단언한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통치자는 자기한테 유익한 것을 법으로 제정해 놓고는 그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라고 선포한다. 통치받는 사람들이 법을 어기면 가차없이 처벌한다. 그러니 정의란 결국엔 강자, 곧 통치자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정의야말로 불의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소크라테스는 반문한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선장은 승객의 안전을 돌본다. 마찬가지로 통치자는 통치받는 시민들을 이롭게 하는 사람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순진함”을 비웃으며 트라시마코스는 일갈한다.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은 정말 양 치는 사람이 양떼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양떼가 수단이듯이, 통치받는 사람도 통치자의 수단일 뿐이라는 말이다.
트라시마코스가 보기에 강자란 보통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거대한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기꾼·절도범처럼 작은 불의를 저지른 자들은 범죄자로 지탄받고 처벌받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아주 큰 불의를 저지른다면, 그리하여 아예 나라를 통째로 훔친다면, 그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게 바로 정의의 실상이다. 트라시마코스의 논변을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다. 기고만장해진 트라시마코스는 확언한다. 만약 강자가 불의를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다면 그는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상대의 약점을 찾던 소크라테스는 이 대목을 놓치지 않고 창을 밀어넣는다. 불의만 가지고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다. 깡패나 도둑의 무리를 보라. 악을 도모하는 자들도 나름의 의리와 신의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논리적 추궁으로 소크라테스는 겨우 적수를 주저앉힌다. 주목할 건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의 입을 막는 데 동원한 논리가 현실에서 불의가 행해지는 참모습을 불현듯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100% 순수한 거짓말보다 진실이 조금 섞인 거짓말이 더 큰 효과를 내듯이, 불의가 최고의 결과를 내려면 ‘의로움’이 섞여야 한다. 불의로 얻은 장물도 그들끼리 ‘의롭게’ 나눠야 뒤탈이 없는 것이다.
‘국가정보원 대선여론공작’ 진실규명 활동이 국정원과 여권의 조직적 훼방으로 파행을 거듭하더니 본질이 파묻혀 실종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보기관이 개입해 국민주권을 훼손하고 선거과정을 뒤틀어놓은 국기문란이 사태의 핵심이다. 이토록 중대한 민주주의 유린 행위를 단죄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의를 정의로 만드는 일이다. 프로이센 군주제와 타협한 후년의 헤겔은 <법철학> 제3장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위대한 일을 이루려면 여론을 경멸할 줄 알아야 한다.” 통치자는 여론 저 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다. 국정원 선거개입의 직접적 수혜자인 이 나라의 대통령이 자신은 마치 아무 일도 모르는 양 짐짓 시치미를 떼고서 헤겔의 그 불순한 명제를 실천하고 있다. 트라시마코스라면 이 무책임에서 ‘강자의 정의’를 볼 것이다.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명섭 오피니언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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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욱의 서양사람] 소크라테스의 죽음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
그러나 자세히 살핀다면 그는 정치적 이유보다는 아테네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비판 때문에 죽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부도덕함이 아테네의 전반적인 기조가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이 시기 그리스 도처에 만연하던 ‘힘이 정당성을 만든다’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듯 그는 ‘등에’가 되어 아테네를 성가시게 했다. 그는 올바름을 생각하고 선을 추구하라고 정의감을 부추기며 그 시민들을 괴롭혔다. 등에에게 돌아온 것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정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고발이었다.
또 다른 제자 크세노폰은 고발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임종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에 대한 변론을 도전적으로 펼쳤다고 전한다. 목적을 갖고 행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맞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결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유죄 평결로 사형을 맞게 되었다. 간수를 매수한 친지들이 외국으로 탈출할 계획을 꾸며놨고, 고발자들마저 그가 달아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도피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증거일 뿐이고, 진정한 철학자는 그런 두려움이 없다고 믿었다. 그는 “죽어야 할 시간이 왔다”며 죽음을 택했다. 자신의 죽음이 아테네의 불행을 구제할 처방임을 암시하듯, 헴록을 마신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제물을 바쳐달라는 것이었다.
의롭게 죽어 영원히 살아있는 누군가가 그립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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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 패전의 분풀이였나 |
<아테네의 변명> 배터니 휴즈 지음, 강경이 옮김/옥당·2만8000원 |
<아테네의 변명>
배터니 휴즈 지음, 강경이 옮김/옥당·2만8000원
‘올림피아 제전에서 승리한 영웅처럼 나를 찬양하라. 내가 행한 모든 선을 인정해 국가 비용으로 내게 공짜 저녁을 영원히 제공하라.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
이게 사형될 처지에 놓인 피고가 할 말인가, 재판정의 군중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기원전 399년 5월 그리스 아테네 종교법정에서 피고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는 청개구리처럼 행동했다. 배심원들과 청중들에게 평생 아테네를 위해 산 자신은 형벌 아닌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신한테 공인을 받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군중들은 고함을 질렀고 그제야 그는 벌금형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남은 것은 사형 판결뿐이었다.
영국의 대중역사가 베터니 휴즈가 지은 <아테네의 변명>은 이 세기의 재판 상황을 중계하듯 생생하게 재현한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이뤄진 재판은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아테네 신들에게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3명의 원고가 고소한 끝에 이뤄진 것이었다. 재판 실황을 책으로 넘겨보면, 독당근즙을 마시고 숨진 그의 형 집행은 필연적이란 느낌마저 들게 된다. ‘왜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현장이 역사의 비극이 됐는가?’라는 지은이의 의문도 그런 맥락에서 풀리게 된다.
<아테네…>는 이 재판을 실마리 삼아 10년 동안 고대 문헌과 최근 발굴된 아테네의 수많은 고고유적을 섭렵하며 현자의 죽음에 얽힌 배경을 샅샅이 뜯어보는 일종의 역사 다큐다. 민주정 이름 아래 탐욕스런 정복 전쟁에 광분했던 제국 아테네와 그 아래서 전란에 신음했던 장삼이사 시민들의 고단한 삶 등을 통해 허약한 고대 민주정치의 그늘을 드러내 보이는 책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면에 도사린 아테네가 겪은 엄혹한 시대상황을 차례로 복기한다. 그 핵심은 두 차례 스파르타와의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입은 아테네인들의 빈궁과 정신적 공황 상태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소크라테스의 애제자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에 중요 정보를 넘기면서 아테네는 패전한다. 시민들은 스파르타에 해마다 거액의 배상금을 내야 했고 그들의 일상도 소송과 배신, 저주의 습속이 만연했다. 이런 마당에 참전용사 소크라테스가 도덕과 휴머니즘이 사라진 사회를 비판하고 삶을 되돌아보라는 성찰을 설파한 것은 되레 희생양을 찾는 구실만 줬다. 사상에 열려 있던 전성기 아테네 민주정에선 문제가 아니었지만,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당시 시민들에게 그는 짜증스러운 괴짜철학자일 뿐이었으며, 제자들이 아테네 패전과 내분에 연관됐다는 점도 빌미가 됐다고 그는 짚어낸다.
책 곳곳에는 기시감이 흐른다. 동족간 골육상쟁과 궤변과 요설이 난무하는 직접민주정치의 모순은 한국의 분단 질곡,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의 궤변 속에 탄생한 전세계적 양극화의 상황과 연결되지 않는가. 고대 그리스 민주정치 쇠망사에 대한 논픽션격인 책을 읽다보면, 설득·합의를 미덕으로 삼는 민주주의가 지선의 가치체계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